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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귀환 - 인류 역사 최악의 연쇄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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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슬픔이 도처에 깔리고 공포가 사방에서 조여오는구나. 동생아,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 시대가 오기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한다. 세계 전체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기록을 먼 훗날에 태어날 우리 후손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 그 누가 이런 경우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겠느냐. 집이 텅 비고, 도시가 버려지고, 국가가 방치되며, 죽은 자를 묻을 곳이 없고, 공포와 고독이 지구 전체를 덮은 경우는 역사책의 그 어느 구석에도 없지 않느냐. -본문 40쪽,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가 흑사병을 목도하는 참담한 심경을 담아 몽리우의 수도원에 있는 남동생 게라르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흑사병Black Death 중세 유럽을 난타하다!

    1347년, 정체모를 역병이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온몸에 검푸른 수포가 생기자마자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환자를 간호하던 가족은 물론 환자와 가까이서 말을 섞거나 심지어 흉측한 모습을 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숨통까지 여지없이 끊어놓는다는 사실이었다. 병은 재빠르게 북진하며 단 3년 만에 유럽인의 절반을 휩쓸어버렸다. 이후 프랑스에 둥지를 튼 흑사병은 3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럽 대륙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매주 6,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던 1665년에서 1666년의 런던 대역병은 최후의 발악이었다.

    런던 대역병이 잦아든 지 300여 년, 흑사병은 전염병이란 말이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공포 이상의 야릇한 매력까지 발산하며 무수한 이야기를 양산하는 역사적 소재로 자리잡았다.



    흑사병에 관한 오해와 무지의 시작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 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얼마나 될까?

    1900년대 초, 스위스의 미생물학자 예르생이 쥐를 비롯한 설치류로부터 인간에게 감염되는 ‘예르시니아 페스티스’와 흑사병에서 임파선이 붓는 동일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연구자료를 내놓은 이후 흑사병은 쥐와 벼룩에 의해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림프절페스트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슈루즈베리 등 몇몇 학자들이 무책임한 가설을 퍼뜨리면서 이전 500년 동안 선대들이 진행해온 연구와 믿음은 한순간에 전복되어버렸다.

    그 결과 사람들은 흑사병이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쥐들이 모두 타죽은 이후 지구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제는 우리에게 전혀 두려울 것 없는 과거의 역병이라고 의심 없이 믿어왔다.



    연쇄 살인마의 새로운 몽타주가 세상에 드러나다

    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13년 간 유럽의 전염병을 연구한 결과물인 이 책 《흑사병의 귀환Return of the Black Death》은 우리가 이제껏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흑사병에 대한 정보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와 무지로 얼룩진 것이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수잔 스콧과 크리스토퍼 던컨은 흑사병이 수인성 전염병인 림프절페스트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전염되는 미지의 바이러스성 역병이었며, 그 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나긴 시간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 같은 결론은 각종 역사·의학적 자료는 물론 유럽 대륙 곳곳의 성당과 수도원 깊숙한 곳에 보관된 교구기록과 사망자 명부, 죽어가는 이들이 남긴 유언장,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앞으로 배달된 일반인들의 편지, 수백 장에 이르는 상업 교통지도, 각 지역의 토양 및 기후에 대한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남으로 이탈리아 메시나부터 북으로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현장답사와 인터뷰 과정을 통해 나온 예상외의 성과물이었다.

