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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 : 전두환과 5공 잔혹사,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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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학살자 전두환,
    한국의 민주주의를 또다시 잔인하게 짓밟다

    삼청교육대, 영장 없이 6만여 명 체포,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악법 제조 기구 입법회의 앞세워 정치도, 언론도, 노동도 입맛대로 개악

    또다시 군홧발에 짓밟힌 한국의 민주주의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마땅히 민주화로 나아갔어야 했지만, 전두환‧신군부 세력에 의해 발목을 잡혔고, 1987년 6월항쟁이 있기까지 8년이나 더 군홧발에 짓눌려야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17권은 10‧26 이후부터 1980년대 전반기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살피고 있다. 특히 16권 ‘광주항쟁, 한국 사회를 뒤흔든 시민 항쟁’ 편은 광주항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광주항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광주항쟁이 한국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극우 세력의 광주항쟁에 대한 폄훼가 왜 망발에 불과한지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제시하고 있다. 특히 10‧26에서 광주항쟁까지의 역사를 자세히 되짚으면서 전두환‧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는지,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을 자행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전두환 일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과정과 자신들의 ‘위력 과시’를 위해 시민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가 자세히 드러나 있다.
    17권 ‘전두환과 5공 잔혹사,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르다’ 편에는 삼청교육대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녹화 사업 강행, 5공화국의 등장 등 1980년대 전반기 한국 현대사를 살피고 있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은 버젓이 인권 유린을 저지르며 권력을 쟁취했는데, 그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박정희가 죽고 한국의 민주주의에 희망이 엿보이던 찰라, 또다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신군부 세력.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17권에는 군홧발에 억눌린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역사도 담겨 있다.

    용의주도한 전두환 일당, 쿠데타를 일으키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우선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10‧26 이후 행적을 살펴야 한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자 일찍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한 12‧12쿠데타를 일으킨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 정승화를 비롯한 군 상층부의 무능력, 미국의 방관, 일본의 지원 등으로 쿠데타는 결국 성공하고 만다. 전두환 일당은 쿠데타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게 됐다.
    12‧12쿠데타가 성공하자 보안사는 1980년 2월부터 전두환 권력을 만들기 위해 K-공작(K는 ‘King’의 약자)을 실시했다. K-공작은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한 작전이다. 보안사가 언론사 간부들을 접촉해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안 된다’, ‘3김은 안 된다. 사회 안정을 위해 군부가 집권해야 한다’ 등의 취지의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했다. 곧 전두환‧신군부가 한국을 이끌 세력, 안전 구축 세력으로 퍼뜨리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보안사에 이어 또 하나의 정보 기관을 손에 움켜쥐게 된다.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것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이로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2월 29일 대규모 사면 복권 이후, 더 넓게는 1980년 초 정치인들의 신년사가 나오고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될 무렵부터 5·17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으니 한국 사회가 이제는 민주화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가 이 단어 속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신군부 세력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권이 단결하고 최규하 쪽과도 연결하면서 국회를 활용해 계엄을 해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때에도 서로 각자 대권 행보를 하며 분열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결국 5‧17쿠데타가 성공하자 김대중은 ‘소요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고, 김영삼 또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학생 운동 세력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병영 집체 훈련 거부 등 민주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전두환‧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 쟁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 각계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북항쟁이다. 이 항쟁은 단순히 노조 집행부와 그 반대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그간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에서 누적된 불만, 분노가 노조 문제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되자 대규모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된다.

