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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2 : 문화혁명의 붉은 황제 1937~1976[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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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혁명 이론가로서 레닌에 비견되고,
군사 전략가로서 트로츠키를 넘어서며,
권력 기술자로서 스탈린을 능가하는 혁명가의 또 다른 이념형


대장정이 시작된 지 2개월이 채 못 된 1934년 11월 말, 중국 남부를 흐르는 샹강에서 오합지졸 홍군은 국민당군에 완패했다. 8만 6천의 병력 중 3분의 2를 한순간에 잃은 뒤 붉은 전사들은 뚜렷한 목적지도, 원대한 계획도 없이 중국 내륙으로 허겁지겁 쫓겨 들어갔다. 엄청난 재앙을 만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 중국공산당에게는 이제 마지막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고집불통 마오쩌둥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마오는 절멸의 위기 속에서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다면적인 ‘혁명가’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당대 상황과 실정에 맞춰 변화시킨 ‘혁명 이론가’이자, 유격전과 기동전을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월등한 적을 패퇴시킨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권력을 잡은 뒤에는 스스로 진정한 영웅이라 자부하고 진시황의 계승자라 자임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다.
혁명가 마오는 뛰어난 현실 감각과 투철한 이상 추구 사이에서 스스로 모순이 되었다. 그는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붉은 황제가 되었다. 그 결과 인류의 4분의 1은 단숨에 중세적 노예에서 근대적 주체로 일어섰지만, 다시 역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내몰렸고, 급진적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20세기의 정치 지형을 뒤흔든 지도자, 혁명에 몸을 던진 투사이자 혁명의 이상에 갇힌 수인, 마오쩌둥은 바로 현재 중국의 역사이다.

마오의 삶에 드리운 빛과 어둠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총체적 시야
오류와 편견에 가득 찬 마오의 이미지를 분쇄하는 균형감 넘치는 서술


우리는 마오쩌둥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천재적 영도력으로 중국을 구원한 혁명의 별인가, 수백만 인민을 죽음으로 끌어들인 냉혈한인가? 여기 신격화와 악마화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넘어, 편협하지 않고 설득력 있는 총체적 관점이 제시된다.
필립 쇼트의 전기는 공정하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의 문서고 자료, 마오 측근들의 직간접적인 증언, 학술 연구서를 비롯한 각종 간행물을 토대로 삼아 인간 마오와 그가 이룩한 현대 중국의 실체를 파고든다.
필립 쇼트의 전기는 생생하다. 19세기와 20세기 변화무쌍한 중국의 사회 문화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그 속에 비친 인물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이로써 독자들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며, 한 편의 서사시 같은 거인의 삶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중국, 마오쩌둥의 나라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두려워하며 문화혁명의 사상 투쟁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공산주의 혁명의 꿈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마오의 예감은 정확했다. 1979년 12월 28일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 개방을 선언하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현대 중국은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제 누구도 중국을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오의 혁명은 실패한 것인가?

중국 혁명에서 마오는 단지 레닌의 역할만이 아니라 스탈린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마오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면 전체 체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시진핑이나 그의 동료들 누구도 그러한 위험을 묵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2권, 개정판 후기1' 중에서/ p.535)

2018년 12월 2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개혁 개방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기념 연설에서 개혁 개방을 심화하고 확대함으로써 중국몽(中國夢, 중국의 부흥)을 실현하겠다고 천명했다. 다만 한 가지 전제를 덧붙였다. “당·정부·군대·민간·학계, 동․서·남·북·중,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 이는 2017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때 공산당 당장(黨章, 당헌)에 새롭게 추가된 문구이다. 사실 이것은 시진핑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1940년대부터 강조하고 문화혁명 기간인 1962년에 공식화한 표현이다. 시진핑은 마오가 죽을 때까지 철저히 거부한, 자본주의 체제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마오의 구호를 앞세워 당의 권력을 집중화한 것이다. 혁명의 시대는 갔을지언정 마오의 시대는 여전한 셈이다.

