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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6: 조선을 침몰시킨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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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용삼
  • 출판사 : 백년동안
  • 발행 : 2022년 02월 14일
  • 쪽수 : 392
  • ISBN : 979118606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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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화 개혁의 시동, 갑오개혁
세계 역사의 지축을 뒤흔든 청일전쟁

동학 농민 봉기를 빌미로 일본이 한반도에 파병해 청과 전쟁을 벌인 청일전쟁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이미 야욕의 일단을 드러냈던 일본은 10년의 절치부심 끝에 기회를 잡았다. 동학 봉기 진압을 위해 청군이 파견되자 자기네도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학이 봉기한 호남과는 관계없는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볼모로 잡은 뒤 대원군을 내세우고 친일 내각을 만들어 이른바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어떻게든 청과 한판 붙으려는 일본과 ‘속국’을 빼앗긴 셈이 된 청은 모두 조선에 파병한 상태여서 전쟁은 필연이었다. 그렇게 벌어진 청일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러자 일본은 중국마저 침공할 욕심을 품게 된다. 1945년에야 끝나는 일본의 50년 전쟁은 바로 청일전쟁으로 시작됐다.

출판사 서평

임오군란,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외세의 침탈로 인한 조선 내정의 혼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와 손잡고 서방 연합국에 맞섰던 일본의 전쟁은 1945년에 끝났다. 이 세계대전의 ‘아시아 편’인 태평양전쟁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그 전쟁은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의 연장이었고, 중일전쟁은 다시 1931년 만주 침략의 연장이었고, 만주 침략은 1910년 한반도 합병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1910년의 합병조차도 후속 조치에 불과했고, 그 시발은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시작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일본을 꼭 반세기 동안 전쟁에 매달리게 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상당 지역이 애꿎은 전화를 겪은 것이다.
그러나 그 침략 야욕은 청일전쟁보다 10여 년 전에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임오군란을 빌미로 명분도 별로 없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더니 곧바로 그 군대를 이용해 갑신정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내의 개화파 인사들이 일으킨 정변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사실상 공범이었다. 쿠데타가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고 조선에서 쫓겨났지만 청과 맺어둔 조약이 다시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됐다.
역시 그들이 빌미로 잡은 것은 조선 내정의 혼란이었다. 내부적으로 왕조의 말기적 증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외세가 밀려들고 있었으니 말단의 피해는 오롯이 민중들의 몫이었다. 탐관오리가 발호했고,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동학 농민들의 봉기다.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종주국’인 청나라에 진압을 의뢰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임진왜란 같은 대형 외침에서나 예외적으로 있었던 원병 요청이었다. 결국은 청나라가 이에 응했는데, 일본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청이 파병하면 일본도 군사를 동원할 명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명분이라는 것이 영사관 보호였지만, 청이 농민 봉기 진압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잽싸게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파병 방식에서 이미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고 있었다. 청은 농민 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분에 걸맞게 봉기 지역인 호남 쪽으로 향해 아산만에 군대를 상륙시켰지만, 일본은 그와는 상관없는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로 향했다. 병력 규모도 수천 명이나 돼서 당초 명분이었던 영사관 보호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드러냈다. 일본 스스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병력 규모를 줄여서 알리거나 후발대는 교대 병력이라고 둘러대는 등 꼼수를 썼다.

군국주의 일본의 진면목을 보여준 청일전쟁
조공국에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그러나 청과 일본이 경쟁적으로 파병에 나섰을 때 정작 파병의 이유가 됐던 동학 농민군은 진정되고 있었다. 조선 정부도 부랴부랴 청에 파병 중지를 요청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조선에 파견된 청군과 일본군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그들끼리의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 충돌은 일본이 원하는 바였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충돌을 유도하려 했다.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니 청군을 내보내라고 압박해 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조선 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힘이 없다면 자기네에게 청군 축출을 문서로 의뢰하라고 압박했다. 그들은 이미 출병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경복궁을 지키던 조선 군사를 쫓아버리고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 온 것은 조선 내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니 내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일본은 물러나 있던 대원군을 섭정 격으로 복귀시켜 고종의 권한을 빼앗았고, 친일 내각을 통해 추진한 이른바 갑오개혁으로 왕권을 제도적으로 박탈하려 했다. 이 개혁은 일본이 지정한 개혁 과제를 시한까지 못박아 추진하게 한 것이었다. 일정상 도저히 불가능한 무리한 시한을 설정하기까지 했고, 조선 정부가 거부하면 일본이 독자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청나라도 일본이 자기네 ‘속국’을 쥐고 흔드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었고, 일본의 의도대로 전쟁에 나섰다. 결과는 이미 아는 대로 중국의 참패였다. 일본은 미리 전쟁 준비를 했고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는 차이도 있었지만, 실전에서의 어이없는 실책들도 많았다. 뜻밖의 승리에 고무된 일본이 한반도 확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 침공까지 노렸을 정도다.
이 책은 이렇게 진행된 청일전쟁을 구체적인 전개 상황과 함께 자세히 전달하고 있다.

