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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 [초판]

원제 : Conserv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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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수주의의 역사

《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는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사상가인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이 2017년 출판사 Profile Books Ltd.를 통해 출간한 《Conservatism; An Invitation to the Great Tradition》의 번역판이다. 영국의 가장 저명한 보수주의 철학자가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편찬한 책으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역사를 가장 알기 쉽고 간략하게 정리해주었다.

출판사 서평

저자 스크러턴은 비교적 짧은 200쪽짜리 이 책을 통해 보수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부상했으며 지금껏 어떤 도전들을 직면해 어떻게 극복해왔고, 현재는 어떤 도전에 또다시 직면했는지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보수주의의 어제와 오늘, 혹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이래 서구 세계가 어떤 정치적 문제들과 씨름을 벌여왔는지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나?

한국의 이념 지형은 기울어져 있다. 기득권 세력이라 치부된 보수 우파 집단은 대중을 이념적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했다. 동족상잔을 저지른 북괴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서적 반공교육 말고는 전무했다. 반면 자유와 진보를 앞세운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이념 공세는 상당히 체계적이고 집요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과연 보수 세력은 부도덕하고, 보수주의는 기득권 세력의 불의를 변호하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가?

이 짧은 책을 통해 훑어본 서구의 정치사는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자랑스럽기 짝이 없게 만든다. 선배 정치인과 보수 세력은 유능했으며 짧은 시간 수많은 지적이고 정치적인 함정을 피하고 물질적 제약을 극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들은 부도덕하지 않았고, 보수주의는 기득권 세력의 불의를 변호하는 논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민족을 수렁에서 건져냈고 대한민국이 21세기의 세계를 선도하게 해주었다.

아울러 우리가 어쩌다 손에 받아든 자유 민주주의가 얼마나 아름답고 분에 넘치게 귀중한 보석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도 우리는 알량한 사회 정의란 미몽에 빠져 자유 민주주의를 진흙탕에 처박고 발로 차고 짓밟으며 홀대 해왔다. 자유 민주주의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다. 아끼고 보호하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 곁을 떠나고 말 신기루와 비슷하다. 한반도의 북쪽엔 아직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보석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도 이 보석을 전해주려면 우리는 이 자유 민주주의의 뿌리를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한다.

저자 로저 스크러턴은 이 짧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껏 그래왔듯이 오늘날의 모든 고민과 과제를 해결하려 해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철학이 보수주의라고 힘주어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요약해 설명한 보수적 사고방식의 전통은 전 세계의 모든 정치인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져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보수주의는 어떻게 시작됐나?

현대 보수주의는 계몽 시대의 산물이다. 계몽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계몽의 폐해를 막아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계몽운동은 인간의 완벽성을 내세우는 불경한 관점 때문에 자부심이란 죄, ‘신에의 반란’을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인간 이성의 완결성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각 정착공동체의 관습과 전통, 문화와 역사가 갖는 중요성을 모조리 무시해버린 이들의 사상적 후예들은 지구상에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창조해내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인간이 원죄의 실재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의 수중에 넣으려 할 때 혁명의 폭력적 전개는 당연히 예상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벌어진 공포정치의 사태들은 글자 그대로 악마적이었으며, 타락한 천사들의 반역을 재현했다. 아울러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기존 정부를 무시하며 새로운 정부 형태, 이상적 국가를 몇몇 사람들의 머리로 발견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할 때 무엇이 뒤따르는지도 보여주었다. 이는 나치와 러시아 중국의 국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 혁명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에 맞서 스스로를 규정하기 보다는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특히 국가의 사회주의적 개념에 맞서는 데 주력했다. 종교적 뿌리의 상실, 산업혁명의 부작용, 그리고 자리를 잡고 있던 예전의 생활방식에 가해진 폐해를 바라보며 보수주의자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도덕과 법의 모든 문제를 계산만 제대로 하면 풀리는 수학문제로 취급하는 듯 보였던 ‘진보적’ 의견에 급속하게 쏠리는 현상도 위태로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정부는 개인의 삶을 얼마나 보살펴야 하는가?