현대 중국을 세운 거인 마오쩌둥의 내면을 밝히는 최고의 전기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필립 쇼트는 마오쩌둥의 생애를 유려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그려냈다. [마오쩌둥] 초판은 1999년 출간 즉시 평단에서 프로파간다 속에 갇힌 마오를 ‘균형감 있고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마오쩌둥 전기의 결정판이라 불렸다. 쇼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초판 출간 이후 공개된 중국과 러시아의 문서고 자료와 각종 연구,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마오쩌둥 최측근들의 증언을 토대 삼아, 대대적인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18년 만에 전면개정판을 완성했다. 2017년에 출간된 전면개정판을 저본으로 삼은 한국어판 [마오쩌둥]은 전체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의 ‘개정판 후기’ 2편이 포함되어 있다.

1권 ‘혁명을 향한 대장정’은 1893년 후난성 사오산에서 마오쩌둥이 태어난 때부터 대장정이 마무리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1937년까지를 전체 10장에 걸쳐 다룬다. 마오의 어린 시절과 공산당 초기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기존의 어떤 마오쩌둥 전기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거인의 신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소년 시절 유학 사상을 배우며 얻은 신념, 서구 정치 이념들에 대한 탐구, 폭력을 부정하며 무정부주의에 몰입했던 시절, 공산주의 이념을 선택하게 된 계기,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의 조직자이자 이론가로서 두각을 드러낸 시기, 공산당 내에서 여섯 차례나 권력 밖으로 밀려났던 시련, 대장정을 거치며 당내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는 순간까지 마오에 관한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2권 ‘문화혁명의 붉은 황제’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37년 중국공산당의 옌안 시절부터 1976년 마오의 죽음까지를 다룬다. 특히 ‘대약진운동’을 다루는 13장에서 저자는 최신 연구 자료를 반영함으로써 마오와 동료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수천만 중국 인민을 기아나 죽음으로 내몬 까닭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외에도 마오가 장제스를 꺾고 중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이유, 문화혁명의 동기와 결과, 소련과의 경쟁과 갈등, 혁명을 향한 집착과 후계자 구상에 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구 사회 일각의 ‘마오쩌둥 악마화’에 대한 통렬한 반격

전면개정판에서 저자는 21세기에 중국과 마오쩌둥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지침을 제시하는 글을 두 편 더 실었다. 2권에 실린 ‘개정판 후기1’과 ‘개정판 후기2’가 그것이다.
첫 번째 “중국 현대 정치와 마오쩌둥 딜레마”는 현대 중국 사회에서 마오쩌둥의 위치를 살펴보고 덩샤오핑에서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마오의 후계자들이 그의 이미지를 보존하는 이유와 방식을 설명한다.
두 번째 “서방 연구자들의 마오쩌둥 평가”는 마오에 관한 서방 연구자들의 저술을 깊이 분석함으로써 서구적 편견에 갇힌 마오쩌둥 연구의 실상을 드러낸다. 특히 저자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마오쩌둥의 ‘악마적’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장룽 ․ 존 핼리데이의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교수의 ‘인민 3부작’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서구 독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장룽의 마오 전기와, “중국 혁명 신화의 허상을 밝혔다”고 평가받은 디쾨터의 연작은 한국에도 소개되어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필립 쇼트는, 역사학자들로부터 마오를 일방적으로 폄하했다는 평가를 받은 장룽은 물론이고,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으로 찬사받은 디쾨터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쇼트는 이들 모두 마오에 관한 부정적 시각을 바탕에 깔고 일부 증거 자료를 자신의 논지에 유리하게 선택하고 왜곡했음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마오쩌둥은 누구인가?

