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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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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박종호
  • 출판사 : 풍월당
  • 발행 : 2022년 12월 24일
  • 쪽수 : 384
  • ISBN : 979118934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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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떻게 홀로 인간답게
만남의 끈을 이어 갈 것인가
아무도 편지를 쓰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진행해 왔던 대면 강의를
영상강의로 전환하면서 매주 편지를 함께 보냈다.
편지의 수신인은 수년간 그의 강의를 들어왔으니 오랜 제자라 할 수도 있고,
때마다 한결같이 풍월당을 격려하고 키워 주었으니 스승이라 해도 좋았다.
이 ‘제자 선생님들께’ 2년 반 5학기 동안 80여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이 책에는 그 절반쯤을 추려 실었지만, 한 통 한 통의 편지에는
받는 이와 나누고 싶은 글쓴이의 이야기가 굽이치며 흐른다.
잔잔한 웃음과 세심한 배려가 행간마다 넉넉하다.

코로나 3년의 기록,
풍월당이 전하는 위로와 감사의 편지

“그러면서 저는 여러분과 가장 많은 소통을 하고 있는 셈이며, 늘 여러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씁니다. 물론 홀로 고독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실은 가장 고독하지 않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옆에는 제가 좋아하는 한 잔의 커피와 한 조각의 과자가 있고, 이탈리아노 현악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40년이 넘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네 개의 현악 사중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귀족이나 누렸던 호사를 제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고독 속에서도 행복합니다.” _「고독으로만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것들」 중에서

이 책은 서울의 한 클래식 음반 가게 풍월당이 코로나 시기를 지내며 써내려간 3년의 기록이다. 풍월당은 음반 가게이지만 클래식 감상자를 위한 예술 아카데미이기도 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이 멈추자 아카데미에서 하는 음악 강의도 모두 중단되었다. 대면 강의는 영상 강의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매주 강의실에 모여 함께 나누던 만남의 온기까지 대신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에 풍월당을 창립하고 10년 이상 아카데미에서 음악 강의를 해온 박종호 대표는 그가 ‘제자 선생님’이라 부르는 수강생들에게 매주 강의 영상과 함께 손수 쓴 ‘편지’를 띄워 보냈다.

난생처음 겪는 거리두기와 일상의 단절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서 편지도 차곡차곡 쌓여갔고, 2년 반 동안 그렇게 80여 통의 편지가 모였다. 이 책은 그중 40여 편 정도를 추려, 이 편지의 본디 수신자인 제자 선생님들뿐 아니라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모든 이에게 띄우는 편지로 새롭게 엮었다.

편지에는 코로나로 외출이 제한되는 기간 동안, 받는 이들이 ‘홀로 있어도 풍성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예술 이야기와 삶에서 건져 올린 진솔한 단상들을 담았다. 저자가 직접 읽고 본 좋은 책과 영화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어린 시절로,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본 추억담, 거리를 걸으며 만나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연민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가슴 시리게 우리를 위로한다.

읽으며, 추억하며, 걸으며 되새기는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

“이 편지들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어머니, 추억, 우리가 잃어버린 미덕, 이웃에 대한 적선 등이 그러하다. 이 주제들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후렴구처럼 우리 마음을 울린다. 가끔은 시가, 추억이, 내면의 목소리가 읽는 이를 정적의 쉼표로 안내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일상의 음악 아닐까.” _「들어가는 글」 중에서

학교가 문을 닫고, 가족을 만날 수 없는 명절이 이어졌다. 마스크는 우리를 감염병으로부터 지켜주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사람들 사이에 불편과 단절감을 초래했다. ‘언택트’라는 이름으로 실물과 접촉하지 않고도 서로를 연결하는 디지털 세상은 이 위기를 발판 삼아 더 정교하고 더 거대해졌다. 이렇게 ‘홀로 있음’을 강제당한 코로나 기간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채우고 자기만의 생존법을 터득해나갔다.

