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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 : 환경운동가 김석봉의 지리산 산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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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석봉
  • 출판사 : 씽크스마트
  • 발행 : 2020년 06월 30일
  • 쪽수 : 352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6529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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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산, 흙, 생명과 사람의 향기
    지리산 귀농일기


    1987년, 진주교도소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환경운동가가 있었다. 짐 자전거 뒷좌석에 어린 아들을 태운 채 ‘타는 목마름으로’를 목이 터져라 불렀던 그. 어느 날 지리산에서 낡은 빈집 한 채를 만났다. 집주인이 빚에 쫓겨 야반도주를 했다던 집. 마루가 다 썩어 내려앉았고, 마당엔 덩굴만이 우거져 있고, 유리창은 깨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집. 고개를 돌리는데 지리산이 성큼, 그의 눈 속으로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걸 본 순간 그는 결심했다. 이 집에 자리 잡고 살겠노라고.

    그리고 그, 김석봉은 벌써 13년째 지리산에서 살고 있다. 음식 공부를 하는 아내와 서울의 회사생활을 접고 내려온 아들, 그리고 민박 손님으로 만나 연을 맺은 며느리와 그 사이 태어난 손녀까지 오순도순 다섯 식구와 함께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근처 유정란 농장에서 받아온 닭 열 마리,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바둑이와 고미, 행운이, 꽃분이, 거위 덤벙이와 새데기, 마당에서 돌보는 길냥이들 예삐와 회색이, 코점이, 아롱이와 다롱이, 까망이와 막둥이 등……. 여러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지내는 지리산의 생활은 느긋할 것 같으면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바쁜가 하면 또 잠시 일손을 놓고 숨 돌릴 틈이 문득문득 찾아오기도 한다.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은 제목 그대로 소박한 지리산 농부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풍작을 이룬 고구마로 물물교환을 하여 생필품을 잔뜩 장만한 이야기, 도무지 이득이 나지 않는 쌀농사를 포기한 이야기, 두 이웃과 함께 다래 순을 따러 가서 점심을 나눠먹은 이야기, 철창에 갇힌 강아지를 구출하여 맘씨 좋은 이웃에게 보내준 이야기 등……. 물 좋고 공기 좋은 지리산 아래서 살아가는 일상을 진솔한 마음을 그득그득 담아 기록한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이, 현대인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 서평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귀농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저자 김석봉은 이렇게 답한다. 얻은 것은 사람과 시간이라고. 그동안 자신은 사람을 한길로 걸어가는 ‘동지’, 그 길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남’, 그리고 우리에게 저항하는 ‘적’으로 나눠서 보고 있었다고. 늘 ‘동지’와 함께 있고자 했으며 ‘적’에게는 항상 대척점에 서 있으려 했고 ‘남’의 존재는 잊고 살았다고. 그동안, 자신의 세상은 무정했노라고.

    내가 해낼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일구며 산다는 것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산골 농부로 살면서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갑자기 찾아와 정든 이야기를 하룻밤 나누고 돌아가는 단골손님, 올 때마다 선물을 그득히 안고 친정집 방문하듯 한 해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가족손님, 편치 않은 몸이지만 마을 이웃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몇 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가는 이웃 주민들…….
    전부 지리산으로 내려와 살기로 결심했을 때는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기에 그는 큰 욕심을 내려 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조금 더 풍족한 생활을 꿈꾸며 전복양식장에 나가볼까, 고추농사를 좀 더 늘려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나마 하지만, 결국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새롭게 만난 모든 생명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그것뿐.

    소슬히 내리는 장맛비를 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뽐낼 것 없는 삶이었으나 숨길 것 없는 삶이었으니 더 가벼워지는 것 같다고. 지금 이 순간이, 좋은 날이라고.