    나아가 이 책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쉴새없이 변종을 만들어내는 각종 박테리아와 바이스러스의 세계, 이들 변종 바이러스의 공습 앞에 인류 문명이 얼마나 취약하게 노출돼 있는지 등을 한 편의 공포영화 같은 시나리오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이즈 항체 CCR5-델타32는 흑사병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수잔 스콧과 크리스토퍼 던컨은 전작《역병의 생물학Biology of Plagues》이라는 학술서를 공동으로 출간, 흑사병에 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이 터무니없이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전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런 그들이 이 책 《흑사병의 귀환》을 집필하기로 한 것은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과 대중적 호기심에 좀더 친절하게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라 일컬어지는 흑사병이 어떠한 모습으로 유럽 대륙을 덮쳤고, 그 살인마에 대항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표정은 어떠했으며, 이 살인마의 정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할 경우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이 책을 쓰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던 두 학자는 또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을 확인했다. 유럽인에게 널리 분포하는 에이즈 항체인 CCR5-델타32 돌연변이 인자와 흑사병 항체가 동일하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전파경로와 감염 방지를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의학적으로 손쓸 도리가 없을 만큼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로부터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인들보다 낯은 감염률과 사망률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성性적으로 완고해서가 아니었다. 몇백 년에 걸쳐 흑사병과 대항하며 내성 항체를 만들어온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 때문이었다.



    지난해 이 책 《흑사병의 귀환》이 출간되자마자 전세계 역사학, 의학계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선 1984년 흑사병은 림프절페스트가 아니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했으나 철저히 무시되었던 그레이엄 트위그의 저서 《흑사병: 생물학적 재평가The Black Death : A Biological Reappraisal》라는 책이 새로 조명되었다.

    나아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간주되었던 흑사병을 우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 이 연쇄 살인마가 언제 어디서라도 인류를 다시 공습할 수도 있다는 섬뜩한 문제제기 앞에서 각계의 전문가들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한 세기 이상 무책임하게 왜곡되어온 서양 중세사의 한 면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목차

    저자의 말



    서문



    1장 연쇄 살인마의 탄생

    2장 해협을 건너다

    3장 3년의 흑사병 그후, 프렌치 커넥션

    4장 흑사병의 촉수

    5장 역병의 초상

    6장 런던 대역병

    7장 세균과 병균의 활동 원리

    8장 살인마의 몽타주

    9장 역사 해체

    10장 림프절페스트의 생물학

    11장 DNA분석, 혼란의 증폭

    12장 과거에 묻힌 마을의 진실

    13장 에이즈와 흑사병의 놀라운 연계성

    14장 퍼즐 맞추기

    15장 아프리카의 복병, 흑사병

    16장 흑사병은 왜 돌연 사라졌을까?

    17장 신종 바이러스 질환의 위험성

    18장 흑사병의 귀환에 대하여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잔과 크리스토퍼의 시작은 단순했다.

    인구학 전문 사회역사학자인 수잔 스콧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의 인구 변동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펜리스’라는 마을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북부 컴브리아 주, 이든 강 계곡에 자리한 이 작은 마을의 인구 변동 상황을 조사하던 수잔은 17세기 중반 이곳에 끔찍한 역병이 돌았으며 그로 인해 일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마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음으로 내몰렸다는 기록을 접했다. 확인한 결과 펜리스와 인접한 켄들, 리치먼드, 칼라일에서도 같은 시기 치명적인 역병이 지나가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음이 밝혀졌다.

    대체 어떤 전염병이 이곳을 덮쳤던 것일까? 자신이 학교에서 배워온 대로 이곳에 돈 병이 흑사병이었다면, 수인성 전염병인 그 질병으로 인해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몇천 명이 죽어나간다는 게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수잔은 저명한 동물학자인 크리스토퍼 던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크리스토퍼가 그보다 먼저 발생한 유럽의 각종 전염병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이곳을 덮친 살인마가 흑사병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됐다. 호기심이 발동한 두 학자는 이 무시무시한 역병이 남긴 흔적을 모조리 찾아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최초의 흑사병 발생지로 추측되는 14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기록부터 시작되는, 방대하고 복잡한 탐구의 시작이었지만 그 지난한 여정에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믿음을 뒤흔들고 전염병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써야할 중대한 결과에 다다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연쇄 살인마의 탄생

    남자나 여자 가릴 것 없이 사타구니나 겨드랑이 여기저기에서 작은 사과나 달걀만한 종기가 생겨났습니다. (…) 하루 이틀의 차이는 있었지만 환자 대부분은 종기가 나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열이 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부차적인 증상이 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이번 역병은 전염성이 대단해 몸이 약하든 강하든 간에 모두 감염되었기 때문에 병자는 매일 늘어만 갔습니다. 병자와 말을 하거나 가까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벗어놓은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렸습니다. -본문 32쪽,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조반니 보카치오의 글 중에서



    1347년 10월,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역병은 단 두 달 만에 이탈리아 전역으로 번지며 인구의 절반 이상을 날려버렸다. 경험해보지 못한 질병 앞에서 방어할 태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은 유일한 사실 하나는 병이 자신을 덮치면 곧바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참담함이었다.