러시아, 중국 등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직접 진행된 반면 정도는 달랐지만 유사한 철학적 흐름이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에서도 나타났다. 미국의 뉴딜 정책(1933~1937) 이전까지 국가가 경제를 관리하고, 그 자체의 고유한 사업을 해야 하며, 시민들의 건강과 복지를 적절하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미국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런 생각이 정도를 벗어났거나 유럽 사회주의의 특징이며 미국의 헌법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적 개념들이 미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도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대공황, 신흥 도시 근로 계급의 곤경과 함께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지식인들이 꽤 늘어갔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정치에 지도주의(指導主義, dirigisme)가 수 십 년간 대세로 자리 잡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체제, 빈민 구제, 주택 건설의 형태와 노동을 제공하는 산업, 고용의 조건 등을 ‘관리’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국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마디로 국민의 복지와 안전이 달려있는 거의 모든 일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가정돼 왔다.

어떤 면에선 양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위기들의 진정한 원인도 이처럼 국가권력의 꾸준한 확대와 함께 달성하지 못할 목표들을 추구하고자 그 국가 권력을 사용한 데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사회 정의(social justice)’는 그러한 목표들에 주어진 하나의 이름이다. 이는 기만적인 하나의 신조어(Newspeak)였다. 오히려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대규모의 불의를 촉진하는데 사용됐을 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서구 정치가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시민 사회의 본질을 깊이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정치가 대화, 우정, 스포츠, 시와 예술 등 인간 조건의 다른 측면들에 눈을 감아버렸다고 주장한다. 인생의 그런 측면들을 통해 인간은 무엇을 얻고 소비하는 데서 벗어나 내재적 가치가 있는 사안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수주의자들은 호소한다.

현대 보수주의는 국민 주권을 요구하는 세력에 맞서 전통을 옹호하려고 시작됐다. 그 다음엔 진보라는 물질주의적 강령에 맞서 종교와 고급문화를 배양하자는 호소로 이어졌다. 또한 사회주의와의 투쟁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힘을 합했다. 이처럼 보수주의는 서구 문명이 맞닥뜨린 적들과 싸워온 투사였다.

지금 왜 다시 보수주의로 돌아가야 하나

보수주의는 사회적 만병통치약을 찾았다고 외치는 어설픈 이상주의자, 싸구려 선지자들에 맞서 싸워왔다. 그들은 그동안 국민주권, 공리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자유주의(진보주의)의 깃발을 치켜세웠고 이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표현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약이며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서구의 죄책감을 강조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이란 신주단지를 또다시 앞세운다. 보수주의가 21세기에 맞닥뜨린 두 번째 적으로 저자는 종교적 극단주의, 특히 와하비 살라피(Wahhabi Salafi) 분파가 장려하는 호전적 이슬람주의를 든다.

정치적 올바름을 혹자는 〈깨인 신 마르크수주의(Woke Neo Marxism)〉라 부르며 기독교란 종교를 대신해 서구에 파고든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이라고 조롱한다. 그런 철학 중에는 예컨대 미국은 흑인 노예를 착취해 만들어진 나라이며, 아직도 흑인들은 체계적 차별(systemic racism)에 시달린다는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이 들어 있다. 성별은 주어지지 않고, 누구나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신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렇듯 관습과 전통,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가 더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는 궁극적으로 이슬람 테러리즘을 부추기거나 서구 사회의 통일성을 괴멸시킨다고 보수주의자들은 염려한다.