저자는 이 시간 동안 어떻게 ‘홀로’ 있으면서도 ‘만남의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산물인 이 편지들에는 문학과 현실을 오가며 끊임없이 ‘나’를 사색하고, 시종일관 ‘너’를 그리워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자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어머니, 우리나라 영화계 발전에 이바지한 유년시절의 영화 친구, 군 시절 인연을 맺었던 시인, 진정한 예술가의 품위를 보여주는 성악가,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출판사 등을 통해 그는 이 시대에 우리가 좀 더 세심하게 가꾸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아가 여기서 소개하는 시, 소설, 희곡 등의 문학작품과 영화들도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일상의 소중함과 공동체적 연대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저자는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 동안 사색과 독서로 자신을 채웠으나, 자족하는 데 머물지 않고 편지를 쓰는 내내 ‘산책자’의 삶을 살았다. 어깨에는 배낭을, 주머니에는 현금을 넣고 거리로 지하철로 나가 하루에 몇 시간씩을 걸으며, 만날 수 없는 시대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그의 시선은 몇 푼이라도 벌려 노점에 나온 할머니들, 세상에서 밀려나 이제는 불러주는 이 없는 노인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로 가닿는다.

코로나 시대 이후,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지금은 힘든 시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_「지금도 어디선가 고통 받는 사람들」 중에서

잦아들 만하면 다시 고개를 쳐들기를 반복하는 코로나를 두고 우리는 어느덧 ‘위드코로나’를 이야기했고, 일각에서는 한발 앞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코로나 이전의 삶을 온전히 되찾을 수는 없을 거라는 암울한 진단도 있었지만, 유발 하라리를 위시한 국내외 다수의 학자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해법으로 ‘공존’과 ‘연대’를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했다.

공존과 연대가 전 지구적, 거시적 차원의 해법이라는 느낌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적선(積善)’이란 소박한 개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더 힘 있게 다가온다. ‘적선’이란 보통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행위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말 그대로 풀이하면 ‘선을 쌓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가끔 높은 차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으며 소외받는 이웃을 돌아보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점의 물건도 사주고 구세군 냄비에 돈도 넣자고 말한다. 많은 돈을 적선할 수는 없어도, 그 돈이 그들을 힘겨운 삶에서 구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행동은 그들이 살려고 애쓰는 노력에 보이는 관심이자 응원이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도 모르게 행한 잘못을 되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끈질긴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앗아가고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지만, 그동안 우리가 감추고 잊으려 했던 많은 진실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밖에 없는 더 긴밀해진 공동체를 살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내가 사는 법은, 저자가 글과 몸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소외되고 뒤처진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목차

들어가는 글_홀로 있어도 풍성하게, 풍월당이 보내는 편지

1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여러분에게
나는 세상에서 잊히고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을
그리운 선생님
아버지의 수첩
세상의 모두가 우리 아버지들
어린 시절의 영화 구경
잊을 수 없는 영화 친구
작약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우리 안에 있는 우리가 만든 사슬을
나 하나만이라도
30년을 넘어 날아든 시집 한 권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해방된 남자
우리가 먹을 것을 집까지 가져다주는 분들

2부
마지막 사랑을 향해서
우유를 데우면서
평전을 읽는 즐거움
고독으로만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것들
그날에 내가 품위를 지킬 수 있기를
책을 통해서 꿈꾸는 상상의 세계
힘든 시기에 더욱 뚜렷해지는 사랑의 의미
가을이 오면 그리운 도시
청라언덕이 생각나는 저녁에
산자락에서 매일 음악과 함께했던 시간
평생을 헌신한 가장들이 마지막에 모이는 곳
우리는 육체라는 그릇에 담긴 존재
이토록 예술가적인 예술가
우리에게 주시는 한 해의 마지막 기회

3부
공부하는 노년
책 읽는 여행
삼촌,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들판의 출판사, 밭두렁의 서점
길 위에서 만나는 천사들
홑청의 추억
지금도 어디선가 고통 받는 사람들
지하철 학교
소유적인 삶과 존재적인 삶
구세군 냄비와 할머니
택시운전사
빅토르 위고를 생각하며
반중 조홍감
서로의 삶을 맞바꾼 일생