    추천사

    애틋한 마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는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환경, 풋풋한 흙내음, 순박한 농심(農心)과 애환을 담고 있다. 생생한 묘사는 마치 작은 창문으로 산촌풍경을 내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소소한 이야기가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애틋한 마음, 따뜻한 인간애가 묻어나는 산촌 이야기는 김석봉 님의 자연관과 사람 대하는 방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독자들이 농부 김석봉 님의 건강한 미소, 그리고 생명의 기운을 한 아름 선물 받아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길 소망한다.
    - 박종훈 / 17대 경상남도 교육감

    가끔 뒷모습이 울적해 보이는 농부
    그이는 모든 생물에 한없이 애정이 넘치는 분이다. 하지만 그 생물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유기적 흐름과 규칙엔 약자를 위한 공평무사함이 있는, 철저한 투쟁가이기도 하다.
    이제 이순(耳順)의 여유와 관조로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을 세상에 던져놓은 그이의 삶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란다.
    - 연규현 / 화가

    어느 자리에 있든 그는 늘 농사꾼
    가끔 들리는 소식이 참 반가웠다. 아내와 아들 내외와 손녀 서하, 그리고 수십 마리 고양이, 개, 닭, 거위와 함께하며 그는 산골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다시, 30년 전 바로 그 얼굴이다.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내가 설레는 이유다.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석봉이 형’은 커다란 짐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어린 아들을 뒤에 태운 채 집회 현장에 가거나, 노동자 신문을 싣고 진주 상평공단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 권영란 / <단디뉴스> 창간대표, 칼럼니스트

    더 나은 삶의 여정을 안내하는 듯
    귀농 이후에도 어느새 이렇게 좋은 글을 써왔다니 고마운 일이다. 몸으로 체험한 산골이야기는 그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면서 더 나은 삶의 여정을 안내하는 듯하다. 어느 한가한 날 조용한 나무그늘 아래서 읽으면 마음을 촉촉이 적셔줄 것 같다.
    원고를 읽노라니 요리연구가인 그이의 아내가 빚어주던 잘 익은 과하주 맛이 생각난다. 어느 좋은 날 그 술 한 잔 찾아 가야겠다.
    - 장승환 / 진주 동산한의원 원장

    마음 속 한 구석 군불을 넣은 것처럼
    산골에서의 삶이 진솔하게 담긴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 속 한 구석 군불을 넣은 것처럼 따스한 느낌이다. 이 세상 소풍 나온 우리 인생, ‘참 잘 사는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들었다.
    나도 살아가며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그저 건강하게 가족과 이웃들과 소박한 음식이라도 나누면서 살면 족한 것 아닌가 하면서도, 그런 일상을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살아가는 일이, 참 애틋하고 귀하다.
    - 조은미 /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사무국장

    행운이와 함께 만난 인연
    진솔한 이야기만이 공감할 수 있다. 수많은 경험 후에 써내려가는 글이 자기 고유의 글이 된다는 걸 나는 안다. 그간 페이스북을 통해서 만난 김석봉 선생의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은 산골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다. 불타는 젊은날 환경운동가로 활동했던 선생이 괭이 한 자루로 그 넓은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의 이야기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의지대로 살아가기 쉽지 않은 요즘, 선생의 정갈한 삶과 글은 깊은 감동을 준다.
    - 김남수 / 전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운동가, 석봉 선배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에서 선배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운동가이며 어리숙한 농부다. 이웃의 불편함을 살피는 따뜻한 시선이 있고, 뭇 생명들과 교감하는 애정이 있다. 농사일에 지치고 결과가 외면당할 때는 처절한 패배감과 울분도 숨기지 않는다.
    살아가다 길을 잃게 된 경험이 드물지 않다. 살다 낭패한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을 때면 꼭 선배의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그 속에는 실패가 있고 두려움도 있지만 위로받는 법도, 더불어 사는 법도, 휴식도 가득하다.
    - 박미경 /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고향이 멀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나무처럼
    멀리서도 이제 고향이 멀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마을의 나무처럼 그의 그늘엔 따뜻함과 힘이 있다. 민박집 ‘꽃별길새’에 깃들다 가는 동안 그가 쓴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돌이켜보니 다 태풍 덕이다. 당신에게 이 책이 그런 태풍이 되어줄 거란 예감이 든다. 찻잔 속에 든 태풍이 때론 얼마나 위험한지 어렴풋 짐작하기에,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작은 마당에서 당신과 청귤청 모히토 한 잔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
    - 최진 / 시인

