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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창해 정란 : 조선의 산야를 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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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창해 정란의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소설 형식의 역사서.

조선 후기에 그저 산이 좋아서 한평생을 유람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창해일사 정란. 그는 산수를 향한 열망에 매료돼 과거 공부를 접고 여행을 떠났다. 꿈만 앞세운 탓에 비난받기도 했으나 굴하지 않았고, 그의 발자국은 마침내 예술이 되었다. 글과 그림으로 체험기를 남긴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정란, 그의 눈에 그려진 조선 천지의 풍경이 펼쳐진다.

출판사 서평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니
부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조선 천지에 내 발자국을 남기겠노라!”

##산에 미친 서생(書生), 정란은 누구인가?
창해 정란은 산수에 관한 열정 하나로 평생을 여행에 바친 선비다.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양반가의 여느 자제처럼 과거를 공부하다 어느 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금강산, 백두산, 한라산 등 명승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여행이 유행하던 시기였지만, 여행이 삶의 전부인 사람은 정란이 유일했으리라.
※ 창해일사 정란(滄海逸士 鄭瀾): ‘푸른 바다로 달아난 선비’ 정란

##산이 좋아 산에 가노라네
조선의 선비들은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영ㆍ정조 시대에는 양반들 중 명문가 집안의 권섭과 양반 가문의 이중환, 신광하가 산천을 유람하는 일을 좋아했다. 대학자로 꼽히는 퇴계는 청량산을, 조식은 두류산(지리산)을,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감히 산에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아니, 주변에는 한평생 자기 고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거나 주위 산천조차 둘러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에 비해 정란은 과거 공부를 접고 등반 여행에 인생을 걸었다. 당연하게도 가족은 뒷전이었고 10대 후반의 아들 정기동이 가장으로서 집안을 지탱해야만 했다. 어린 자식이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란이 꿈을 계속 좇을 수 있었던 것은, 가족 역시 정란의 꿈을 응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8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의 무덤 앞에서 그는 등반의 뜻을 완전히 접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길을 떠났고, 자신의 행적이 사람들의 비난을 뛰어넘을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더욱 힘썼다.

##남들과 다르게 홀연히 자연과 교감한 대장부
-산수병에 걸려 가족을 내팽개치고 산하를 유람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이 길을 걸었습니다. 길 위에서 싸우고 다투는 건 결국 저 자신이자 제 내면의 흥이었습니다. 흥이 깨지면 갈 곳조차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등정했을 때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쾌감이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을 꿈꾸게 했습니다. 저만 누리는 보상입니다. 제게 있어 산행의 첫 번째 원칙은 ‘혼자의 힘으로 맞서자’였습니다. _216쪽

