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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만남, 여자와 남자의 시각 차이에서 발생하는 오해 등이 감성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김인숙 장편소설 <우연>. 불모의 고독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내밀하게 응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랑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화려하게 등단한 뒤, 2000년 현대문학상을 받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펼치며 작가 생활 20년째로 접어드는 여류 작가 김인숙의 새 장편소설 『우연』이 출간된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의 주제 의식인 '현대인의 외롭고 힘든 정체성 찾기'가 표출되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어느 소설보다도 감히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솔직하고 사실적인 문체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 구성은 특히 젊은 층의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들이며 공감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 속에 엇갈리는 만남, 여자와 남자의 시각 차이에서 발생하는 오해 등이 감성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화 내용과 섹스 장면은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한다. 고독하고 외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각자 섬처럼 부유하는 현대인은 '우연'이라는 연결 고리에 의해 서로의 삶에 점차 뿌리를 내린다. 상처받고 길을 헤매는 자들이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회복하는 김인숙의 사랑 찾기는 궁극적으로 불모의 고독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내밀하게 응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랑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연』의 줄거리
건축 설계가인 승인은 기연을 처음 소개받고 만난 날, 술에 취해 그녀에게 모텔에 가자고 한다. 기연 역시 거부하지 않고, 그들은 첫 만남에서 섹스를 한다. 여자와 얽매이는 관계를 싫어하는 승인은 자신과 아무 약속 없이 섹스만 하는 여자를 원한다. 한편, 기연 역시 오래전 사랑했던 한 남자로부터 입은 상처를 안은 채 이혼까지 한 여자이며, 때문에 섹스를 즐길 뿐, 사랑은 하지 않으려 한다. 둘은 승인의 아파트에서 관계를 계속 갖지만, 서로가 간섭하거나 구속하려 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연이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일본의 후쿠오카로 떠난다고 하고, 그녀의 나이가 실은 서른둘이 아니라 스물여덟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승인은 기연에 대해 점점 더 궁금증을 갖게 됨과 동시에 이유 없이 화가 치미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점차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다른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기연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녀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는 승인은 기연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한다.

반면, 이혼한 뒤 외로움에 떨며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했던 기연은, 카페 벤치에서 만난 진이를 통해 온갖 난잡한 섹스가 난무하는 장소인 '후쿠오카'에 다녀오게 된다. 그 뒤 며칠간 정신을 잃었던 기연은 사촌오빠인 현중의 도움으로 지난 일들을 잊고 백화점 직원으로서 새 삶을 산다. 하지만 대학 때 사랑했던 남자, 하루 온종일 기다려야 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는 기연은, 현중의 소개로 만난 승인과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그와 안정된 생활을 하려는 자신을 부정하려 한다. 처음엔, 지금까지 없었던 완벽한 섹스 파트너에 불과했지만, 점차 자기도 모르게 그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자신의 감정이 달아오르는 것을 그녀도 이젠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서로가 맴돌던 어느 날, 승인은 만취를 한 채 어떤 집의 설계도면을 그리고, 그것을 선물로 기연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서로의 본심을 의심하고 있던 중, 기연에게 오래전의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부산에 다녀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기연이 죽고 난 뒤, 승인은 자신이 그녀에게 준 설계도면을 펴보다가 그녀가 자신과의 결혼을 꿈꾸며 적어 놓은 글귀들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