거인의 죽음 뒤에는 항상 그렇듯 그의 삶에 대한 평가가 시작된다. 마오쩌둥은 그 어떤 인물보다도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마오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을 구원한 ‘신’이거나 냉혹한 ‘악마’였다. 마오의 후계자들은 마오를 신격화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한다. 서구의 일부 연구자들은 서구 체제의 우월성을 보이려고 마오를 기괴하게 그림으로써 오히려 중국 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전자의 관점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 낳은 수천만 인민의 희생에 눈감아야 한다. 후자는 마오가 사후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국 인민에게 발휘하는 호소력을 설명할 수 없다.
수억 명의 인민을 가난에서 구한 공산주의 혁명가, 그 인민들의 머릿속에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한 이념적 지배자, 영원한 혁명을 꿈꾼 이상주의자, 동지들을 끝없이 의심하며 숙청한 독재자, 역사상 다른 어떤 나라의 지도자보다 더 많은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폭군.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 마오를 한 가지 특성으로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이었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했으나 전통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도대체 마오쩌둥은 누구인가? 필립 쇼트는 마오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삼아 변화무쌍한 거인의 삶을 추적한다.

무정부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열성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처음 매혹되었던 사상은 무정부주의(anarchism)였다. 그는 ‘폭력 없는’ 자치 운동을 벌이며 중국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중국에서 실제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개혁 방법은 ‘러시아식 혁명’이었다. 1920년 마오는 특유의 ‘현실주의’ 인식을 거쳐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마오)는 무정부주의에 끌렸다. …… 무정부주의의 매력은 권위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 있었다. 이것은 유가적 가족 제도라는 숨 막힐 듯 답답한 전통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하던 ‘젊은 중국’의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무정부주의가 내세우는 여러 제안들을 지지”했으며 중국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적용할지를 두고 오랜 시간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노라고 인정했다.
('1권, 4장 베이징의 무정부주의자' 중에서/ pp.156~157)

“다른 모든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지금, 새롭게 찾은 길이 바로 러시아 방식이다. 다른 변혁 방식과 비교할 때 이 방식이 더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다. …… 사회 정책은 더는 방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미봉책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변혁의 수단으로 의회를 선택한다. 하지만 의회가 통과시키는 법률들은 모두 자산계급을 보호하는 법률들이다. 무정부주의는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교의는 절대 실현될 수 없다고 본다.”
('1권, 4장 베이징의 무정부주의자' 중에서/ p.198)

변방에서 중심으로 – 당내 권력 투쟁
마오는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였지만 초기 당 활동 시기에는 일관되게 자신의 당과 사이가 나빴다. 동료들은 마오의 고집과 독선을 싫어했다. 훗날 마오와 40여 년간 정치적 공조 관계를 유지한 저우언라이도 초기에는 마오를 후난성 기반에서 쫓아내려고 했고 홍군의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마오는 중국 혁명에서 농민층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했고, 중국 역사상 가장 단결력 있는 군대를 만들어냈으며, 항일 전쟁을 공산당의 세력 확대 기회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오의 뛰어난 능력은 그의 독선마저 정당화했으며 마침내 경쟁자들을 굴복시켰다.

그(마오)는 편한 인물이 아니었다. 천두슈가 퇴출된 직후, 저우언라이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마오를 쓰촨성으로 보내 그의 권력 기반인 후난성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취추바이는 그해 초부터 마오와 농민위원회에서 일을 같이 하면서 그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신념이 강한지 충분히 겪었다. 마오는 내 편이면 좋은 사람이었지만, 경쟁자이거나 혹은 상급자이면 불편한 자였다.
('1권, 7장 혁명군 지도자' 중에서/ p.346)

1935년 1월 홍군이 쭌이에서 행군을 잠시 멈추었을 때 마오는 처음으로 당 지도부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만일 공산당의 근거지가 붕괴하지 않았더라면, 보구가 좀 더 여유로운 태도로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 기울였다면, 홍군이 샹강 도하 작전에서 크게 패하지 않았더라면, 오토 브라운이 독재자처럼 굴지 않았더라면, 마오는 결코 지배적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당 동료들이 마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이제 다른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고 더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권, 10장 대장정' 중에서/ p.535)