    신군부가 서울역 시위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1980년 5월 13일 밤 학생회장단이 모여 토론한 끝에 교문을 박차고 거리에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대로 각 대학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인다. 14일에도 서울 시내 21개 대학에서 약 7만 명이, 지방 11개 대학에서 약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15일에는 최고 7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신군부는 충분히 이 시위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왜 막지 않았을까? 광주에서처럼 시민들이 이 시위에 대거 호응하면 신군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았을까? 그 이전부터 진압군 투입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신군부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미리 용의주도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이런 계획을 짜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학생과 시민들이 큰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비해 군을 미리 움직여 서울과 전국 주요 지역에 배치해놓았다. 이러한 조치는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크게 확대되는 것에 대비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 학생 시위가 커지면서 상황이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걸 빙자해 5월 17일 쿠데타 이후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민주화를 완전히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굉장히 많은 학생, 시민이 봉기할 수 있다. 그런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 그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5‧17쿠데타 이후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 일당은 그 병력의 상당 부분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광주를 아주 단단히 진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일본은 왜 5‧17쿠데타를 도왔나?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은 미국에는 절대적으로 보안을 취하면서도 일본에는 12·12쿠데타 계획을 알려주는 등 일본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이후 일본 측은 소련의 북한 남침 사주설을 포함해 북한의 남침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6번이나 전두환 일당에게 ‘자료’를 내주었다. 더군다나 일본 내각조사실은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며 날짜까지 콕 집어서 신군부에게 첩보를 건넸다. 그러나 이 첩보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전두환‧신군부는 이 남침설과 학생 시위를 구실 삼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게 되는 국보위가 설치된다. 이것이 곧 5‧17쿠데타이다.
    일본이 이토록 전두환‧신군부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 우익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으로 이 세력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일본의 지원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두환 일당은 왜 제2쿠데타 날짜를 5월 17일로 정했나?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이에 전두환 일당은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 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일당은 또 하나의 쿠데타를 계획하며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한다. 이 시국 수습 방안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였고, 둘째는 국회 해산, 셋째는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였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군인들이 전권을 가지고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유신 헌법조차 짓밟으면서 강권,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겠다는 음모였다. 그와 함께 시국 수습 방안에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 규제 방안 등도 들어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의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인 5월 20일 이후 이 시국 수습 방안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는 17일로 쿠데타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렇게 한 데에는 5월 20일 임시 국회가 소집되고,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대학생들이 다시 대규모 데모를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이로써 전두환 일당은 1979년에 12·12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1980년에 다시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광주항쟁, 왜 일어났나?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5월 14~16일 민주 성회 때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고 약속한 대로 교문으로 온 학생들이 많았다. ‘계엄 해제’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정문 앞에서 해산당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수백 명 단위로 비상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학생 시위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고, 경찰력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것이다. 게다가 서울 동국대에 있던 11공수여단까지 광주로 이동시켰고, 여기에 더해 3공수여단도 광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후 공수 부대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른다. 그걸 본 광주 시민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격렬하게 항의를 한다. 이제 시위는 학생에서 시민들로 확대되었다. 공수 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공수 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단순한 학생 시위가 공수 부대의 만행으로 항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공수 부대는 왜 광주 시민에게 폭력을 휘둘렀나?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5‧17쿠데타로 비상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뒤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 지역 등에 이미 진압 부대를 투입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군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강경한 응징 조치를 하겠다고 정해놓고 있었다. 초동 단계부터 강경 진압 등 ‘위력 과시’를 해 시위 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서울에서는 시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그쪽을 철저히, 과감히 타격하자. 상대방이 다시는 시위를 일으킬 수 없도록 끝까지 추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히자’,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세력)들은 이렇게 당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도 시위를 막을 수 있는데도 7공수여단을 시내 한복판으로 보낸 것이고, 그에 더해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 병력까지 광주로 급히 보내고 곧이어 3공수여단 병력을 또 보낸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는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다. 그 때문에도 광주를 더 무자비하게, 위력적으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수 부대가 만든 생지옥, 심지어 성폭행까지…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다


    19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건물 안으로 도망가는 시위 군중을 추적해 끄집어내어 길가에서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겼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겁에 질린 여자들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팍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했다.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본 광주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오후 들어 수만 명의 민중이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19일부터 본격적으로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왜 시민들은 성난 민중으로 변해 그 무섭고 무자비한 공수 부대와 적극적으로 맞붙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공수 부대의 만행,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만행에 분노해 그야말로 피가 끓는 시민들이 궐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부끄러움’의 정서다. 18일 공수 부대의 만행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 시민들을 자꾸 싸우게 했고, 그것이 항쟁으로 바뀌는 추동력이 되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대학살, 21일 애국가와 함께 울린 총성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21일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진 발포로 최소한 54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정됐다. 21일 3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보급을 받은 실탄은 M16 소총탄 123만 발, 살상력이 큰 40mm 고폭 유탄 316발, 한꺼번에 여러 명을 해칠 수 있는 세열 수류탄 4,880발이었다. 이 중 48만 4,484발이 실제로 사용됐는데, 공수 부대원 1인당 142발을 쏜 셈이다. 광주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인 대학살이었다. 심지어 이날 오후에는 헬기 기관총 소사까지 있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광주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경악할 만한 사태가 벌어지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도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여러 지역으로 갔다. 일부 시위대는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화순 탄광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을 입수했고 나주경찰서 무기고와 여러 파출소에서 M1 소총, 카빈 소총, 실탄을 가져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장성, 담양, 영광, 보성, 무안, 영암, 함평, 강진, 해남, 완도, 곡성, 구례 등 전남 각 지역으로 가서 무기와 탄약을 가져왔다. 이처럼 1980년 5월 21일에는 공수 부대의 정조준 사격, 헬기 기총 소사 등 시민을 향한 발포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광주 시민들은 전남 전 지역으로 나아가 무기를 확보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전체가 들끓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를 확보하면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왜 전두환 일당은 일부러 사태를 더 악화시켰나?