당시 양반들은 노비가 태워주는 가마에 올라 기생과 악사를 끼고 인솔자와 하인을 부리며 산에 올랐다. 호화롭고 소란스러운 등반이었다. 그러나 정란은 오로지 청노새 한 마리와 어린 종 하나만 대동한 채 두 발로 산을 올랐다. 고독하게 자연과 마주한 것은 스승 청천 신유한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기도 했다. 호연지기를 키워주는 자연, 사람에게서 기댈 수 없는 한 톨의 한까지도 넉넉히 받아주는 위대한 자연이 참된 스승이라 배운 것이다. 그렇기에 정란은 산행을 통해 턱 밑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보며 쌀을 거두는 농부의 보람을 느꼈다.
정란은 산행의 도반 청노새 청풍을 대하는 태도도 남달랐다. 이별을 앞둔 청풍을 위해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에서 함께 바닷가의 풍경을 눈에 담은 것이다. 그는 청풍이 죽자 제사를 지내 애도했는데 제문을 읽는 애절한 소리에 사람들이 감복해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 청노새 동네)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또 지인 남경희에게 청풍을 위한 제문까지 받았다. 이렇듯 정란은 자연과, 동물과 교감하며 배운 감동의 순간 하나하나를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최북, 〈기려행려도〉
##예술이 된 정란의 발자국 《불후첩》
정란은 산을 다녀오는 것은 물론, 산에서 체험한 내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에도 주목했다. 그는 평소 교유했던 화가와 문장가에게서 산행을 하는 자신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받아 첩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바로 《불후첩》이다. 번암 채제공이 “자네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존재라네”라고 찬문한 것에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인 ‘불후(不朽)’를 첩의 이름으로 붙였다.
《불후첩》에 어떠한 작품들이 엮였는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정란이 앞서 거론한 이용휴는 물론 강세황, 최북, 김홍도, 허필 등 수많은 예인과 교유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
이용휴의 시와 최북의 작품 〈기려행려도〉, 〈금강산전도〉, 〈풍설야귀인도〉 그리고 김홍도의 작품 〈단원도〉, 아들 정기동을 위한 묘비명, 성대중의 글(『청성집』 제발) 등 다양한 기록 속에서 정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후세에 남기고자 했던 뜻이 면면히 전해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의 발자국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멸시받던 사람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혀끝으로만 놀린다면 그 흉허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내 진정성은 발끝에 있었음을 먼저 밝힌다. (…) 산행의 가치는 산에 대한 진정성이다. 거들먹거리거나 속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연이 베푸는 생명수를 맛볼 수 있다. 그 달콤한 맛을 옮겨줄 방법이 없기에, 다만 세상과 빗대어 내 생각을 적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안주하는 세상은 너무나 비좁아 늘 다툼이 많다. 하나 눈과 마음을 밖으로 돌리면 확 트이고 활기찬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 조국 팔도가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자연 속 천지 만물이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평생 내가 지키고자 했던 뜻이다. _312쪽

[출판사 리뷰]

오래전부터 선비들이 사랑했던 그 풍경,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선 시대,
사대부에서 예인·상인·약초꾼을 가리지 않고 나눈 산수에 관한 열정!
역사의 물밑에, 기록의 행간에 발자국을 남긴
창해 정란의 삶이 궁금한 당신을 위한 책장


김홍도, 〈단원도〉
##역사 속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가 이재원
저자 이재원은 그동안 다산 정약용, 단원 김홍도, 인목대비 등 역사저술가로서 역사 속 인물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에 집중해왔다. 그는 단원 김홍도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정란을 알게 되었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에는 거문고를 타는 김홍도와 부채질하는 강희언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정란의 모습이 등장한다. 세 사람은 변하지 말고 서로 본받자는 의미로 모임에 ‘진솔회(眞率會)’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이 그림, 기록에만 머물렀다면 진솔회 다음 해에 세상을 등진 강희언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광기로 유명해 ‘조선의 고흐’라고 불리는 최북의 작품과 일생 속에 자리한 정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전 재산을 풀어 제주도 백성들을 구한 제주도의 여자 거상 김만덕의 이야기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실제 역사적 흐름과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저자의 소설적 상상력 아래에서 이름난 사람은 물론 목장 관리인, 약초꾼, 매사냥꾼, 승려 등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주변 사람들까지 한데 엮였다. 길거리에서 들려 오는 나랏일 걱정까지도 조선 시대의 숨결이 묻어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각색한 부분이 어디인지 살펴보는 것도 한 재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창해 정란이 있다. 무언가에 미쳐 최고에 오른 사람은 지금 시대에도 드물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산에 미쳐 최고가 된 이가 있었다. 그는 역사의 행간에서만 조용히 머무를 사람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사실에 주목했고 기록에 근거해 정란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산 지도와 사진, 그림 자료 등으로 살펴보는 조선의 풍경
이 책은 정란의 행적을 살펴보고 조선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도록 돕는 자료가 많이 들어갔다. 면지 2쪽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위에 백두대간·정맥을 표시한 지도가, 면지 3쪽에는 정란의 다녀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한 주요 산 지도가 실렸다. 또한 김홍도의 〈평양감사향연도〉를 통해서는 검무가 유행했던 당시 풍경을 엿볼 수 있고, 금오산 삼층석탑, 월천서당 등 실제 사진으로 생생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강화이북해역도〉, 〈북방강역도〉와 같은 고지도에서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졌었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부록으로 인물, 용어 풀이와 일부 저작물에 관한 해설이 있다. 창해 정란 연표와 조선 시대사 연표까지 있어 한눈에 흐름을 살펴볼 수도 있어, 이러한 여러 자료를 통해 조선 팔도 여행을 책으로 다녀오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등반과 예술 그리고 《불후첩》과 《와유첩》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정란. 여기에서 ‘최초’라는 말이 정말일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철저히 기록에 의한 것이다. 정란은 산을 다녀와 체험한 내용을 남기기 위해 교유했던 화가와 문장가의 작품을 받아 첩으로 엮었다. 그것이 두 개의 그림첩 《불후첩》과 《와유첩》이다. 지난 2004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정란의 그림첩인 《와유첩》을 전시한 바 있다. 이후 소장자가 자취를 감추었으나 200여 년 만에 허필, 강세황, 최북의 그림과 글을 통해 정란의 발자국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셈이다. 창해 정란 이전에 전국의 산을 다 돌아본 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이렇게 증인의 문장과 그림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경우는 없다. 정란 자신이 남긴 기록, 지도 등은 전해지지 않으나 정란과 교유한 많은 이들이 그의 행적을 칭송한 기록이 있고, 정란처럼 자신의 꿈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밝히며 다닌 이가 없으므로 창해 정란의 여행 기록에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김정호와의 연결 고리 가능성
한 세대를 넘어 창해의 일생이 고산자 김정호에게 그대로 전해져, 그 또한 산하를 누비며 불세출 〈대동여지도〉를 만들게 한 동기는 아닐지……. 뛰는 심장과 끓는 피로 조선 팔도 산야에 발자국을 남긴 두 사람은 같은 DNA의 자유인들이었다. _341쪽 「글을 마치며 ㆍ 외로운 술잔을 가득 채워준 인연은 또다시 이어진다」