    공동묘지로는 부족했다. 시신을 묻을 구덩이를 이곳저곳에 파야 했다. 일가족이 한 구덩이에 묻히는 일이 빈번했다. 유언을 남기겠다고 감염된 지역에서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을 찾아온 오베르토 데 사소라는 사람이 공증인과 증인을 비롯해 유서 작성을 도울 사람 몇몇을 불렀다. 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예순 명도 연이어 쓰러졌다. -본문 37쪽, 피아첸차에 살던 공증인 가르리엘레 데 무시의 기록 중에서



    이탈리아 전역으로 번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역병은 프랑스로 침투했다. 두 달 사이 마르세유 인근에서만 5만 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기후도 이 요상한 병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듯했다. 날이 덮든 춥든 간에 역병의 기세는 여전했다. 기온이 높고 화창한 환경도 차갑고 축축한 환경만큼이나 병마의 온상이 되었다. 매서운 겨울에도 역병은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빨리 퍼져나갔다. -본문 41쪽, 파리 출신의 의사 시몽 드 코비노의 기록 중에서



    흑사병은 마치 거대한 파도를 그리기라도 하듯이 유럽의 북쪽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스페인이 무너졌고 독일과 유럽 북부인 북해연안 저지대(지금의 베네룩스 3국)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해협을 건넌 흑사병은 영국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역병의 홍수로 인해 인구의 50% 이상이 사라졌다. 이윽고 역병이 북구의 노르웨이에 유입된 것은 1349년이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아 결국 사라져버리는 마을이 속출했다.



    300년 간 이어진 흑사병의 촉수

    이로써 흑사병이 유럽 대륙 전체를 휩쓰는 데 걸린 기간은 채 3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에 둥지를 튼 살인마는 앞으로도 300년에 걸쳐 수시로 출몰하며 유럽의 중세를 끝장내버릴 예정이었다.

    눈과 빙하의 섬 아이슬란드에도 흑사병은 도착했다. 두 차례의 역병은 가뜩이나 척박한 땅 아이슬란드에 실로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평균 기온 영하 3도, 쥐와 벼룩은커녕 사람이 먹을 식량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이곳의 흑사병 피해 상황은 고문헌인 《신연대기New Annal》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1629년의 이탈리아는 먼 길을 온 단 몇 명의 이방인에게서 시작된 역병으로 인해 28만 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고 1506년 스페인의 세비야에 유입된 역병은 10만 명의 희생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람들도 서서히 흑사병의 촉수에 단련되기 시작했다. 맨 처음 게릴라처럼 다가온 역병에 무방비로 당하기만 했던 그들은 몇 차례 이어진 흑사병의 연쇄 공격에 대항하면서 이 역병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직접 감염된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했다. 온몸에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병균은 사람 몸속에 자리를 잡은 다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져나간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이어지는 같은 증상을 목도하며 깨닫게 됐다.

    병의 전염성에 대한 파악이 끝나자 예방조치와 방역대책이 각국에서 마련됐다. 감염자나 의심자에 대한 ‘40일 간의 격리조치’가 시행되었고 격리병동 마련과 구호품 지급정책도 시행되었다.



