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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세계를 넘어 :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원제 : Deux Core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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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두 개의 한국이 있다. 지난 세기 식민 통치를 겪은 한반도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둘로 나뉜다. 이후 우리는 서로 경계하도록 교육받았다. 분단이 고착화하던 60년대 남과 북에서 태어나 서로를 적대시하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 두 여성에게 서로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 막연한 선입견으로 서로를 두려워했던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이뤄낸 ‘작은 통일’이다. 서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무찔러야 할 대상을 ‘또 다른 한국’으로, 두려운 존재를 ‘그냥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이야기다. 가려진 세계에는 어떤 삶이 있고 왜 뛰쳐나와야만 했는지, 보이지 않던 존재를 드러내고 말하지 못한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한 연대의 기록이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시작한 책은 곳곳에 또 다른 연대와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평화는 남북 정상회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친밀한 공간에서, 소소한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출판사 서평

프랑스에서 선출간되어 유럽 각국에서 주목한 책
프랑스 ‘Bibliotheque Orange selection 2020’ 올해의 문학 작품

“남과 북 두 여성의 역사적인 만남의 기록이다. 이 책의 이슈는
남북 대립이나 가난, 불행, 독재가 아니라 사회문화를 섬세하게 기록한 데 있다.
이 책의 독창성은 두 주인공의 만남에 있다.”
_ Jean-Claude de Crescenzo (문학평론가·몽펠리에 대학 교수)

채세린은 박지현을 만난 뒤로 오랫동안 회피해 오던 질문을 마주했다. 평생 남한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또 다른 한국인을 발견한 것이다. 박지현도 마찬가지였다.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그냥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야 알았다. 평화는 남북 정상회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친밀한 공간에서, 소소한 대화로, 함께 보낸 역사와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만나서 대화하는 사이 둘은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었다. 이 책은 그 역사적인 순간의 기록이다.


저자에게 묻다

Q 공동 저자 중 한 분은 이야기로, 또 한 분은 글쓴이로 나오는데 박지현 님 스스로를 ‘발화 자’로 특정한 이유가 있나요?

(박지현)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지금도 가끔 시를 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 이야기를 직접 쓰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가 누군가의 객관적인 시선을 거쳐 기록되기를 원했습니다. 영국판 〈마리끌레르〉에 저를 인터뷰한 글을 실은 외국인 작가에게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엔 힘든 상황을 끄집어내기가 두려웠어요. 그냥 묻어두고 싶었지요. 더구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감정이 통하지 않았고 통역이 있어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세린 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린 시절 할머니에 대한 추억, 형제와 가족에 대한 애착, 부모에 대한 공경 등 공감하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몇 년간 소통하면서 다른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또렷이 잡아내 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통역 과정에서 놓치기 쉬운 제 삶의 진실을 그 어떤 평가나 오해 없이 담아내고 싶었으니까요. 그건 한국어로 대화 하는 사람끼리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북한 생활을 떠올리면 증오와 분노로 치닫는데, 세린 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낼 수 있었지요. 우리의 만남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두 한국의 시대적 기록이 되었습니다.

Q 자신의 이야기를 묻어두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결국 글로 남기게 된 또 다른 계기가 있는지요?

(박지현) 아들의 질문 때문입니다. 영국에 정착하고 4년 쯤 지난 어느 날 멘체스터 공원 벤치에서 아들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저를 버렸어요?” 하고. 아들은 주변 사람들이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했는데 진짜 숫자 백을 세고 나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며……. 당시엔 그저 울기만 하고 답을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러다 한 인권단체에서 다큐를 찍었는데 제 이름도 가명을 썼고 얼굴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진실로 이 일을 하고 싶으면 자기 이름도 얼굴도 내놓고 하라고,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 막아주겠다며 응원해 줘서 용기를 냈습니다. 인권 활동을 하면서 “통일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꼭 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책을 내게 된 강력한 동기입니다. 아들과 제가 왜 헤어졌고 어떻게 영국에 함께 있는 지, 책에 모두 풀어놓았습니다.

Q 저자 두 분 모두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인데 정작 한국에서 출간한 책은 번역서입니다. 어쩌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한국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는지요.

