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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그 허망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죽음은 따뜻한 상처이고 후끈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신혜지 시의 정점이다. 따라서 빛바래고 사위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향한 정념이 그의 시의 거멀못이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들을 향해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을 시로 옮겨 적었는데, 결코 어둡지않아 명랑한 희망의 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호쾌한 멋으로 그득하다는 점이 빼어나다. 희망은 신혜지 시의 사상이며 삶의 원천이다.
- 이성모 (문학평론가, 창원시김달진문학관장)

시 쓰는 일이
호화롭게 사치스럽다고
여길 때마다
시를 버렸다

나를 버렸다
버리고 버려, 더는 놓아줄 그림자조차 없을 때
비로소 소소하게 사는 사람이 보였고
대수롭지 않은 작은 사람과 나를 끌어안았다

맑고 환하다

2023년 1월
신혜지

제1부│물에 베이다
10 유가사 은행나무
12 유가사
13 눈 바라기
15 덕구리난
16 내 남자의 집
17 남편 그늘
18 무화과
19 붉다
20 들장미
21 물에 베이다
22 물억새
23 생아귀찜
25 고봉밥
26 육신사 돌거북
27 몸꽃

제2부│이름을 샀다
30 유아방
32 치매
34 둥근 구속
36 묵묵무언
37 빈 집
39 노후 대책
41 늙은 총각의 말
42 명랑 오토바이
44 이름을 샀다
46 고양이와 멸치
48 아버지
50 양파와 보리
52 보리
54 모도리꽃
56 범순이

제3부│독과 약의 수다
60 장미
61 줌마렐라
62 화류동풍
64 수상한 남편
66 참꽃 다방
65 서리 맞은 고추
67 배배 꼬아서
69 서리 맞은 고추
69 독과 약의 수다
70 거미 가족
71 독과 약의 수다
72 가을, 벚나무
74 너울가지
76 쓸어 담다
78 입으로 올리는 백팔 배
79 봉황의 알
81 갈대

제4부│비슬산 흰 진달래
84 비슬산 흰 진달래 1
85 비슬산 흰 진달래 2
86 비슬산 흰 진달래 3
87 비슬산 흰 진달래 4
88 비슬산 흰 진달래 5
89 진달래꽃
90 벚꽃 1
91 벚꽃 2
92 달창지 벚꽃길 1
93 달창지 벚꽃길 2
95 달창지 벚꽃길 3
96 참꽃
97 나팔꽃
98 비슬산 천왕봉
100 현풍 백년 도깨비시장

해설
102 따뜻한 상처, 후끈거리는 사람, 사랑의 시│이성모

유가사 은행나무


먼동 트려 목탁 울어
하늘이 또 날솟는다

챙글챙글 염불송경念佛誦經
세상 소음 상앗대로 눌러 놓고
바람 비질하는 대웅전 마당에 길게 누웠다

긴 세월 빼 올린 은행나무
대웅전 섶귀에 새색시 매무새로 앉아
날마다 청청한 푸른 시절이고 싶었다

수행 백 년을 해도 부재중인 해탈
유가사 문고리 무거운데
염화실 댓돌 신발 한 켤레

힘주어 가야 할 길목에서
노곤히 쉬고 있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이파리 같다

팔만사천 경 읽는 방석이나 될까
애벌레 침묵으로 참선이다




묵묵무언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며 누워있다

줄 서서 가는 저승
예를 갖춘 검은 도시락은 일찌감치 와 기다리고

식당 모니터 화면은 수시로 바뀌다가
낯익은 이름 곁에 ‘화장 중’ 한 줄 올라탄다

먹고 사는 일 가장 중요하니
제 몸 사르며 배려하는 유훈

고개 숙여 밀어 넣는 한입 밥알
냉정하리만치 세련된 고별실 식당

상주 혼자 걷지도 못하는데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며 삶의 잔반을 버리고 있다




벚꽃·2


쑥 캐는 누부야 바구니 들고
가난한 가슴 벚꽃처럼 벙글었지

자다 놀라 소리쳐 어둠 속 뛰어들던 꿈이
어머니 기도 속에 묻히고

하늘 버리고 땅 버리고
천당 거기 있다고 생각했을까

누부야 꽃구경 가자
품바 장단에 하얗게 웃던

이제야 돌아보는 누부야 가슴에
꽃잎으로 좌정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