    최후의 광란, 런던 대역병

    1665년 6월, 런던에서 역병 사망자 43명이 발생했다. 당국의 첫 방역 방침은 6월 14일에 개최될 예정이던 ‘반웰 박람회’를 취소하라는 명령이었다. 시는 가구의 식솔 중 누구라도 몸에 검붉은 부종이 생기거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자가 있을 경우 두 시간 이내에 보건 감독관에게 통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무서운 기세로 번져가는 그 여름의 역병은 끔찍했다. 새뮤얼 페피스의 일기에 묘사된 사람들의 모습은 지나온 시대의 역병에 걸린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런던을 떠났고 도시에 남아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 대부분은 템스 강 어귀의 인구 밀집 지역에 살던 빈곤한 계층과 하인들이었다. 이 계급을 중심으로 그해 여름 사망자는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다음은 대니얼 디포의 기록이다.



    역병은 주로 하인들을 통해 가정으로 침투되었는데, 그들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도시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인들에게 ‘죽음의 숨결을 불어넣었고’ 하인들은 자신이 속한 가정에 병을 들였다. -본문 146쪽.



    그 이듬해까지 이어진 역병으로 런던에서 6만 9,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흑사병이 과시한 마지막 위용이었다. 역병은 처음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살인마의 새로운 몽타주

    자, 여기에서 의문이 시작된다. 20세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흑사병은 림프절페스트의 변이 형태로서 페렴형 페스트가 원인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첫째, 림프절형 페스트가 없다면 폐렴형 페스트가 생겨날 수 없으며, 폐페스트는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림프절페스트의 발생 가능 여부가 부정적이라면 폐페스트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 균이 허파에 전이되고 변이되어 허파 감염이 이루어진다 해도 전염은 한 가구 내에서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나 병문안을 한 사람 등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밖의 사람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둘째, 폐페스트의 진행 속도는 매우 빨라 감염 시점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지 대략 5일밖에 걸리지 않으며 , 따라서 환자의 전염 가능 기간은 그보다 짧다. 따라서 폐페스트가 돈다고 하더라도 유행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장기간 유지되는 흑사병의 종형곡선과는 사뭇 다르다.

    셋째, 폐페스트에서는 림프종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유럽의 흑사병은 폐페스트일 수 없다.



    이 같은 병리학적 소견이 아니더라도 당시 유럽에는 내성 설치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물학적 근거, 림프절페스트가 전파될 수 없는 북구와 아이슬란드에까지 흑사병이 돌았다는 사실, 에이엄 마을의 영웅적 희생 사례처럼 인구 이동을 억제하는 방역선 설치만으로 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 림프절페스트와 흑사병의 전파 속도가 확연히 달랐다는 분석 결과만 보더라도 흑사병이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는 결론은 자명해진다.



    흑사병의 기원

    그렇다면 이 병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수잔과 크리스토퍼는 흑사병의 진원지로 인류 진화의 요람이었던 에티오피아를 지나 흑해에까지 이르는 동아프리카지구대가 가장 유력하다고 가정한다. 기원전 5세기에 적힌 기록의 상당수가 악성 전염병의 근원지로 이곳을 지목했다. 1997년 《역병과 사람들Plagues and People》을 쓴 맥닐도 이곳에 인간 병원균이 많이 떠다닌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진화한 그곳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오랜 기간 살아온 고향이며 인간을 숙주로 하는 병원균의 저장고로써 안성맞춤이라는 주장이다.

    유사 이래 발생한 각종 전염병을 조사한 결과, 흑사병과 유사한 역병은 이미 여러 차례 발생한 적이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역시 기원전 5세기에 발생한 아테네 역병에 걸렸다가 기사회생한 인물이었다. 그는 병을 직접 경험하며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기침, 재채기, 피부 반점과 같은 환자의 증세는 물론 사망 시기까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병의 증상은 흑사병 목격자의 진술과 놀라우리만큼 유사하다. 또 서기 6세기에 황역병이라는 돌림병이 유럽을 강타한 적이 있으며 이 병은 7세기에 잉글랜드로 퍼져나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7세기, 시리아와 이라크, 이집트에까지 역병이 번져 2만 5,000명의 무슬림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이 병은 8세기 중엽까지 대략 10년을 주기로 중동지역을 괴롭혔다. 이 모든 역병이 흑사병과 같은 바이러스로 촉발된 전염병은 아니었을까?