대장정을 이끌다
중국공산당 홍군은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출발은 중국 남부 장시성이었고 그 끝은 북부 산시성(陝西省)이었다. 처음부터 대장정에 나섰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8만 6천 명 중 5천 명이 채 안 되었다. 대장정은 군사적으로는 확실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공산당은 공들여 세운 근거지를 잃었고 중국의 주요 도시와 멀어졌으며 병력은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퇴각의 여정은 항일의 선봉으로 훌륭히 각색되었고, 군사적 고난은 영웅적 모험담으로 널리 퍼져 홍군의 신화를 형성했다.

약 1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횡단한 이 행군은 후에 ‘대장정(大長征)’이라고 불리게 된다. 역경을 뚫고 나아갈 용기, 철저한 자기희생과 규율, 불굴의 의지의 영웅적 상징이 될 대장정은 사실 처음에는 ‘전략적 이동’으로, 조금 뒤에는 그저 ‘서쪽을 향한 행군’이라고 불렸다.
('1권, 프롤로그' 중에서/ pp.17~18)

대장정 동안 홍군은 용기와 인내의 위대한 서사시를 이룩한다. 홍군의 백절불굴 정신과 영웅적 행동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졌다. 훗날 국민당은 홍군의 전설을 무너뜨리려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1권, 10장 대장정' 중에서/ p.540)

중국식 사회주의의 창조자
레닌 이후 모든 공산당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설에 관한 이론적 공헌 위에 자신의 권위를 구축했다. 마오는 이 점에서 취약했다. 당내 권력 투쟁에서 마오의 주된 경쟁 상대는 정통 레닌주의를 본고장에서 배우고 돌아온 소련 유학파들이었다. 그러나 마오에게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마오는 중국만의 고유성을 강조했고 서구적 방식의 복제를 배격했다. 마오가 창조한 특유의 사회주의 이론인 ‘모순론’과 ‘실천론’은 마오에게 정치적 ․ 군사적 지배력에 더해 이념적 지도자로서 권위를 부여했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도 여전히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모순론)은 이후 마오가 자신의 뜻대로 당과 사회를 움직이기 위해 정치 운동을 일으킬 때마다 정당화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엉덩이를 중국이라는 몸통에 붙여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학습해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중국공산당의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명백하게 알고 싶다면, 우리가 어디에 엉덩이를 놓는지가 중요합니다. …… 중국을 학습할 때는 당연히 중국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 우리 가운데 몇몇 동지들은 외국을 중심에 두고 마치 축음기처럼 기계적으로 외국의 것을 통째로 녹음하여 중국에 틀어대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2권, 11장 옌안의 붉은 별' 중에서/ p.62)

혁명의 꿈에 갇힌 수인
마오쩌둥은 현실에 단단히 밀착한 지도자였다. 그는 결코 혁명 이론의 이상주의에 빠져 무모한 군사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직접 농촌 현장 조사를 벌여 현실성 있는 토지 제도 개혁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설 이후 국가주석으로서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체제 확립을 위한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마오는 점차 베이징에 고립되어 현실과 멀어졌다. 동지들과 인민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따르도록 강요했고,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날 경우 거침없이 숙청을 자행했다. 전자가 낳은 최악의 결과는 ‘대약진운동’이었고 후자의 최악은 ‘문화대혁명’이었다.