    목차

    추천사
    들어가며 괭이를 장만할 때의 그 두근거림으로
    여는 일기 산촌에서의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제1장 밭이랑에 묻어보는 허튼 인생
    살랑살랑 봄바람 속 밭을 일구다
    전복양식장의 유혹
    찌릿찌릿 아린 손가락을 주무르면서
    애꿎은 마음에 비는 내리고
    기적을 부른 고구마 혁명
    마침내 고추농사로 돈맛을 보다
    쌀농사를 버리며
    결혼기념일에 날품을 팔러 나가버렸다
    내 밭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제2장 가까이 산다고 이웃은 아니건만
    무엇이 김장김치의 맛을 만드는가
    겨울, 경로당 가는 길은 좀 녹았으려나
    하나둘 떠나는 이웃들
    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폼 나게 살고 싶었던 내 꿈은
    봄날, 다래 순을 따다
    살아갈수록 미워해야 할 사람이 늘었다
    김 씨를 만나러 요양원 가는 길

    제3장 아내는 또 찹쌀을 담갔다
    서로를 보배롭게 여기면서
    새 주방가구를 장만하면서
    아내는 또 찹쌀을 담갔다
    쓸쓸한 외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외갓집처럼 친정집처럼 그렇게
    봄바람 맞으며 봄 소풍 갈거나
    무심한 지아비, 무심한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장가 잘 든 사람
    시아비의 품격이란 무엇일까
    요즘에 시는 좀 쓰나

    제4장 새가 되어 날아간 바둑이
    이렇게 하루를 또 보내었다
    꽃분이가 사라졌다
    수탉이 우는 새벽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꽃이 피는 이유
    저 생명들에 마음을 열어보시라
    고구마밭에 남몰래 숨겨둔 애환
    그들의 거룩하고 따뜻한 마음

    제5장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간에
    다시, 기차여행을 꿈꾸다
    이 가련한 일중독자야
    버려진 전등 앞에 서서
    좁쌀 한 톨에 담긴 피 땀 눈물, 그리고 사랑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간에
    그동안 나의 세상은 무정했네
    나이와 함께 몸도 저물기 시작했다
    다시 새 봄을 기다리며
    나는 언제나 고향이 그립다
    숨길 것 없는 가벼운 삶

    대신 맺는 말 고향이 멀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나무처럼

    본문중에서

    “글쎄요. 잃은 거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고, 얻은 것은 사람과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동지거나 상대방이거나 남으로 구분되는데 그렇게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지요. 시간도 마찬가지지요. 나만의 시간, 내가 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거. 나에게 주어진 지간을 내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쓸 수 있다는 거. 하루 스물네 시간이 다 내 것이라는 거. 따지고 보면 그동안 생각조차 못했던 아주 소중한 것들을 얻은 셈이죠.”

    그랬다. 나는 비로소 사람과 시간을 얻었다. 환경운동이 비록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동지거나 대척점에 선 상대편이거나 전혀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이해관계가 없는 상태이면서 남도 아닌,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시에서 살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을 위한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는 생활이었다. 시간에 맞춰 맡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 p.28)