마지막 편지_우리에겐 음악과 예술이 있어

본문중에서

_12~13쪽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 처했을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좋을 때에는 누구나 멋지고 관대할 수 있습니다. 대신 시련이 닥쳤을 때 얼마나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그의 품격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염병이 빠르게 퍼진다는 것은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불안이 확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편견과 편협함도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위생에도 유의하고 건강도 챙겨야 하겠지만, 하루 종일 걱정만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뉴스나 유튜브에만 빠져 있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다고 사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죠. 더 큰 적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_41쪽
걸레질이야말로 모든 운동의 기본 같습니다. 자기 걸레질은 남에게 맡긴 채로, 자신은 좋은 차타고 체육관에 가서 비싼 돈 내고 딱 붙는 옷 입고 그러고는 매트 위에 엎드려서 또다시 걸레질 자세를 취합니다. 집에서 걸레질은 도우미 아줌마에게 시키고, 그 시간에 자신은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산꼭대기까지 차로 올라가서, 절에서 걸레질 자세로 절을 합니다. 절에서 절하는 사람보다도 집에서 걸레질하는 사람이 더 부처님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체육관의 걸레질 자세에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걸레질은 삶의 수고와 겸허한 자세를 가르칩니다. 세상의 무엇 하나 몸을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의 글처럼 걸레질에는 침묵, 겸허, 청빈, 실천이 있습니다. 어떤 수도사의 행위보다도 진실된 자세입니다.

_63~64쪽
그렇게 미성극장에서 한참 영화에 빠져 있을 때에, 갑자기 극장 뒤편의 문이 열리고는 “종호야!”라고 저를 찾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놀라서 어둠 속으로 숨지요. 그러면 좌우측의 출입문에서도 누군가가 들어와서 또 “종호야!” 합니다. 심지어 “종호야!”는 “종호야, 밥 먹어라!”로 발전합니다. 극장까지 와서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보이지 않으니까, 어머니의 명령으로 집에서 일하는 누나들(어머니의 양재일을 돕는 누나들, 소위 ‘시다’ 누나들이 저희 집에는 항상 많았지요)이 극장까지 와서 저를 찾는 것입니다. 제가 또 영화 보러 간 줄을 어머니가 아시면 분명 어머니에게 맞을 테니(어머니는 원단을 재는 길이 한 마[91센티미터]짜리 ‘마자’로 걸핏하면 저의 등이나 어깨를 내려치며 저를 키웠답니다) 저는 다른 문으로 달아나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_75쪽
그때부터 저는 매주 제 글을 오리고 뒤집어서 J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에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행간에 장난 가득한 그의 눈이 선하게 보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보지 않았지만, 매주 그렇게 지면에서 만났습니다.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 등을 맞대고 말이죠. 전화번호야 신문사를 통하면 알 수 있었겠지만, 일부러 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J도 저를 기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미술실에서 함께 영화와 오페라 얘기를 하던 두 소년이 30여 년이 지나서 매주 등을 맞댄 채로 옛 친구의 따뜻한 등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칼럼은 서로에게 다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았습니다.

_86쪽
유명상표 핸드백을 사지 못하는 상태가 구속이 아니라, 그 핸드백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바로 구속입니다. 그것이 쇠사슬입니다. 그런 사람은 원하던 옷 하나를 사면 당장은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그것은 며칠 정도입니다. 어쩌면 하루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이번에는 또 다른 핸드백이 보이고, 또또 다른 모델이 보입니다. 그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가 생길 겁니다. 결국 끊임없이 사야하고 끊임없이 나가야 하는 길고 긴 사슬로 본인의 몸을 칭칭 동여매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만 그 사슬을 끊으면, 그때부터는 세상이 달라 보이고, 영혼에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_111쪽
그리고 제 앞에서, 저 한 명만 앞에 놓고, 저를 위해서, 혼자서 콘서트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가 불러 준 노래들로 우리의 30년이 바로 녹아내렸습니다. 30년 전 정신병동에서 환자들을 모아 놓고 앉아서 소총 대신에 기타를 들고 천진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자신이 쓴 시에 자신이 곡을 붙인 것입니다. 직접 쓰고 짓고 기타치고 노래 부릅니다. 정말 잘 부르고 또한 감동적입니다.

_130~131쪽
편지를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도 편지를 쓰시나요? 한번 써 보세요. 이런 기회에 컴퓨터나 전화기 말고 종이에 손으로 편지를 써서 한번 보내 본다면, 여러분이 편지를 보내는 것 이상으로 받는 분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 보낼까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굳이 가깝지 않아도 됩니다. 단골 생선가게 할아버지나 채소가게 아주머니도 좋지요. 단골 병원의 까칠한 간호사도 좋고요. 우리 아파트 경비원 할아버지는 어때요? 긴 편지가 아니라도 엽서나 카드도 좋지요. 별 내용이 없어도 됩니다. 이건 어때요? “덕분에 잘 먹고 잘 삽니다…….” 정말 고마워하실 겁니다. 안에 작은 책이나 음반이나 손수건이나 양말이나 과자라도 넣으면 더 좋아할 것입니다…….