엄격하게 구성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년의 마오는 무제한의 권력을 누리면서 이들 이외에 다른 인간적 접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 정치국 사람들과는 철저히 정치적인 관계였다. …… 하지만 마오는 깊이, 더 깊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친구 관계란 있을 수 없었다. 리인차오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렇게 말했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한쪽은 기도하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그 기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권, 13장 백화운동과 대약진운동' 중에서/ pp.220~221)

(마오는 선언했다.) 이제 새로운 투쟁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 투쟁의 주된 과제는 “자본주의 길을 가는 당내 지도자들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 류사오치는 물론이고 지도부의 다른 대부분 사람들은 마오의 발언을 심술궂은 노인의 투덜거림 정도로 여겼다. 낡아 가는 거석(巨石) 같은 존재인 그 노인은 지금도 여전히 불꽃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갈수록 과거에 자신이 품었던 혁명의 꿈에 갇힌 수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2권, 14장 불멸의 혁명을 위하여' 중에서/ pp.320~321)

당과 국가를 철두철미 장악한 지도자
만년에는 최측근조차 마오의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워했다. 그의 말은 함축적이었고 행동은 불분명했다. 주요 사안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밝히기보다는 두루뭉술한 태도로 동료들의 결정을 지켜보며 평가하곤 했다. 그 불분명함이 역설적으로 마오의 권력을 강화해주었다. 모두들 마오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급기야 1959년이 되면 몇몇 공산당 지도자들이 마오의 거처 곳곳에 몰래 녹음기를 설치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오는 자신의 오랜 혁명 동지인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펑더화이, 린뱌오,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당의 핵심 인사들을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마오는 변덕이 심해졌고 속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랫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기를 기대했다. 미리 알아차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르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했다. 지난 20년 동안 그 시험에 불합격한 주요 희생양만 해도 가오강,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타오주가 있었다. 하지만 마오 주석의 본심을 알아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웠다.
('2권, 16장 물러선 거인' 중에서/ p.425)

중국의 미래를 위해 ‘주자파’ 덩샤오핑을 남겨둔 마오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기간인 1966년 ‘당내 두 번째 주자파’로 불리며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1973년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했지만 3년 뒤 톈안먼 사건의 배후자이자 반성하지 않는 주자파로 낙인 찍혀 다시 모든 직위를 잃었다. 덩샤오핑이 두 차례나 권력 밖으로 밀려난 것도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마오의 결정이었다. 심지어 1976년 급진파의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안전 가옥에 머물 수 있었던 것도 마오의 선택이었다. 마오는 덩샤오핑을 주자파라고 의심했으나 그의 정부 운영 능력과 군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 사며 훗날 중국을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마오는 자본주의를 따를 위험이 있다고 본 혁명 동지들을 거의 모두 파멸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으나 어쩐 일인지 덩샤오핑만은 죽음의 벼랑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했다. 덩샤오핑을 살려 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어두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1959년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남자 앞에는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오는 덩샤오핑의 능력이 다시 필요할 때를 대비해 그를 남겨 두고 싶어 했다.
('2권, 15장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 중에서/ p.412)

마오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은 중국이 경제적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오의 혁명적 청사진을 완전히 짓밟았다. 마오는 그를 살려 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혜안이 들어맞았다고 웃고 있을까?

마오는 어떻게 장제스를 패퇴시키고 중국 대륙을 제패했나?

1930년대 말 국민당군은 중국공산당 홍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 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홍군의 근거지들을 모조리 파괴해 그들을 서쪽 내륙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공산당을 지지한 농민들에게 잔혹하게 보복함으로써 세력 확장을 차단했다. 1945년에는 중국 전체 면적의 80퍼센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4년 후 마오는 장제스 세력을 패퇴시켜 타이완으로 몰아냈다. 인적 ․ 물적 자원에서 크게 뒤떨어졌던 마오의 공산당은 어떻게 장제스를 이겼는가?

“전쟁에서 결정적 요소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이다.”
중국공산당 홍군은 공통의 목표의식으로 뭉친 단결된 군대였다. 반면 국민당군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는 최악의 군대였다. 본래 지방의 군소 군벌이었던, 장제스 휘하의 지휘관들은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을 뿐 결코 희생을 무릅쓰려 하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징집된 일반 병사들은 짐승처럼 취급당했던 탓에 짐승같이 행동하기 일쑤였다.