    21일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다. 이날 오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위가 확산된 이유는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와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담화문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났는지, 시민들이 왜 싸웠는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고, 공수 부대의 만행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이희성이 발표한 것과 똑같이 조작, 허위 사실,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발표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분노한다.
    그런데 왜 이런 발표를 연달아 한 것일까? 21일, 22일 연속해 일어난 일들은 전두환·신군부가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짓을 계속 저질렀을까? 전두환 일당은 본때를 보여 자신들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 그래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두환·신군부 유신 잔당은 이희성 담화문이 의도한 것과 똑같은 의도로 광주와 일반 국민을 격리 차단해 오로지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 폭압, 폭력의 군홧발로 광주를 짓밟고 일반 국민들에게 허위 사실을 사실로 믿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광주처럼 당한다는 협박용으로 일부러 5월 21일 이희성 발표에 이어 22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공수여단의 어느 하루, 어린이 사살→오인 총격전→분풀이 학살

    24일,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5명가량의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열세 살의 한 소년이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열 살짜리 어린이 한 명이 숨졌다. 이 부대는 진제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 있던 박연옥을 향해 발포했다. 박연옥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후 이 부대는 효덕초등학교 앞을 지나 광주-목포 간 국도를 이동하다가 갑자기 집중 사격을 당했다. 공수 부대를 공격한 건 마을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었다. 공수 부대를 시민군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었다. 공수 부대도 바로 응사했다. 이 오인 총격 사건으로 장교 1명을 포함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보병학교 교도대가 빠져나간 후 11공수여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또 일으켰다. 근처 마을에 들이닥쳐 3명의 젊은이를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해버렸다. 엉뚱하게 화풀이로 마구잡이 보복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생 해서는 안 될 일을 11공수여단은 하루에 수차례나 저질렀다.

    전두환·신군부는 27일 왜 그토록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나?

    27일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2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진압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7·11공수여단, 20사단, 31사단, 전교사 예하 병력 등 총 2만 317명이었다. 이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이 가운데 상무 충정 작전에 전투 요원으로 실제 투입된 계엄군 병력은 6,168명이었다. 그중 작전을 주도하는 특공조로 편성된 공수 부대원은 장교 37명을 포함해 317명이었다. 시민군의 숫자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전두환 일당은 왜 이토록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일까? 이 또한 5월 18일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18일 오후 4시경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 전에는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5월 27일에도 마찬가지로 군이 아니라 경찰만 투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처럼 한 것이다.
    “5월 18일, 19일에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이른바 위력 과시, 선제 타격이라는 걸 하지 않았나. 전두환·신군부 권력 탈취에 저항하는 세력을 궤멸시키다시피 제압해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5월 19일 시민들이 공수 부대와 맞서면서 광주항쟁이 본격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오히려 계엄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쪽이나 계엄군으로서는 굉장한 치욕이라고 볼 수 있는 상태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27일에 그런 식으로 보복해 만회하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민군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저항 세력을 초토화하고 시민들에게 특별히 위력을 과시해 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시민군은 15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체포됐다.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가?

    그동안 전두환은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정보 수집, 수사만 했다. 광주사태 진압과는 명령, 지휘 계통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비선 라인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에서 공수 부대가 한 행위는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 방안이던 ‘시국 수습 방안’의 일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일당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 많은 학생, 시민들이 반발하고 투쟁과 시위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예상 아래 서울과 광주 등 중요 지역에 공수 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미 배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5·17쿠데타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위력을 과시해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대한 저항의 씨를 말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1일, 자위권이 발동된다.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21일 오전에 열리는데, 전두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 권력자인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밝혀졌다. 이튿날 22일, 전두환은 공수 부대원들에게 격려금을 하사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전두환은 25일 최규하로 하여금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에 벌어진 상무 충전 작전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전두환은 광주에서 진행된 여러 작전이나 자위권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했고, 가장 중요한 27일 작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미국 또한 전두환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군 실력자라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27일 상무 충정 작전을 몇 시간 앞두고 사병들에게 거액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정신은 살아 숨 쉬며 6월항쟁으로 승화했다