창해 정란이 평생을 유람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평화도 한몫했다. 전쟁이 없던 18세기 중흥기였기에 정란은 조선 곳곳을 누빌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기회가 닿지 않아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없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시기였디면 그의 꿈은 어디까지 펼쳐졌을까? 산수를 향한 정란의 열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놀라움을 선사한다. 당시에는 더욱 기이하고 대단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역사의 물밑에 찍힌 그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정란의 평생지기 조술도의 조부 조덕린의 신원 회복에는 채제공의 입김이 있었다. 어쩌면 조술도를 위해 정란이 채제공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열셋의 나이 차이와 신분을 떠나 호형호제했던 최북의 작품에도, 금강산 사행길을 오른 김홍도 일행이 그린 그 작품들에도, 곁에 함께 있었던 정란이 그림에 보탤 산행기를 들려주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산하를 누비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에게도 창해 정란의 열정이 전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다시 산과 자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란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으나 시대적 무심에 너무 오래 묻혀 있었다. 조선 최고 등반 여행가의 긴 꿈과 함께한 나의 노력에 대한 성과가 주어지길 바란다. 정란과 함께한 여정에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평생 보답해야 할 내 몫이다. 내 강토 내 강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과 제2의 창해일사를 꿈꾸는 이 땅의 수많은 등반가에게 이 책을 바친다. _25쪽 「책을 펴내며 ㆍ 조선 후기 팔도를 주유하던 창해 정란을 만나다」 중에서

추천사

임택(여행가,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저자)
##‘혹시 내가 그의 환생인가?’ 하는 작은 착각
창해 정란, 양반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노새 한 마리와 산천을 주유한 인물입니다. 저도 지난해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당나귀와 함께 걸었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과감히 그치고 여행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멋지게 바뀌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말이죠. 비워야 채울 수 있듯이, 창해는 어떤 것을 버렸을까요? 답은 이 책에 있습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영상앨범 산> 진행자)
##일찍이 개척자 정신을 무장한 채 전 지구로 시야를 넓혀준 이들
마르코 폴로, 정화, 마젤란 그리고 등반 여행가 정란. 그는 자신의 생을 바쳐 조선의 산야에 자신의 발자국을 다 남기겠다는 꿈을 실천했습니다. 평생 산을 가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쁨을 주었던 그의 여행담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 이재원 선배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목차