_140~141쪽
시인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사랑은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랑했던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연애가 그리운 것이 아닐까요? 시인은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사랑했던 기억만 남는 것일 겁니다. 늙어 가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그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_145쪽
아, 그런데……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광경입니다. 어머니는 밤에 일어나시면 이렇게 우유를 데워 드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한 번도 우유 데우는 것을 도와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때는 왜 저러시는 건지?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왜 우유를 마시는 건지? 왜 데워서 먹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이면 어머니는 일어나서 속이 쓰리다면서 배를 만지시고, 우유를 드시고, 약을 드시고, 또 쓰리다면서 파란 병의 하얀 위장약 암포젤 엠을 찾으셨습니다.
데운 우유 잔을 양손에 조심스레 잡고서, 발목까지 닿는 긴 잠옷을 입으시고, 발이 시리다면서 양말까지 신고, 화장실을 갔다가 방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니의 조용한 발걸음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제야 그때 어머니의 공복감을, 속쓰림을, 외로움을, 불면의 시간을, 자주 가야 하는 화장실을, 빈뇨의 고통을, 쓸쓸한 가을밤을, 긴긴 밤을, 허망해진 일생을 알 것만 같습니다.

_168~169쪽
즉각적인 자극은 인간이 심오하고 진중하고 진실 된 행복을 음미하려는 행위를 방해합니다. 몇 초 이상 앉아서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책은커녕 신문 기사 하나도 다 읽지 못합니다. 오직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읽지 않아도 되고 자극으로 가득 찬 인스타그램입니다. 대화를 할 때에 SNS에서 얻은 것이 아닌 책에서 얻은 지식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설탕에 찌들고 조미료에 길들여진 사람이 깊이 있는 음식의 맛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대를 물리는 좋은 음식들이 사라집니다. 음악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풍월당은 안간힘을 다하여 그런 거대 산업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질 것입니다. 저는 풍월당의 미래를 압니다. 우리는 언젠가 장렬하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전사할 것입니다. 다만 그날까지 그래도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심정입니다. 바보처럼, 마치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 남자가 우리가 원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요…….

_174~175쪽
그렇게 남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음의 보험을 미리 드는 것이 오페라가 주는 가장 큰 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페라가 하룻저녁의 한낱 오락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로 대우받고 여러 예술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장르로 살아남은 중요한 요인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러 극장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아리아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오페라가수를 보러 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TV쇼에 나오는 대중가요 가수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오페라는 비극을 보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정신성이 발전했던 그리스 시대가 낳은 비극의 정신과 교훈을 만나는 것입니다.

_198~199쪽
피천득 선생이 썼던 수필의 배경이라며 춘천 사람들이 자랑하던 길을 걸어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높은 플라타너스가 양편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코트 깃을 세우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는 것은 필수지요. 그런데 제 마음이 급했던지, 9월에는 아직 낙엽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언제 다시 밖에 나올 수 있을지 몰라서 도보 위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찾아서 징검다리 건너듯이, 거의 폴짝폴짝 뛰듯이, 아니 이건 너무 촐랑대 보이니까 성큼성큼, 낙엽을 찾아 다리를 벌려 가면서 일부러 그 위를 신발로 밟으며 걸었습니다. 아무튼 가을의 낙엽은 밟은 것입니다…….