    올해도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나흘 기차여행을 하려던 계획은 이월 말에서 삼월 초로 미루어졌고, 다시 삼월 말로 미루어졌고, 사월 중으로 미루었건만. 이처럼 농사가 시작됐으니 엄두를 내기 어려울 것이고, 게다가 드문드문 민박 예약도 잡혀 있어 마땅히 빈 일정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 흔한 봄나들이 한번 못한 채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겠지. 마당 여기저기서 피는 꽃들의 잔치를 보며 봄내음이라도 맡으련만 화무십일홍이라 매화도 앵두꽃도 배꽃도 살구꽃도 복사꽃도 한 줄기 봄비에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져버리는구나.
    하늘하늘 날갯짓으로 다가오던 나비도, 닝닝거리며 꽃가지 사이를 날던 벌떼도 지는 꽃잎 따라 떠나버리고 허심한 봄 가랑비만 스렁스렁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구나.
    저 산 너머엔 천천히 흐르는 넓은 강과, 한때 옛 친구가 잠시 머물렀다는 강마을이 있고, 강 끝자락으로 흘러 내려가면 하루 서너 대 보급열차가 서는 조그만 기차역이 있다고 하는데 아, 이 봄에 나는 저 산을 넘어가 보지도 못하는구나. 기차를 타고 동해 바다까지 나가보려던 꿈을 앵두나무 꽃그늘 아래 묻고 말았네.
    (/ p.54)

    그러나 술을 마셔야 할 일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생겼다. 마을 안에 살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웃과 만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저런 일로 이웃을 찾아가면 술병을 내놓는 것이 버릇이요 관례였다.
    “안 돼, 안 돼. 나 오늘 술 못 마셔.”
    손목을 뿌리치지만 무엇에 홀린 것처럼 손목에 힘이 전해지지가 않았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가 속이 상해 죽겠는데.”
    “앗따, 속상한 거는 그쪽 사정이고.”
    시끄러비아지매는 속사포 같은 말투로 농협 퇴비를 내리다 이웃 노샌댁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내질렀고, 나는 슬그머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시끄러비아지매를 편들어야 했고, 언제 채웠는지 내 술잔엔 술이 넘치도록 찰랑거렸고, 부딪치는 술잔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그렇게 메마른 김부각을 씹으며 두어 병의 술을 비웠다.
    (/ p.120)

    “사랑해.”
    언젠가 불쑥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연분홍 복사꽃과 새하얀 배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진주 비봉산 언덕길을 산책하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샛노란 장다리꽃 너머로 팔랑팔랑 흰나비 한 마리 날고 있었을 법한 봄날이었을 것이다.
    “별스럽네. 그런 말을 다 하고.”
    아내가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나는 ‘정말이야’라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 말마저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다들 그렇게 말을 해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 p.208)

    고라니는 왼쪽 목에서 오른쪽 겨드랑이가 올무에 걸린 채 반쯤은 드러누워 있었다. 비탈진 잡목 숲을 기어올랐다. 아들녀석이 고라니에게 다가가 머리를 부대에 씌웠다. 고라니는 앞이 보이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나는 연장으로 철사를 끊었다. 철사는 질겼다. 이리 비틀고 저리 꺾으며 몇 번을 흔들어서야 철사가 끊겼다. 가만히 고라니를 안고 비탈을 내려서 편평한 곳에 내려놓고 부대를 벗겼다. 순간 고라니는 어리둥절 고개를 몇 번인가 주억거리더니 위쪽 빈 밭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난생 처음 야생동물을 품에 안아본 순간이었다.
    (/ p.250)

    나는 안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내 삶에 찾아온 아름다운 사람들과 모여 앉아 수박을 쪼개고, 수박의 벌건 속살을 마주했을 때가 내 삶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수박의 맛과 향에 감격하는 동안 내 삶의 꼬투리에도 새로운 꽃송이가 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안다. 모든 것을 남겨두고 문득 이 산골로 스며들려 했을 때의 헐벗은 듯한 느낌이 이제부터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걸어가는 내 삶의 발걸음이 더 이상 낯선 미로를 좇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왔던 곳으로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 p.313)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57년 경남 하동 옥종 농가에서 태어났다.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 교도관으로 유월항쟁을 맞이하였고, 1987년 진주교도소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공동의장을 거쳐 200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녹색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012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경남 함양군 지리산 기슭으로 귀농하여 적지 않은 농사를 일구고 있다. 아내와 아들내외와 손녀까지 3대 다섯 식구가 모여 산다.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틈틈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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