(채세린) 그건 제 글쓰기 언어 때문이에요. 저는 유년기부터 계속 프랑스어권 나라에 살았거든요. 집에선 한국어를, 바깥에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주로 외국어를 쓰며 자랐죠. 물론 그중에서 모국어인 한국어는 절대적이지만, 글을 쓸 때 제 머릿속 언어는 프랑스어예요. 이런 저의 배경을 듣고는 박지현 님이 프랑스어로 쓰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주었고요. 참 고마운 일이죠. 우린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어 특유의 독특한 감정을 프랑스어로 세심하게 표현할 수 있었어요. 지현 님은 프랑스어를 모르니까 쓰면서 일부분씩 영역본으로 확인받고 수정하면서 의견을 교환하는, 그런 과정을 거쳤어요. 우리 둘 다 아주 만족해요.

Q 그래서 프랑스 출판사에서 먼저 나온 거군요. 두 분 다 첫 작품이고 프랑스어로 썼지만 다른 나라 이야긴데, 출판사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채세린) 작업을 하면서 글 일부를 평소 눈여겨 본 프랑스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놀랍게도 역사가 오래된 꽤 큰 출판사인데 대표에게서 회신이 왔어요. 프랑스에선 완성된 원고를 보내도 출판 계약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현실인데 이례적이죠. 이렇게 출간으로 수월하게 이어진 이유는 프랑스인들이 한반도 상황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 사람들은 특정 이슈에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있거든요. 이 주제가 눈에 띈 거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잖아요. 게다가 북한과 남한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함께 한 작업이라는 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더군요. 저희 둘 다 60년대에 태어났고 분단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바른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거든요. 제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년을 한국에서 다녔는데 북한은 나쁘고 무서운 나라로 인식했어요, 지현 님 역시 남한을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만 교육받았죠. 그 탓에 처음엔 서로를 경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5년 가까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를 나눴던 그 지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죠. 서로의 목소리를 반사하며 정리한 지점이 바로 프랑스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인 이유죠.

Q 이 책이 기존 탈북자가 쓴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채세린) 유럽에는 북한 관련 책이 많아요. 탈북민이 쓴 책도 있고요. 최근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프랑스 사이트에서 한 문학 평론가가 리뷰를 올렸는데 요약하면 이래요.
“남과 북 두 여성의 역사적인 만남의 기록이다. 이 책의 이슈는 남북 대립이나 가난, 불행, 독재가 아니라 사회문화를 섬세하게 기록한 작품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두 주인공의 만남에 있다.”
딱 이거예요. 이 책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에요. 인간에 대한 책이죠. 우리 둘이 서로 신뢰하면서 맺은 우정과 연대, 평화를 말하는 책이거든요. 유럽에는 탈북민이 쓴 책이 꽤 있는데 그들의 책은 대체로 북한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 북한은 지옥이다, 공산당은 나쁘다고 토해내는 등 일부 과장되거나 선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죠.
이 책은 달라요. 김일성 · 김정일 시대를 거친 한 여성의 일상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을 담은 이야기를 다른 한 사람이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기록물이거든요. 제가 알기론 그 시절을 겪은 평범한 북한 사람의 일상을 기록한 책은 없어요.
체제 반대편 사람인 제가 쓰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했어요. 게다가 동시대에 태어난 제 자신의 생애 경험과 교차시키며 두 한국의 교육제도와 사회문화를 서술해 나가면서, 분단 상황이 개개인의 관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었죠. 우리 둘의 문제가 곧 남과 북의 문제이고 나아가 세계 평화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기존에 나온 고발서류 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Q 출간 후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그곳 독자들과는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나요?