보수주의자에게 인간은 의무를 진 채 태어나, 지혜라는 소중한 유산을 간직한 제도와 전통들에 복종하는 존재다. 그러한 전통과 제도가 없는 자유의 행사는 인간의 권리와 자격을 증대하기보다 그것들을 파괴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인간이 이성의 활용을 통해 좋은 효과를 거두려면 이성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 토대를 둔 관습과 제도들이 필요하다. 바로 이 통찰이 아마도 인간이라는 종족의 자기 이해에 보수주의가 기여한 가장 주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들을 폭넓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고 저자는 보수주의가 태동한 영국, 이를 승계한 미국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 등 서구의 정치 철학자들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그들이 각 시대별로 맞닥뜨린 과제들과 씨름한 결과물을 간략하게 정리해 제시했다. 따라서 이 책의 양은 소박하지만 담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는 방대하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St. Thomas Aquinas(1226~1274), Richard Hooker(1554~1600), Thomas Hobbes(1588~1679), James Harrington(1611~1677), John Locke(1632~1704), Montesquieu(1689~1755), William Blackstone(1723~1780), David Hume(1711~1776), Samuel Johnson(1709~1784), Thomas Jefferson(1743~1826), Adam Smith(1723~1790), Edmund Burke(1729~1797), Immanuel Kant(1724~1804),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 Joseph, Comte de Maistre(1753~1821), Francois-Rene Vicomte de Chateaubriand(1768~1848), Comte Alexis de Tocqueville(1805~1859), Francois Marie Charles Fourie (1772~1837), Calude-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1760~1825), August Comte(1798~1857), Jeremy Bentham(1748~1832), James Mill(1773~1836), John Stuart Mill(1806~1873), Samuel Taylor Coleridge(1772~1834), John Ruskin(1819~1900), Matthew Arnold(1822~1888), Benjamin Disraeli, Earl of Beaconsfield(1804~1881), Thomas Stearns Eliot(1888~1965), F. R. Leavis(1895~1978), Johann Gottfried von Herder(1744~1803), Henry David Thoreau(1817~1862), Leo Strauss(1899~1973), Friedrich von Hayek(1899~1993), Michael Oakeshott(1901~1990), James Burhnam(1905~1987), Whittaker Chambers (1901~1961), Simone Weil(1909~1943), Jose Ortega y Gasset(1883~1955), George Orwell(1903~1950), Maurice Cowling(1926~2005), F. W. Maitland(1850~1906), William Buckley Jr.(1925~2008), Russel Kirk(1918~1994), Samuel Huntington(1927~2008), Pierre Manent(1949~).

목차

서문
1장 보수주의는 어떻게 시작됐는가
2장 철학적 보수주의의 탄생
3장 독일과 프랑스 보수주의
4장 정신과 문화의 보수주의
5장 사회주의에 맞서 싸우다
6장 정치적 올바름과 이슬람 극단주의
참고서적
미주

본문중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계몽운동 시기에 등장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맞서 인간 개인의 우연적이고 고착된 본성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날의 상황에 맞게 풀어보자면 특정한 곳에서 사는 일군의 사람들이 정부를 세웠고, 정부는 이웃을 믿고 살아갈 필요라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욕구를 충족해 주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 날 보수주의자들은 조국의 방위, 국경의 유지, 국가의 통일성과 일체성을 강조해 마지않는다. 이는 또한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 날에도 보수주의 내부에 나타나는 긴장의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유 경제와 자유 무역이라는 신념은 불가피하게 지역적 애착이나 공동체의 보호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공유한다. 그처럼 정치적 삶의 한 가지 목적은 이성의 행사를 가다듬고, 그 이성의 집단적 행사에 필요한 미덕을 시민들에 심어주는데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때엔 또 달리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성의 활용을 통해 좋은 효과를 거두려면 이성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 토대를 둔 관습과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통찰이 인간이라는 종족의 자기 이해에 보수주의가 기여한 아마도 가장 주요한 부분이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의 궁극적 가치로 수용하는 데는 서로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전통적 제도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질서가 개인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자유가 정치질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무엇이 정치 질서를 정당하게 만드는가. 보수주의자는 그 정치 질서를 만들어낸 자유로운 선택들이 아니라, 정치 질서가 만들어낸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았다.”