마오의 군대는 당시 중국의 어떤 군사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첫 번째 지침은 군을 자원병으로만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동 경비도 지급하겠다고 알렸다. …… 두 번째 지침은 군이 민간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는 …… 대중의 것은 ‘고구마 한 개’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권, 7장 혁명군 지도자' 중에서/ pp.362~363)

부패하고 무능한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쇼트는 장제스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를 그가 세운 허약한 체제 속에서 찾는다. “공개 처형과 비밀경찰로 유지되던 일당 독재, 자유주의적 반대자들에 대한 암살, 전쟁 수행을 위한 화폐 남발이 야기한 극심한 물가 상승과 실질 수입의 감소, 정당한 영업 행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만연한 부정부패”가 국민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도시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산당이 베이징을 비롯한 대도시들을 점령하자 많은 시민들이 이를 저항하기보다는 환영했다는 사실은 장제스의 정부가 실패했음을 반증한다.

국민당 정부의 폐해가 자라난 뿌리에는 장제스가 세운 체제가 있었다. 그 체제는 너무도 약하고 파벌 싸움이 심해서 체제 자체를 인민들에게 강제할 힘이 없었으며, 너무도 부패하고 공공의 복지를 등한시한 탓에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낼 수가 없었다.
('2권, 12장 새로운 중국의 탄생' 중에서/ p.116)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에 대한 전방위적 평가

마오가 추진한 정책의 직접적 결과로 희생된 중국인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연구자들은 최소 2천3백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까지 추정한다). 그중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두드러진다. 이 책에서 쇼트는 마오의 실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혁명의 꿈에 갇힌 마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약진 없는’ 대약진운동
1958년 1월 고도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한 ‘대약진운동’이 추진되었다. 농촌의 대규모 집단화를 통해 단기간 내 농업과 공업 분야에서 산업화를 이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의 경험을 그대로 모방한 어설픈 경제 계획과 수직적이고 독재적인 권력 구조는 중국의 수천만 인민을 기아로 내몰았다. 쇼트는 대약진운동과 관련된 최신 연구 자료를 토대로 삼아, 운동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참혹한 실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마오가 대규모 기아 사태를 일부러 용인했으며 심지어 자원 배분 차원에서 환영했다고 주장하는 프랑크 디쾨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대재앙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마오가 세운 체제가 그 뿌리였다. 인민공사와 생산대대의 책임자들은 물론이고 현과 성 단위의 관리들도 그런 체제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처럼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없었다. 마오는 어떤 체제를 만들었던가? 마오와 가장 가까운 동료들마저도 마오가 내린 결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마오의 주변 사람들 중에 진행 중인 비극을 완화하는 조치를 마오가 허락하기 전에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권, 13장 백화운동과 대약진운동' 중에서/ p.280)

(디쾨터의) [마오의 대기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오와 그의 동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대중 동원이 풍요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마오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많은 곡물이 생산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고 나서도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 시간이 지나 결국 농촌의 실상이 밖으로 알려졌고, 당 중앙은 조사조를 파견했으며, — 이미 시기를 놓쳤지만 — 정책은 바뀌었다.
('2권, 개정판 후기2' 중에서/ pp.572~573)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벌어진 ‘수정주의’에 맞선 대규모 사상 투쟁이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황폐해진 경제를 부흥하려는 실용주의적 움직임이 커지자 이에 맞설 거대한 소용돌이를 배후에서 기획하고 조종했다. 마오가 바란 것은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라 가난해도 혁명의 열정이 꿈틀대는 나라였다. 그가 일으킨 혁명의 열정은 젊은 세대를 선동해 앞선 세대의 전통적 관습을 파괴하고 마오주의를 모든 방면의 교리로 강제했다. 필립 쇼트는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류사오치를 비롯한 당내 실권자들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혁명을 원한다. … … (미래에) 우리 동방에 있는 국가들은 부유해질 것이다. (서양 국가들의) 생활 수준이 떨어지면 그 나라의 인민들이 진보적이 될 것이다.” 마오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의 필연적인 결론은 중국이 부유해지면 혁명적 성향이 사라지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내놓고 솔직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추상적인 이념적 목적을 위해 계속되는 극빈 상태를 감내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오는 풍요와 혁명 가운데 혁명을 선택했다.
('2권, 14장 불멸의 혁명을 위하여' 중에서/ p.317)