(채세린) 출간 후 유럽 유수의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어요. 심지어 영문판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북페어를 통해 알려져서인지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도 초대받았죠. 그들은 평화나 통일에 관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민간인 차원에서 교류하면서 평화롭게 지낸다는 데 관심과 의미를 두더군요. 그러고는 “우리는 뭘 해야 도움이 될까.” 하고 진지하게 물어봐 주었고요. 강연 때마다 경청하는 청중들 모습은 집필 때의 괴로음을 싹 씻어주면서 보람으로 채워주었죠.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시국에 접어들기 직전, 벨기에 브뤼셀 북페어(2020 Foire du Livre book fair)에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대표주자로 초대받아 주목받았고요. 그때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와 나란히 초대되었죠. (한국이 코로나 시국에 접어들었을 때라 조남주 작가는 참석하지 못함) 청중들은 이 책이 인간에 대한, 평화에 대한 더없이 감동적인 책이라며 공감과 지지의 말을 보내주었어요.
파리의 한 대학에서 한국 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과는 온라인으로 만났는데 저는 프랑스어를, 지현 님은 영어를, 학생들은 한국어를 썼어요. 여러 언어와 문화가 어우러진 모습에 눈물이 핑 돌더군요. 글을 통해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순간이었죠. 원서는 프랑스 ‘Bibliotheque Orange selection 2020’ (파리 공립 도서관에서 선정하는 문학 작품)에 뽑힐 만큼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습니다.

Q 채세린 작가님 해 온 일이 흥미로워요.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프랑스 문학 박사과정 후 콜롬비아비즈니스스쿨에서 MBA를 거쳐 자산 관리 전문가로 경력을 쌓았는데요. 문학을 전공하고 전혀 다른 분야로 뛰어들었다니 무척 흥미로워요.

(채세린) 프랑스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뉴욕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건, 그쪽에서 프랑스어 강사 제안이 있었고 새로운 곳에 도전하는 의미도 있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박사 논문을 앞두고 있는데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도서관에서 씨름하는 제 모습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박사학위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죠. 자극을 받아서인지 그 세계가 되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뛰어들었는데 회사에선 오히려 제가 문학 전공자이니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넘칠 거라는 기대로 뽑았다고 해요. 10년 넘게 그 세계에서 일하다 영국으로 와서 박지현 님을 만나 작가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어요, 이 일로 우리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이기도 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게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Q 출간 후 가장 보람 있던 일 한 가지를 말씀해 주세요.

(박지현) 북한에도 사랑이 있고 정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북한 사람도 그냥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배고프고 불쌍한 정치적 꼭두각시가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매일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독자 리뷰 중에 “아픔을 보여준 책인데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읽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북한 사람은 초라하지만은 않으니까요. 머지않아 남한 사람 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한국인으로 불리게 될 그날이 올 것입니다.

추천사

박혜진(『82년생 김지영』 편집자 ? 문학평론가)
북에서 온 박지현과 남에서 온 채세린.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국어’를 쓴다는 것과 ‘여성’이라는 점이다.
한국어와 여성이라는 공통어는 그들이 매개자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준다.
두 사람의 대화가 우정과 연대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책은 한 여성의 가려진 삶을 또 한 여성이 자신의 삶과 교차하며 완성해 낸 기록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두 사람의 기록에 동참할 때,
이들이 도모한 기록은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라는 궁극의 여정을.

플뢰르 펠르랭 Fleur Pellerin(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 벤처 투자가)
독재를 경험한 지현, 지현을 만나 또 다른 한국을 인식하게 된 세린
극과 극에 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반사해주는 거울 역할을 하면서
인권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다. 공통된 미래를 향한 희망과 화해의 가능성을 그려낸다.
많은 분이 읽기를 권한다.

목차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첫째 장 밤나무 집
둘째 장 잠자리
셋째 장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

마음이 통하는 사람

넷째 장 열세 살 아이에게 인생은
다섯째 장 도망자 그리고 달걀 50알
여섯째 장 낮말은 새가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일곱째 장 창백한 얼굴, 마지막 만찬
여덟째 장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

아버지에게

아홉째 장 배신
열째 장 노예 생활
열한째 장 가장 잔인한 달 4월
열두째 장 아들과의 재회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옮긴이가 읽는 이에게

본문중에서

나는 지현의 시선으로 그 내면세계에 접근했다. 나는 지현이 되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우리가 겪은 어린 시절의 행복, 고통, 죽음은 다를 바 없었다. 남과 북에서 각자 살아온 삶을 연결하며 분단으로 비틀린 궤적을 바로 잡고 싶다.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가 지현이고 누가 나일까? 지현의 이야기는 어쩌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글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신뢰를 쌓고 평화의 꿈을 키우던 중에 태어났다. 한반도 이야기인 동시에 서로 마음을 연 이야기이다. 지현과 나는 더 큰 자유를 선택했다. 이 책은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두 목소리, 두 자아가 만나 하나의 정체성으로 되살아난다. 하나의 한국, 한국인의 이야기다.
_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중에서