책을 펴내며ㆍ조선 후기 팔도를 주유하던 창해 정란을 만나다

주요 등장인물
제1부 산수병에 걸릴 숙명
시절인연
태몽
불운한 천재, 김시습
꺼지지 않는 등불 스승이시여!
호형호제의 연
찬란한 문장 속의 빛
과거 급제 박탈
조선 팔도를 읽다
두물머리와 등신탑
신의 한 수, 마릉

제2부 길 위의 인연
조선왕조 시조묘
생명을 다시 얻다
휘파람 소리에 까마귀 날다
인재를 품어내는 묘향산
미안하고 미안하다
《송도기행첩》의 산수를 찾아가다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

제3부 조선의 바람 백두산을 뒤덮다
손안에 조선을 담다
다시 도진 불치병
사냥꾼과 백두산
화선지 위 오방색 먹빛
큰 산을 품고 왔네

제4부 발자국에 고인 빗물
진솔회가 열리다
단원, 묵은 약속을 지키다
제주 거상 김만덕
썩어 없어지지 않는 존재
이별 여행을 떠나다
《불후첩》을 남기노니
해후
조덕린의 신원 회복
나 이제 가련다

글을 마치며ㆍ외로운 술잔을 가득 채워준 인연은 또다시 이어진다

여행길에 만난 인연들
역사 용어 풀이와 저작물
참고한 책들
창해 정란 연표 | 조선 시대사 연표

본문중에서

“호연지기를 의롭게 키워주는 또 다른 스승은 자연이다. 사람에게서 기댈 수 없는 한 톨의 한까지도 받아주는 넉넉함은 자연밖에 없다.” _71쪽

-호가 창해滄海라 했는가? 오늘부터 일사逸士를 붙여 부르게. 푸른 바다로 도망간 선비 창해일사, 어떤가?
푸른 바다로 도망간 선비……. 마음에 와닿는다. _82쪽

옷을 갈아입은 홍심이 최북의 추임새에 맞추어 사뿐사뿐 발걸음을 앞뒤로 옮겨가며 그림 속 헐성루에 올랐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검광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낯을 가리고 멈춰선 칼끝에 비로봉이 걸렸다. 내리치는 칼날에 마하연 구름이 갈라지며 금강산 속살이 드러났다.
양손으로 휘두르는 그녀의 칼끝에 진달래 꽃잎이 두 동강 나고 연이어 또 다른 꽃잎이 두 동강 나는 환상이 보였다. 나를 비웃던 조롱이 그 꽃잎 하나하나에 실려 만폭동 계곡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구룡연 아홉 마리 용들이 구름을 부르며 최북의 설움을 보듬어주었다. 비가 내렸다.
홍심은 빗물인 듯 눈물인 듯 울고 있었다. _165쪽

혜환은 알고 있었다. 호랑이를 만나고 산적과 마주치는 것보다 걸어온 길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질 때 내가 힘이 빠진다는 것을.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의 구렁텅이에 빠진 내게 일어설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었다는 것을. 절망의 나락에서 간신히 상심으로 접어든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외롭고 두렵지 않을 것이다. _182쪽

드디어 백두산 정상이다. 내 나이 쉰셋에 수없이 꿈을 꾸고 주문하던 백두산 천지, 곤륜산 만 봉에서 뻗어 나온 장쾌함이 백두를 이루었다는 이곳에 내가 서 있다. 둘레만 이십 리가 넘는 넓은 정수, 천지. 장군봉에 반사되는 빛은 천기를 뿜어내는 안광이었다. 까마득하게 산봉우리들이 문을 열고 아득하게 드러난다는 천지 물색이 검푸르다. 하늘 못인데도 검은빛이라면 그 깊이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한가히 물 마시는 사슴 무리와 하늘과 구름을 담아낸 수면 위로 날고 있는 한 쌍의 새가 선경을 더하고 있었다. 한 임금 아래 양반 천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십 리가 넘는 둘레에 털퍼덕 주저앉아 태평주 한 사발에 풍년가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임금이 웃고 있었다.
시흥詩興이 일었다. 나는 산에 미친 서생, 창해 정란이다. 미숙하나 세상의 이치를 알 만큼만 글을 깨우친 서생으로서 시 한 수 없다면 어찌 산수에 미친 선비라 말할 수 있겠는가? _238쪽