    광주항쟁은 27일 마지막 시민군들이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곧 광주의 진실 알리기 운동이기도 했다. 광주항쟁은 특히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광주의 진실, 이것을 접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0년대 내내 되물었다. 잔인한 유혈 사태, 시민을 향한 발포, 그러한 공수 부대에 과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 이 모습들은 1980년대 내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학생들은 1984년경부터 학생 운동의 폭을 넓혀갔는데, 주된 활동의 하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학가는 4월에 4·19 기념을 겸해 4월 투쟁을, 5월에는 여러 날에 걸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각종 교내 활동과 시위 투쟁을 벌였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은 그 자체가 반전두환 투쟁이었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 투쟁은 학생 운동을 확장하는 지렛대였다.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광주항쟁은 어떠한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1894년), 3·1운동(1919년), 4월혁명, 부마항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킨 집단이나 독재자의 영구 집권욕에 의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또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항쟁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광주항쟁을 꼽을 수 있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군부의 유신 잔당들이 ‘서울의 봄’을 깨부수고 제2의 유신 체제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한 변란에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면, 그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정의롭게, 올바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광주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길이 남을 역할을 했다. 4월혁명과 똑같이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민주화, 자주화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광주항쟁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뜨겁게 불을 지폈다. 그뿐 아니라 6월항쟁으로 전두환·신군부가 무릎을 꿇고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면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잊혀서는 안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보위,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1980년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은 전두환은 곧이어 국보위를 설치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국보위를 통해 전두환 일당은 부정 축재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공직자 등 1만여 명을 숙정했다. 또한 언론계에도 칼날을 들이대 언론 검열에 비협조적인 기자들을 추방했다. 특히 광주항쟁 때 있었던 보도 검열 거부, 제작 거부를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을 했다. 당시 기자의 30퍼센트가 쫓겨났는데, 과히 언론 대학살이라고 할 만했다. 전두환 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을 연행해갔고, 정치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이때 몰수한 재산 규모는 1,133억 원에 달했다.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는 국보위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전두환 일당의 인권 유린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전두환 일당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1980년 8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 6만 755명을 체포했다. 이 중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만 7,761명이 훈방 등의 조치를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3만 9,742명이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11차에 걸쳐 전국 각지의 군부대에서 소위 순화 교육이라는 걸 받았다. 이 중에는 13세 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있었고 군 장성, 언론인, 노조원,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돼 있었다. 특히 민조 노조 운동가들이 표적이 되어 끌려갔다. 원풍모방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에 앞장섰던 한일도루코, 청계피복, 원풍타이어 등의 노조 간부 22명 또는 그 이상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4주간 순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강창성은 박정희의 지시로 하나회를 대대적으로 수사하던 사람으로, 전두환 일당이 그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것이었다.
    전두환은 이 사업이 국보위 사업 중에서 핵심 사업이라고 강조하며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강한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전두환의 주문이 있었기에 삼청 교육은 잔혹하게 시행됐고, 수많은 사망자 등 피해자를 양산했다. 공식 사망자만 54명으로 밝혀졌고,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은 397명, 행방불명자 4명, 삼청 교육으로 인한 상이자는 2,768명이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일본은 전두환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대중은 5‧17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행됐다. 계엄사는 1980년 7월 4일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 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 선동에 의해 학원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 혁명 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 음모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다.” 계엄사 합수부는 7월 12일 김대중 등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했다. 이어서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건을 조작했다. 계엄사는 내란 음모 이외에도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 등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전두환 일당이 문제 삼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본 정부가 반드시 문제 제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두환‧신군부와 일본 정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은 전두환 일당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남침 정보를 조작해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결국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기대와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은 사형이 구형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은 한국이 강력한 반공 기조를 유지한다면, 독재 정권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9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취임 직후 첫 번째 손님으로 전두환을 미국에 초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을 강력히 지지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전두환은 2단계를 통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먼저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980년 8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8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9일 이번에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대통령이 되었다.