    흑사병의 귀환에 대하여

    흑사병이 자취를 감출 무렵이던 17세기 중엽, 유럽은 바이러스의 활동이 위축될 만큼 추운 소빙기에 들어갔다. 공중보건 정책이 자리잡았고, 특히 흑사병의 세력기반이던 프랑스는 몇 년에 걸친 풍작으로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놀랄 만큼 좋아졌다.

    거기에 흑사병의 확산을 막을 결정적 요소가 있었으니 여러 차례의 역병을 경험하면서 병의 항체인 CCR5-델타 32 돌연변이 인자를 물려받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내성이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면 병원체는 숙주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흑사병의 확산을 차단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한결 나아진 위생환경과 획기적인 의료기술 탓에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각종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역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첨단 문명 속에 갇힌 현대인들이 끝없이 강화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얼마나 한심하게 노출돼 있는지,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공황에 빠질 수 있는지는 지난 2002년 말 중국 광둥성에서 발생한 SARS를 통해 여실히 확인되었다.

    병이 유행하는 넉 달 사이 흑사병과 비교해 너무도 경미한 고작 87명의 사망자를 내는 데 불과했던 이 질병으로 인해 세계 주식시장이 출렁였고, 제약회사의 주가가 껑충 뛰었으며 항공사는 파산 직적에 이르렀다. 병균을 죽이겠다며 식초를 끓이다가 네 명이 사망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중국과 홍콩의 슈퍼마켓은 식료품을 강탈해가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조류독감 파동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최근의 현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지구 전체의 인구밀도는 14세기의 유럽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다. 특히 수십억의 인구가 몰려 사는 아시아는 바이러스의 이상향이 될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사람들이 모일 일도 많아졌다 슈퍼마켓, 영화관, 축구장, 대중교통 수단 등에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병이 가만히 있겠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밀고 다닐 상황이다.

    또한 기술혁명은 선진국가의 사람들을 자연에서 이탈시켰다. 우리는 선조들만큼 강하지도 질기지도 않다. 어디에 내놓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기본 지식이 없다. (…) 흑사병으로 많은 수가 죽어 다른 세력이 침략할 틈이 생긴다면, 아무리 조직적으로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던 우리의 기술사회라도 언제든 전복될 수 있다. 그럴 경우, 과연 생존자들이 삶을 재건할 수 있을까? 성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스와 전기 없이는 불도 못 켜는 사람들이 태반일 텐데 말이다. -본문 312~313쪽.

    저자소개

    수잔스콧(SusanScott)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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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리버풀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구학 전문 사회역사학자로 중세 유럽을 황폐화시킨 흑사병 연구에 십수 년을 바쳤다.
    저서로 크리스토퍼 던컨과 손잡고 낸 책《Biology of Plagues》외에 《Pests of Paradise》 《Human Demography and Disease》 등이 있다.

    크리스토퍼던컨(ChristopherDuncan)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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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풀대학교 동물학과 명예교수.
    영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동물학자로서 7권의 전문서적과 2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1990년 수잔 스콧과 손잡고 유럽의 전염병 연구에 매진한 이래 흑사병Black Death이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림프절페스트가 아니라 미지의 바이러스성 질환이라는 사실, 유럽인에게 널리 분포하는 항에이즈 항체 CCR5-델타32 돌연변이 인자와 흑사병 항체가 동일하다하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으면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관련 저서로 공저인 《Biology of Plagues》외에 《Demography and Nutritio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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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이태리어를 전공했다. 글로벌어학원 영어회화강사, 파키스탄 대사관 영사 보좌관 등으로 일했으며, 현재 전문 통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붉은 중국의 공포 파룬궁>, <우리에게 필요한 12시간>, <아이아코카>, <돌하우스 머더스>, <흑사병의 귀환>, <달라이라마>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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