목차

제1장 이것이 진짜 헬 조선이다
제2장 청·일 양군 조선에 출병하다
제3장 대일본제국 헌법이 전쟁의 원인
제4장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전쟁 일으켜라
제5장 경복궁 점령 작전
제6장 청일전쟁 포성이 울리다
제7장 조선 보호국화 시동 걸다
제8장 근대화를 향한 갑오개혁 시동
제9장 평양 전투 및 황해 해전 승리한 일본
제10장 전장, 중국으로 확대되다
제11장 동학 농민군, 일본군과 격돌
제12장 동학 농민군의 최후
연표
참고문헌

본문중에서

스기무라는 난세를 만난 고종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카드는 청군에게 의지해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면 동아시아에서 천하대란이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스기무라는 1894년 5월 22일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상에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일·청 양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출병 준비가 필요하다”라고 상신했다. (45쪽)

위안스카이는 스기무라와의 회견에서 청군이 조선에 파병해도 일본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청군의 조선 출병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리훙장에게 상신했다. (49쪽)

그런데 사태가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6월 6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으로부터 관군이 농민군을 압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군 파병 요청은 완전한 헛발질이 된 셈이다. 관군의 선전에 고무된 조정 대신들은 국왕을 비난할 수는 없으니 비판의 화살을 민영준에게 돌렸다. (52쪽)

일본은 오래전부터 청과의 전쟁을 준비해 왔다. 그들은 근대 정치와 군사 등을 잘 이해하는 일류 정치가와 군사 전략가, 근대 군사 작전에 이해가 깊은 지휘관들로 대본영을 구성해 치밀한 준비 끝에 전쟁을 일으켰다. 반면에 청은 아무런 준비도, 대응책도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청 황제인 광서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사실상의 권력은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다. 리훙장은 열강에게 조정을 부탁해 전쟁을 회피하고 현상 유지를 도모한다는 ‘조용하면서도 신중한’ 외교를 지향했다. 군기처를 장악한 쑨위원은 그런 리훙장을 지지했다. (54쪽)

일·청 양국은 장교의 자질 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 일본은 유럽식 사관학교를 운영해 유능한 장교들을 대량 배출했다. 또 우수한 장교들이 유럽에 유학해 선진 군사학을 배웠고, 서양 군사고문을 초빙해 근대 전략·전술을 습득했다. 반면에 청은 과거제를 통한 무관 선발 시스템을 고수했다. 무과 시험 과목은 활쏘기와 무거운 돌 들어 올리기 등 근대 전쟁에는 쓸모없는 내용들이었다. 청일전쟁은 징병제를 통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국민개병의 일본군과 모병제로 모집한 리훙장 군벌 군대와의 대결이었다. 그것은 치명적 무기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와 중세 군대의 결투였다. (57쪽)

이러한 외교 대권 설정으로 인해 의회는 정부의 외교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천황과 군부의 독단적 결정으로 전쟁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헌법상의 문제 조항들로 인해 군부는 천황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일본 국민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5~10년 주기로 대전쟁의 광란에 휩쓸리게 된다. 결국 일본 군부는 두 차례 원자폭탄 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94쪽)

이날 영돈녕부사 김병시는 “민란은 선량한 백성이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소란을 피운 것인데, 이들을 동학도로 단정하고 수천 명을 살육했습니다. 이것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청국 군대의 원조를 청한 것이 일대 실책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군대를 빌려 내 백성을 살육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민씨 척족 세력의 실정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115~116쪽)

일본이 전쟁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조선 정부로부터 “청군을 격퇴해 달라”라는 공문을 받아 이를 근거로 청군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 ‘청군 격퇴 의뢰 공문’을 보내라고 요구한다. 이 문제에 대해 조선 정부가 답변하기 곤란하도록 만들고, 답변 기간을 최대한 짧게 주며, 불만족스러운 회답을 하거나 답변하지 못하면 무력으로 협박해서 청군 격퇴 의뢰 공문을 받아낸다. (139쪽)

일본군이 궁중으로 쳐들어왔을 때 경복궁 수비는 평양 병력 500여 명이 시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좁은 문을 통해 고종이 있는 곳으로 간 오토리 공사는 고종을 위협해 조선 시위대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라는 뜻을 전하도록 했다. 고종이 시위대 병사에게 “모든 행동을 멈추라”라고 지시하자 조선 병사들은 통곡하며 총을 부수고 군복을 찢으며 도망갔다. (158쪽)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고종에게 “일본군은 무력을 사용해 조선 땅에서 청군을 쫓아내 달라”라고 청하는 공문을 요구했다. 고종이 이 공문을 수교할 경우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공격하는 데 따르는 국제법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어명에 의해 일본군은 불의한 청군을 조선에서 축출하는 ‘정의로운 군대’로 선포됐으므로, 조선 정부는 ‘정의로운 군대’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 편의 시설, 보급, 교통수단 등의 제공에 협력할 의무가 발생한다. (163쪽)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서 선전 포고에 앞서 기습적 선제 공격으로 상대방 급소를 강타한 후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관행처럼 반복했다. 덕분에 일본은 기습 선제 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비겁한 국가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175쪽)