    목차

    책머리에
    연표

    전두환과 5공 잔혹사

    첫 번째 마당
    전두환·신군부, 국가 권력 장악
    국보위로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다

    두 번째 마당
    인권 유린과 잔혹함의 상징,
    삼청교육대 ‘순화 교육’

    세 번째 마당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일본 정부,
    노골적으로 전두환 지지한 미국

    네 번째 마당
    악법 제조 기구 입법회의 앞세워
    정치도, 언론도, 노동도 입맛대로 개악

    다섯 번째 마당
    관제 야당까지 만든 전두환·신군부,
    희대의 코미디 1대대-2중대-3소대

    여섯 번째 마당
    사회·문화 규제 완화와 3S 정책
    일본 극우 인사, 올림픽 개최 권유

    일곱 번째 마당
    이념 투쟁 전개, ‘무림’-‘학림’ 사건
    본격적 반미 투쟁, ‘부미방’ 사건

    여덟 번째 마당
    시위 막으려 강제 징집, 녹화 사업 강행
    눈물바다 만든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아홉 번째 마당
    이철희·장영자 금융 사기 사건,
    전두환·신군부 권력 지형을 바꾸다

    열 번째 마당
    유화 국면 활용해 고조된 학생 운동,
    김영삼 단식과 민추협의 탄생

    나가는 말

    본문중에서

    5·16쿠데타나 다른 지역 쿠데타와 달리 전두환·신군부는 왜 2단계 쿠데타로 갈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건 앞으로 학계에서 많이 논의하고 연구돼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12·12쿠데타가 일어날 때에는, 대세가 민주화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12·12쿠데타 핵심 세력은 당시 시민이나 정치 세력들이 일거에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시기의 정치 상황과 10·26 직후의 정치 상황은 그만큼 크게 달랐다.
    ('16권' 중에서/ p.80)

    5·17쿠데타가 쿠데타냐, 쿠데타라는 생각이 안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얘기했는데, 전두환·신군부의 쿠데타는 5·16쿠데타하고도 물론 다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쿠데타 역사상 아주 드문 사례를 제공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 글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예라고까지 적혀 있다.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가 일어난 지 무려 5개월이 지나서 국가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5·17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통대’에 의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건 그보다 3개월 후인 1980년 8월이다. 새 헌법에 따라 다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새롭게 출발하는 건 1981년 2월이다. 12·12쿠데타부터 이때까지 따지면 1년이 넘는다. 사실 10·26 이후 상황을 살펴보면 쿠데타를 단숨에 일으켜 권력을 바로 장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하여튼 아주 특이한 쿠데타를 일으킨 건데, 그래서 다른 쿠데타에 비해 사람들한테 잘 안 들어오는 면이 있다. 또 5·17쿠데타 때에는 무력 충돌이 없었다. 무혈 쿠데타였다. 이 점도 사람들 머리에 작용했을 것이다.
    ('16권' 중에서/ p.165)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18일에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공수 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일시 피신했지만, 그 폭력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피신한 이후부터, 더구나 그 폭력이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를 위한 야수 같은 만행이었는데도 피신한, 그래서 그 이후부터 양심의 가책을 아주 심하게 느끼며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면서 다시 거리에 나갔는데, 그 거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고 노도와 같은 민중, 시민들이 같이 투쟁의 대열에 서 있었다. 그걸 알게 되면서 시민들의 그러한 부끄러움, 자괴감은 강력한 투쟁의 힘으로 바뀌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16권' 중에서/ p.206)

    그러자 또 다른 대여섯 사람이 이번에도 태극기를 들고 나가 흔들면서 구호를 외쳤다. 공수 부대는 또 사격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또 쓰러졌다. 또 다른 사람들이 다시 태극기를 들고 나가 구호를 외쳤다. 이들도 공수 부대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런 일이 대여섯 번이나 거듭됐다. 순식간에 30여 명의 젊은이가 숨졌다.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6권' 중에서/ p.224)

    24일에는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트럭에 나눠 탄 제11공수여단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이동하던 중 진월동 원제마을 저수지 옆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 저수지에서는 15명가량의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며 멱을 감고 있었다. 공수 부대는 이 아이들에게 총을 쐈다. 결국 열세 살의 한 소년이 그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이어서 공수 부대는 근처에 있는 진제마을 쪽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마을 뒷동산에서 놀던 아이들한테 발포했다. 여기서도 열 살짜리 어린이 한 명이 숨졌다. 이 부대는 진제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 있던 박연옥을 향해 발포했다. 박연옥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16권' 중에서/ p.261)