_225쪽
비뇨기과 병동의 일반적인 호칭은 모두 ‘아버님’입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젊은 간호사와 보조원들과 간병인들과 직원들은 모두가 젊습니다. 게다가 제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지만, 의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여성들입니다. 그들은 환자들을 무심히, 당연히, 해 오던 대로, 관례대로 ‘아버님’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아버님’이라는 숭고한 단어가 가진, 유교적이거나 가부장적 의미도, 부모에 대한 어떤 효심도,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도, 가족의 장로에 대한 경외심도, 사회적으로 헌신한 노장에 대한 공경심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며느리가 되려는 생각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이라니, 어색하고 난감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환자들을 불친절하게 대한다거나 잘못 치료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은 최고의 의료 지식과 기술에다 나무랄 데가 없는 친절함과 배려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부르는 말이, 똑같이 집안에서 그렇게 부르던 말의 감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호칭’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_276쪽
그런 삼촌들이 사라진 지가 오랩니다. 저는 지금 아이들이 항상 엄마나 아빠하고만 지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것이 아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좁게 할 수도 있고, 부모를 통해서 단순한 사고만을 주입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부모의 품에 있으니, 아이는 자기 위주가 되고, 그의 가치관도 소가족 위주가 되며, 결국 잘되어도 시야가 좁은 소시민으로 머물게 됩니다. 삼촌의 존재는 아이에게 객관성을 가르쳐 주고, 자신만을 중심에 두는 세상이 아닌 넓은 세상을 알려 줍니다. 부모는 늘 최상을 가르치고 최고만을 주지만, 삼촌은 이류도 주고 B급도 주고 때로는 세상에 C급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아이는 많은 대체물을 알고, 세상을 헤쳐 갈 여러 방법도 알게 됩니다. 세상에는 부모가 알려 주는 반듯하고 모범적인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삼촌이 필요합니다.

_283쪽
손님을 대접할 방도, 앉을 의자도, 내놓을 차 한 잔도, 과자 한 조각도 없었습니다. 검은 흙이 묻은 손을 비비고 다들 들판에 앉았습니다. 꽃이 진 꽃밭 너머 서쪽으로 사라지는 석양을 향해서 한 방향으로 나란히 앉아 다 함께 서쪽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말이 없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말이 많았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모두가 말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할 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석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만큼 제 마음이 가난하고 텅 비고 깨끗해진 적이 없었을 겁니다.

_297쪽
높은 곳에 앉아서는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항상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차로 백화점이나 고급 슈퍼마켓에서만 쇼핑을 하고, 으리으리한 호텔의 식당만 다니면,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저 구름 위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알려면 세상에 어떤 분들이 사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보입니다.
제가 걸어 보니, 서울은 하나의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보는 서울이 있고, 택시에서 보는 서울이 있으며, 걸으면서 보는 서울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보이는 서울은 또 다른 서울입니다.
내려와야 많이 보입니다. 자가용에 앉아서는 그런 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보는 사람과 보도에서 보는 사람과 지하철에서 보는 사람조차 다 다르더군요. 그런 곳에서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있습니다.

_299쪽
걷기 좋은 가을입니다. 걸어 보세요. 시골길이나 산길이나 공원이 좋은데, 제가 왜 굳이 도심을 걷는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자연보다도 사람이 좋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특히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걸으면서 배웁니다. 길은 저의 학교입니다. 저는 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길에서 확인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제 방이 저의 도서관이라면, 길은 저의 실습실입니다.

_374쪽
시인의 시를 읽으니 어머니의 일생이란 생애 전체가 저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저처럼 못난 사람은 훌륭한 예술을 통해서야 깨닫나 봅니다. 항상 부모를 기다리고 부모에게 달려오던 아이는 어느 때가 되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때”가 되면, 그때에 부모와 아이는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봅니다. 그 아이의 성장에는 평생을 뒤에서 “기다려 준” 부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모르고, 그는 이제 오직 자기 아이만을 기다립니다. 그것도 좋고 당연한 것이지만, 그 뒤에는 어버이날에도 지하철역에 앉아 있어야 하는 늙은 부모가 계시지요.

_382쪽
제가 이 글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여러분을 향한 저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록 한 분 한 분 일일이 전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3년을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도 풍월당을 향한 끈을 놓지 않고 여전히 손을 잡아 주고 계신 분들은 이제 모두 저희의 동지요, 풍월당의 식구이며, 나중에는 다 저와 함께 추억을 나눌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를 쓰던 릴케의 심정이나, 그 시를 제게 써 준 친구의 심정이나, 그것을 다시 여러분께 드리기 위해 자판으로 두들기고 있는 저의 심정이나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음악이라는, 예술이라는 공통의 실로 한 몸으로 묶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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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박종호 [저] 신작알림 SMS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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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대표, 오페라 평론가, 문화 예술 칼럼니스트, 정신과 전문의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은 품격 있는 교양인, 균형 잡힌 경계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오늘도 공부하고 있다.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고 관찰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정작 필요한 사람은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가진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그는,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도전도 거부하지 않는다. 1993년 첫 유럽 여행 이후, 지금까지 수백 차례 유럽을 다녀왔지만, 그는 매번 새로운 주제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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