7월 26일 오후 10시가 돼서야 인마 징발에 관한 ‘총리아문 문서’가 혼성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수원 일대 주민들은 일본군 징발을 피하기 위해 우마를 끌고 시골로 도주했다. 각지에서 봉기한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 납치 살해, 군용 전신선 절단, 보급 기지이자 인부 징발의 거점인 병참부 습격 등 반일 투쟁을 벌였다. (185쪽)

이때 중국 상인들이 성환에서의 패전 소식을 모르고 식료품 등을 가득 싣고 백석포로 입항하다가 일본 종군 기자 일행과 마주쳤다. 그들은 중국 상인을 무참하게 학살한 후 짐을 모두 몰수했다. 기자들의 중국 상인 학살 사건은 인천의 일본 영사관 서기생 아마노 교타로가 외무성 통상국장 하라 다카시에게 보낸 보고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89쪽)

백성들과 일부 관료들은 여러 형식으로 일본군에 저항했다. 제5사단은 서울로 진군하는 도중에 징발과 노역에 저항하는 조선 백성들과 충돌해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부 라인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조령 일대에 “일본군에 편의를 제공하는 관리는 모두 참살해야 한다” “일본인의 화물 운반에 고용되는 사람은 살해하겠다”라는 격문을 붙였다. (260쪽)

9월 14일 밤, 청군 진영에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무슨 까닭인지 총사령관 예즈차오는 굳건한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보급의 어려움과 현지 지리에 어두운 점 등을 이유로 평양 전투는 승산이 없다면서 “평양성을 내주고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해 만주에서 결전을 벌이자”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적을 앞에 두고 부전퇴각론을 내세운 것이다. (267쪽)

청일전쟁 초기 일본의 목표는 조선 지배에 국한돼 있었다. 때문에 전쟁도 제한전 의미가 강했다. 일본은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 승리로 청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손쉽게 전쟁 목표를 달성했다. 일본이 전쟁을 종결하려 했다면 이때가 적기였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청국군의 모습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승리에 도취해 더 많은 전리품을 바라는 군부와 국민들의 열기를 막을 방법도 없었다. (287쪽)

현지 사령관들의 항명은 이토 총리가 개전 초부터 우려했던 군부의 예견된 돌출 행동이었다. 이토 총리는 현지 군 지휘부에 “일본군이 베이징으로 진입할 경우 일본은 청국이 아니라 서양 열강과 강화 조약을 협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토 총리의 경고를 무시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부상한 야마가타의 야망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은 천황뿐이었다. (311쪽)

조선의 개혁이 벽에 부딪치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을 비난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그는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며, 조선은 야만국으로서 문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국민”이라고 공격했다. 후쿠자와는 연약하고 염치없는 조선 국민을 지도해 문명 개혁을 실행하려면 협박 수단을 동원해야 하며, 국무의 실권을 일본이 쥐고 조선인은 집행만 맡도록 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7쪽)

일본군은 평화롭게 들꽃이나 꺾어가며 남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쓸고 지나간 충북 옥천은 온 마을이 동학 농민군이었던 곳이다. 옥천은 일본군 제3중대의 공격을 받아 “60리에 걸쳐 민가에는 사람이 없고, 수백 호가 불에 타 없어졌으며, 많은 사체가 노상에 버려져 개와 새들의 먹이가 되고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347쪽)

잘 훈련된 일본군이 먼 거리에서 동학 농민군을 저격하는 바람에 의병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특히 관군 본대에 배치된 크루프 야포, 개틀링 기관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개틀링 기관포는 1분에 3,000발을 발사할 수 있어 동학 농민군의 밀집 대형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40~50차례 반복 공격 과정에서 동학 농민군은 끔찍한 피해를 당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훈련된 근대식 군대가 훈련받지 못한 중세식 군대를 학살한 행위였다. (353쪽)

12월 27일 밤,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배신으로 밀고를 당해 유생 한신현이 이끄는 지방 민병에게 생포됐다. 체포 당시 전봉준은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전봉준과 함께 손화중·최경선·송두한·김덕명도 체포됐다. 전봉준 생포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신현에게는 금천 군수 직위가 제수됐고, 피노리 마을 사람들은 돈 1,000냥을 받았다. 밀고자 김경천은 세상의 눈총과 보복이 무서워 마을을 떠나 숨어 살았고, 피노리 지명은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357쪽)

저자소개

김용삼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저자 김용삼은 조선일보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을 역임했다. 1997년 황장엽 망명 사건 특종 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15년 저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획자들』로 전경련 시장경제대상을 공동수상했다. 현재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이승만학당 교사로 있다.

<주요 저서>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북앤피플)
『이승만의 네이션빌딩』(북앤피플)
『대한민국 건국의 기획자들』(백년동안)
『박정희 혁명 1·2』(지우출판)
『박정희의 옆얼굴』(기파랑)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 정신』(프리이코노미스쿨)
『김일성 신화의 진실』(북앤피플)
『김일성 진실을 말하다』(미래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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