“버크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합의로 이뤄진 사회 계약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을 거부했다. 그는 사회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돼 있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사회는 죽은 사람, 살아 있는 사람, 아직 태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결사체다. 사회를 유지하는 원칙은 계약이라기보다는 신탁을 받은 사람들의 의무(trusteeship)에 더 가까운 무엇이다. 사회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산이다. 우리는 그 사회를 위해 우리의 요구에 한계를 설정하고, 우리는 단지 사회라는 그 무언가를 받아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주는 끊임없는 연쇄의 고리와 같은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훌륭한 그 무엇은 우리가 멋대로 훼손해도 되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헤겔이 옳다면 자유는 사회적 인공물로 복종과 투쟁이라는 갈등을 통해 생겨난다. 더욱이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존중의 평등’을 문명화된 질서의 기초라 간주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내재적으로 갈등에 오염된 채 탄생한다. 그러한 평등은 불평등에서 쟁취되며 권력과 지배의 흔적이 없는 절대적 평등이라는 이상은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의 역사는 자유라는 바로 그 본질에 살아남는다. 그것은 예속의 역사다. 헤겔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유는 따라서 정치적이고 대단히 반이상향적이다.”

“모든 사회적 행동은 무한하게 많은 사람들의 결핍과 수요를 말해주는 정보를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갈등에 따른 순간적인 해결책도 필요로 한다. 자유로운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은 그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총체적 수요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그 상품을 얻으려고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희생하려는 지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자유 교환의 체제 안에서 그 상품에 붙여진 가격 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 가격에 담긴 정보는 사회적이고 역동적이며 실제적이다. 그것은 낯선 사람의 애매한 결핍을 충족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정보이며, 변화하는 결핍과 욕구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이 정보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팔고 사는 사회에서 이루어진 교환의 과정에서만 획득되기 때문이다. 시장 작동기제에 어떤 형식의 간섭이라도 하게 되면 합리적 경제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파괴해 버리고 만다. 자료의 정태적 묶음으로 이 정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인 계획은 여지없이 비합리적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경제적 삶의 방향과 범주를 고정해버려 계획이 의존해야 하는 정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획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취지로 모든 제도와 심지어 언어까지 자신의 목적에 맞게 동원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경제 계획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강제된 경제적 평등을 ‘사회 정의’로 묘사한다. 자유로운 합의로 얻어진 자산을 부당하게 징발해야만 계획이 달성되는 데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고, 로마법을 요약하며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Ulpian)가 설명한 대로 정의의 진정한 의미는, 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이란 교활한 단어가 ‘정의’의 의미를 빨아 없앤다. 사회적 정의는 정의의 형태가 전혀 아니고 도덕적 부패의 한 형태다.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을 하거나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게을리 하고, 협정을 깨거나 고용주들을 기만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행위다.”

“이데올로기는 일견 전쟁의 정치를 제안한다. 전달하는 말은 단순하다. 너는 우리와 같은 편이냐 적이냐, 우리 편이라면 어쨌든 이긴다는 말이다. 이는 영미의 대의정부라는 정치 전통과 송두리째 상반된다. 그 대의정부란 특정한 절차와 제도가 ‘주어졌다’고, 다시 말해 의견대립이 해소되는 테두리와 체계가 이미 창조됐음을 수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형태의 정부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거나, 혹은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런 정부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 속에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목적이자 수단이며 해결이자 문제다.”

“오크쇼트는 20세기 전체주의 운동보다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정치에 일종의 대세로 자리 잡았던 지도주의(指導主義, dirigisme)흐름에 더 공격을 퍼붓고 싶어 했다. 수 십 년간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체제, 빈민 구제, 주택 건설의 형태와 노동을 제공하는 산업, 고용의 조건 등을 ‘관리’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국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국민의 복지와 안전이 달려있는 거의 모든 일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가정돼 왔다. 일생동안 오크쇼트의 관심사는 그런 식의 정치가 시민 사회의 본질을 깊이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사정을 보여주려 했다. 그 결과 정치가 대화, 우정, 스포츠, 시와 예술 등 인간 조건의 다른 측면들에 눈을 감아버린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인생의 그런 측면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 소비하는 데서 벗어나 내재적 가치가 있는 사안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소개

로저 스크루턴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44

로저 스크루턴은 영국의 철학자. 1944년생.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7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에서 미학 교수로 20년 동안 가르쳤으며, 이후 보스턴대학교 초빙교수, 미국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워싱턴 윤리공공정책센터 선임연구원, 《영국미학저널》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버킹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교수로 있다. 스크루턴은 일찍이 보수주의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8년 파리에서 학생시위를 직접 목격하면서, 당시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에 맞서 서구문명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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