홍위병은 1960년대에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자유를 흔적까지 싸그리 없애고 새로운 마오주의 정통 교리를 강제했다. 새로운 정통 교리는 과거의 어떤 정통 교리보다 엄격했다. 홍위병의 목적은 2천 년 전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분서갱유였으며, 옛것을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마오의 말처럼 ‘한 장의 흰 종이’ 상태로 중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흰 종이에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 사상’의 성스러운 말씀이 새겨질 것이었다.
('2권, 15장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 중에서/ p.364)

마오쩌둥 이후의 ‘마오쩌둥 중국’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미라가 되어 지금도 톈안먼 광장 마오쩌둥 기념관 내 누워 있다. 중국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은 마오의 육체만이 아니다. 그의 사상과 이미지도 살아남아서 현대 중국을 떠받치고 있다. 미라는 후계자들이 움켜쥔 실체화된 정당성이다. 마오가 스탈린처럼 미라가 되었다가 화장되는 일을 아직 겪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중국이 마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추천사

여태껏 마오쩌둥에 관해 이처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 책은 없었다.
- Anne Thurston, WASHINGTON POST

표준 역사로 삼을 만하다. 독자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설득력이 있으며 … 자료가 풍부하다.
- John Simpson, BBC

문체가 수려하고 흥미롭게 읽힌다. … 엄청난 연구서이다.
- Terry Eagleton, INDEPENDENT

쇼트는 최고의 저널리즘과 최고의 아카데미즘을 결합했다.
-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필립 쇼트는 탁월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 그의 설명은 훌륭하다.
- GUARDIAN

완벽하고 대담하다.
- ECONOMIST

획기적인 전기이다.
- SUNDAY TIMES

최근에야 입수할 수 있게 된 중국의 방대한 자료들을 근거로 삼은 명작이다. … 독자들은 이제 가장 신중하고도 사려 깊으며 완벽한 마오쩌둥 전기를 읽을 수 있다.
- KIRKUS REVIEWS

이 극적인 전기는 … 마오의 특성에 대한 풍부한 해명을 시도할 뿐 아니라, 현대 중국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PUBLISHERS WEEKLY

목차

11장 옌안의 붉은 별 1937년~1946년
“전쟁에서 결정적 요소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이다.”

12장 새로운 중국의 탄생 1946년 여름~1953년 가을
“우리의 하늘은 중국의 인민대중이다.”

13장 백화운동와 대약진운동 1953년~1960년
“백 가지 꽃이 피어나고 백 가지 생각이 서로 다투게 하라.”

14장 불멸의 혁명을 위하여 1961년~1964년
“농민은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사회주의를 원한다.”

15장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 1965년~1968년
“조반유리,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16장 물러선 거인 1969년~1976년
“새 중국 건설과 문화혁명, 이것이 내가 한 두 가지 일이다.”

에필로그_마오의 유산
개정판 후기
1 _ 현대 중국 정치와 마오쩌둥 딜레마
2 _ 서방 연구자들의 마오쩌둥 평가

주석
주요 인물
마오쩌둥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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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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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널리스트, 작가. 1945년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퀸스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30년 동안 BBC의 특파원으로서 워싱턴, 모스크바, 파리, 도쿄, 베이징에서 일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국에서 거주하며 일했고,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며 대작 《마오쩌둥》을 집필했다. 이 책의 초판(1999)은 평단으로부터 마오쩌둥 전기의 ‘결정판’이라는 호평을 받았지만, 쇼트는 더욱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참고하고 기존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여, 20년 만에 전면개정판을 완성했다. 쇼트의 탁월한 필력이 돋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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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장칭], [트로츠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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