-남이 가지 않는 길을 평생 걸어온 사람에게 어떤 찬사가 필요하겠는가? 창해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존재, 여섯 글자면 충분하네.
불후不朽, 사라지지 않는…… 목이 메어왔다. 자세를 고치고 채제공 앞에 큰절을 올렸다. _296쪽

청풍아! 처음으로 나를 대할 때 내 모습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피던 눈빛이 여전한데 이제 너를 떠나보내는 마음 애달프구나! 너도 나도 함께 늙어가며 한솥밥 먹은 가족이었다.
백두산, 묘향산, 오대산, 두류산에 오르고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으니 너는 숱한 말 중에서도 평생 산을 즐긴 여행가이자 천상의 객이었다. 자부심을 가지거라. (…)
평생 내 손과 발이 되느라 힘든 것이 너무나 많았을 너에게 난 많이도 무심했다. 후회되는구나! 내 몸 편하자고 네 몸에 의지한 채 명산대천을 유람하던 일도 마음에 맺힌다. 아무 불평 없이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서 길을 여는 것이 너의 숙명이었느냐? 너는 분명 여느 노새와 달랐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 한다. 그 기억 속에 우리는 영원을 꿈꾼다. 나의 기억 속에 영원은 바로 너다. 이제 너를 애써 보내려 한다. 나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하며 함께 보고 이야기하던 것들을 기억해다오. 너의 총명함을 믿으마. 새로운 세상이 널 기다릴 것이다. 그곳은 누구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_305~306쪽

단원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니 마음이 설??다. 코끝에 묵향이 짙게 밀려왔다. 먹을 찍어낼수록 짙어지는 건 추억이었고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섞이는 물은 진실이었다. 지난 추억이 진실이란 물을 만나 화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획을 그어나가고 점을 찍어내는 단원의 모습은 한 마리 학이었다.
그림 배경은 마포 성산 동쪽에 자리 잡은 김홍도의 집이다. 거문고 운율에 맞춰 학이 춤을 추고 돌담 사립문 밖 동자와 청노새가 안의 풍경이 궁금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마당에는 벽오동 나무가 성글게 드리워진 풍경이다. 초가로 이은 사랑방 들마루에 세 사람이 어울려 있다. 거문고 줄을 튕기는 단원의 모습과 부채질하며 풍류를 바라보는 담졸, 거문고 소리에 귀를 내어주고 흥얼거리는 내가 있다. 필선 하나로 사람의 표정까지 잡아내는 붓끝은 신의 조화였다. _276~277쪽

창해일사 대장부가 조선 팔도 산수를 다 유람하고 드디어 바다 건너 제주에 들어가 한라산을 등정하려 한다. 비웃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속된 망상이 골수까지 파고든 사람들이다. 과연 수백 년이 흐른 뒤에 조롱하던 그들의 이름이 남게 될지, 아니면 조롱받던 사람의 이름이 남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_281쪽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멸시받던 사람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혀끝으로만 놀린다면 그 흉허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내 진정성은 발끝에 있었음을 먼저 밝힌다. 사람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두 눈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막히면 속이 답답해지고, 세상을 좁게 보면 견문이 좁아진다. 산행의 가치는 산에 대한 진정성이다. 거들먹거리거나 속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연이 베푸는 생명수를 맛볼 수 있다. 그 달콤한 맛을 옮겨줄 방법이 없기에, 다만 세상과 빗대어 내 생각을 적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안주하는 세상은 너무나 비좁아 늘 다툼이 많다. 하나 눈과 마음을 밖으로 돌리면 확 트이고 활기찬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 조국 팔도가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자연 속 천지 만물이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평생 내가 지키고자 했던 뜻이다. _311~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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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재원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한 뒤 KBS 공채 14기로 입사하였다. 그 뒤 여의도 본사 감사실을 거쳐 KBS 강릉방송국에 부임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옛것을 숭상하는 그는 바다와 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저 없이 강릉으로 와서 강릉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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