날이 갈수록 할머니와 정이 들었다. 겉보기와 달리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들은 만큼 무섭지 않았다. 숨바꼭질도 같이 하고 나를 배불리 먹이며 너그럽고 다정하게 대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방에서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주었다. 전구보다 초를 주로 쓰던 할머니는 촛불 아래서 해와 달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마을에 사는 또래 아이들은 모두 탁아소에 다녔지만 할머니는 나를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봐주었다. 나는 매일 막대기나 돌멩이, 닭 떼를 친구 삼아 놀았다. 하루는 지나가는 뱀을 막대기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라남에 살 때는 막대기로 미국놈과 남한 사람들을 때려잡는 놀이를 했는데. 그때나 이때나 내 능력에 우쭐했다.
_ 첫째 장 「밤나무 집」 중에서」 중에서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곳이라 했는데…… 어린 시절 나는 행복하다고 믿었지만 그렇게 배워서인지 정말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나의 행복은 이미 처방되어 있었고 복용할 약은 가족과 학교에서의 집단생활 그리고 낙관주의였다. 복용량은? 매일 낮 열두 시간 밤 열두 시간.
사실 우리는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느라 자기 삶을 생각하거나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매시간 매분 무언가를 배워야 했다. 밤에 잠들 때조차 어서 빨리 일어나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조건 덕에 행복할 수 있었던 걸까
_ 셋째 장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 중에서」 중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현의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나는 두 시간 가량 열성적으로 받아 적으며 어린 소녀 지현이 보낸 일상은 어땠는지 자세히 들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지현에게는 힘든 일일 수 있다. 어릴 때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기억하기 어려워 그저 윗옷은 흰색, 아래는 검은색이었다고만 말한다. 놀라운 일이다. 지현의 기억은 모두 흑백이다. 나는 수첩에 이렇게 메모하고 옆에 별표를 단다. 중요.
우리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지현이 하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확 와닿는다. 한 마디 한 문장 다 들리고 느껴진다. 나와 너무 다르면서도 너무 친숙한 이 여성이 한때 경계선 반대편, 세계가 외면한 나라이자 내가 지옥이라 여기던 그곳에 살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_ 「마음이 통하는 사람」 중에서

“한 사람에 열 개씩.”
어머니가 침착하게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걀을 향해 달려들었다. 배가 너무 고팠던 우리는 잡혀가는 위험도 감수할 수 있었다. 마치 신성한 의식에라도 참여하는 듯, 작은 소리에 맛이 달아나기라도 할 듯 모두 침묵을 지키며 달걀을 먹었다. 새 달걀 껍데기를 깔 때마다 언니와 나, 정호는 기쁨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아버지는 소리 내지 말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이웃집 장 씨 아줌마가 엿듣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_ 다섯째 장 「도망자 그리고 달걀 50알」 중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또렷이 기억나는 건
여덟 살 때 아버지가 해님 달님 이야기를 들려주던 날이에요.
옛날 옛적에 별도 아직 없던 시절에
해님과 달님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려주는 이야기였죠.
그 포근한 공기 속에서 아버지는 저와 장기를 두고
언니와 정호는 숨바꼭질을 했어요.
그 순간만큼은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어요
_ 「아버지에게」 중에서

철아, 힘내. 엄마 손 잡아. 겁낼 것 없어. 이제 200미터만 더 가면 돼. 저기 철조망 보이지? 그 바로 너머가 몽골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뛰지 않고 그냥 걸어가도 돼. 다 잘될 거야. 믿지?
지옥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일까 아니면 살아남는 길일까? 이미 뛰어들었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목숨을 지키는 데 제일 중요한 200미터를 모두가 전력 질주하는 동안 다섯 살 철이와 다리를 저는 나는 꾸준히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내 손을 잡은 아이의 손은 차가웠지만 두려워하던 눈빛은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_ 열두째 장 「아들과의 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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