    삼청 교육이라는 건 아주 심한 가혹 행위의 연속이었다. 구타, 얼차려 같은 걸 통해 육체적 고통을 주는 일이 계속됐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의 피해자 진술을 보면, 김아무개는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합을 받았으며, 야밤에 옷을 벗긴 다음 찬물을 붓거나 각목과 쇠파이프로 수없이 자신을 폭행했고, 철조망 근처만 가도 실탄 사격을 했다고 말했다.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부대에 있던 안아무개의 경우 추운 겨울인데도 새벽에 연병장에 집합시킨 다음 물 묻은 빗자루로 알몸에 물을 뿌리고 움찔거릴 때마다 몽둥이로 구타하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4주 교육을 받으면 전과를 말소해준다는 형사 말에 ‘전과 없이 깨끗이 살고 싶어’ 입소했다. 그리고 삼청 교육을 받던 중 11사단 감호생 소요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89년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했다. 박아무개는 교육받으면서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이었고, 동료들 간에 서로 좋고 나쁜 사람을 평가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17권 47~48쪽
    ('17권' 중에서/ pp.47~48)

    민정당 등 전두환·신군부 권력에 의한 정당 만들기 작업은 한국 정당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희대의 희극이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듯 정당을 만들어냈는데, 보안사는 공장이었고 민정당은 제품이었다. 국민이나 주권자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민주 공화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정당 제조 작업으로, 이는 한국 정치 애사哀史이자 민주주의 장송곡이었다. 이런 식의 정당 제조는 세계 정당사에서도 희귀한 사례에 들어갈 것이다.
    ('17권' 중에서/ p.106)

    정보 기관이 여당과 야당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집중이 심하다고 할까,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일제 강점기, 미군정기, 이승만 집권기에 계속 권력이 과대 성장을 했지만, 특히 박정희 집권기에 와서, 그중에서도 유신 체제기에 권력 집중이 한층 강화되었고, 그것을 전두환·신군부가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 여당과 야당을 정보 기관에서 제조해내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박정희 권력은 정보 정치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들 얘기하는데, 권력의 과대 성장은 정보 기관의 과대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17권' 중에서/ p.109)

    공안 당국은 이념성이 강한 점도 주목했겠지만,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신군부에 정면 도전한 학생 운동이기 때문에도 학생 운동의 뿌리를 뽑기 위해 연행된 사람들을 가혹하게 고문하면서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였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고문에 나섰다. 언더 지도부만이 아니라 그 지도부의 기반이 됐던 학회들의 현황이나 연락 방식까지 모두 드러났다. 당국은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도록 했다. 이 사건에 대해 공안 당국은 무림 사건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는데, 9명이 구속되고 90여 명이 강제 입영됐다.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없고 안개 속처럼 모호하게 연결돼 있다고 해서 무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7권' 중에서/ p.148)

    무림 사건과 대칭적으로 얘기되는 것이 학림 사건이다. 선도 투쟁을 강조하면서 무림 쪽 언더 지도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왔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그게 바로 나중에 학림으로 불리게 되는 이쪽이다. 이쪽 그룹에서는 학생 운동은 선도 투쟁, 정치 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그 성과를 받아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해야 하는 건 노동 운동 쪽이라고 봤다.
    ('17권' 중에서/ p.148)

    ‘부미방’ 사건 관련자들은 굉장한 중죄인처럼 다뤄졌는데도 아주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스무 살 안팎의 앳된 학생들은 고문으로 몸은 짓이겨졌지만 남녀 학생 구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소견을 분명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왜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질렀으며 자신들의 행위가 왜 정당한가를 서슴지 않고 얘기했다. 그런 면에서도 1980년대 학생 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줬다.
    ('17권' 중에서/ p.163)

    보안사는 강제 징집자 및 정상 입대자 중 학생 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소위 순화 업무라는 걸 진행했다. 순화 업무라는 건 ‘좌경 오염 방지’라는 명목 아래 학생 운동 활동 사항과 조직 체계 등을 조사하고 대상자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도록 하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순화된 것으로 판단되는 병사들에게 출신 대학교의 학원 첩보를 수집해오도록 요구했다.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이다. 이걸 녹화 사업이라고 부른다.
    ('17권' 중에서/ p.170)

    저자소개

    생년월일 1948.08.25~
    출생지 충청남도 논산시
    출간도서 40종
    판매수 8,781권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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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도서 24종
    판매수 4,059권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현재 인문 기획 집단 문사철에 터를 잡고 역사와 사회에 관한 책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김기춘과 그의 시대》를 쓰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공저했으며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전 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전 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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