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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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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심경호
  • 출판사 : 알마
  • 발행 : 2018년 03월 27일
  • 쪽수 : 1224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9115992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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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영원한 화두인 예술과 정치의 대위법 속
몽유에 갇힌 순수세계를 향한 대군의 꿈

한 문헌학자의 28년 열정으로 그려낸 우리의 걸출한 문예인 안평대군 초상!!
훈민정음, 외교, 경전, 서예, 회화, 학문, 한시... 600년 사직의 정치와 문예의 토대가
만들어진 안평대군 시대의 생생한 재구성

600년을 간단없이 소곤소곤 전해져오는 안평의 걸출함, 그 실체 속으로 들어가다

이 책은 안평대군의 시간 이후 600년이 지나도록 문사와 예인들 사이에서 간단없이 회자되고 칭송되어왔던, 바로 그 안평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 문헌학자의 노작이다. 이 방대한 한 권의 책을 통해 안평은 더 이상 정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학문과 시와 그림을 사랑하는 예인들과 함께 순수 예술세계를 건설하려던 당대 동아시아를 통섭하는 시대정신의 혁명가로 새로 태어난다.
안평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대군의 신분으로 당대 최고의 화원인 안견에게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세인에게 익히 알려진 [몽유도원도]다. 그동안 미술사가들에 의해 알려진 바대로 이 그림의 모티브인 꿈을 꾼 이가 안평대군이라는 것, 그리고 안평대군이 고전문학 연구자와 서예가들이 칭송하듯 한시에 뛰어나고 명필이었다는 것, 역사가들의 서술에서 보듯 그의 바로 손위 형인 수양대군이 당대의 권력을 지닌 문사들과 친밀한 아우를 시기해 정난을 일으켜 제거했다는 평가.... 이런 것들이 그동안 알려진 안평의 초상이었다.
실제로 저자도 자료를 모으고 또 평전을 집필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은 ‘그가 야심가인가, 희생자인가’ 하는 점이었다고 한다. 편찬자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할 만큼 날조가 심한 [단종실록]을 통해서는 안평대군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안평대군의 시문을 모으고, 안평대군에게 헌정한 시문들을 되읽으면서 저자는 의문의 방식을 바꾸어야 함을 깨닫는다. "문학예술의 모임 자체가 권력행위로 간주되었던 시대, 국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대군의 행위는 실제 목적이야 어떻든 그 자체가 권력의 현시로 간주되었다는 점, 이것이 안평대군의 비극이 지닌 진정한 의미"라고.

한 문헌학자의 28년 열정이 생생하게 구축한 안평대군이라는 건축물
이 책은 안평대군이라는 6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물을 지금 우리 옆에 살아 있는 실존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들이 재료로 동원되어 지어진 건축물과도 같다.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고 기존의 번역을 바로잡아 가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을 해왔다.
이 책의 저자인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는 28년 전 일본 교토대학 유학시절 우연히 만난 [몽유도원도시화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간 김삿갓, 정도전, 김시습, 정약용 등 우리 역사 속 걸출한 인물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해 교양과 자긍심의 토양을 선사했던 그였지만, 정작 집요할 만큼 열정적으로 모았던 것은 안평대군의 초상을 완벽하게 그리기 위한 조각그림들이었다.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시문과 문헌들을 번역해 두면서 안평대군이 살던 시대를 재구성해왔다. 마치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인물에 대해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안평대군의 정신세계를 규명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삶을 추적했다.

지금 우리 역사 속 천재 문예인을 추억하고 현대사에 투영해야 하는 이유
문학예술 모임은 근대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대에서도 흔히 정치행위로 간주된다.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는 것이 예술가들의 친일파 논란도 그렇지만, 최근 예술과 정치의 엉뚱한 결합의 폐해에 진통을 겪지 않았는가. 저자는 안평대군의 경우처럼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개인의 파국 또한 그리 처참한 예도 그리 많지 않다면서, 청백의 순수예술 세계를 꿈꾸던 안평대군의 삶을 ‘35년간의 몽유’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깨고 나도 뒷맛이 씁쓸한 꿈. 책을 횡단하는 [몽유도원도]가 갖는 메타포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과 예술, 정치현실을 관통하는 씁쓸함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 인간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지만 한 인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그와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면 얼마나 즐거운가! 여기 조선 문화의 근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 귀공자가 있다.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한 시대의 문예를 주도했던 안평대군. 활활 타오르던 그 생명의 불꽃은 정치의 장에서 사그라졌지만, 그렇다고 그의 정신까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 안평대군의 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고독한 개인의 영역이나 자기목적적인 문화 영역으로 상승하지 못했다. 차라리 학문과 예술이 절대적 진지함과 엄숙한 번민을 자기 부담으로 지녔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른다. 학문과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현재의 한국 상황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저 15세기 초반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현재의 바람을 투영할 수 있겠는가!"

목차

머리말 어느 귀공자의 몽유 35년을 추억하며

제1부 끝과 시작
찬 바다의 신음
두려움과 권력
가계도
입양
거문고와 활

제2부 비해당의 산다화
문치의 현군
편찬사업
강역 안정
대군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
부왕의 기대
초상화와 찬
판결
훈민정음
분운
응골방서
매죽헌부
의방유취
불사
희우정
몽유
안평과 조사
중재

제3부 우담바라
승려들
현행서방경
묘법연화경
경찬회
책사
글씨
우의
의탁
반야

제4부 지성의 정화
편찬서
용비시
동국정운의 편찬
두보 시의 주석
팔가시선
산곡정수
완릉시선
향산삼체
반산정화
경오자 자본

제5부 예술혼
고헌의 취향
서화 소장
삼소도
송설체
비동의 미학
화가들
팔경시
사십팔영
무계정사
일시문
묵적
오인된 글씨
유묵과 모본

제6부 몽유도원도시화권
시화권




제7부 향기의 누설
사신 정선
정음청
길례
왕실의 불사
교유
담담정
급서

제8부 죽음
보위
의심
한명회
사은사
타는 울음
알력
제왕의 시문
정난
살해
공신교서
선위
경혜공주

제9부 추억
초혼
추모
안평사적
복관
잔향
운영의 애도

참고문헌
안평대군 연보
찾아보기
부록- [몽유도원도시화권] 일부

본문중에서

그 무렵 나는 교토대학 문학부 도서관의 개가식 서가에서 초주갑인자본 [찬주분류두시](중종조 인쇄 추정)를 발견하고, 그것을 귀중서 서실로 옮겨 보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찬주분류두시]와 관련된 논저를 여럿 발표한 바 있다.
30년이 흘렀다. 2015년 [진산세고晉山世稿]를 열람하다가, 강석덕의 [회주두자미시병서會註杜子美詩幷序]에서 "경회루 남쪽 행랑에 국局을 열고, 집현전의 사신詞臣들에게 명하여 전적들을 널리 탐구하고 정밀하게 교정을 가하게 하여 옛 설들을 모아서 책을 이루게 했다. 산정하고 취사하는 것은 한결같게 성상의 판단을 받았으되, ‘공’께서 실로 이 일을 주관했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공’이란 그 시의 본문에서 "편수가 어찌 쉬우랴, 총재는 동평이 맡으셨다[編修豈容易 摠裁屬東平]"라고 말했을 때의 ‘동평’이다. 동평은 본래는 후한 광무제의 여덟째아들로 학행이 뛰어났던 동평왕 유창劉蒼을 가리키되, 여기서는 안평대군을 빗대어 가리킨 것이다.
(/ p.8)

2014년 7월 1일 대교로 이어지기 전까지는 고립되어 있던 곳. 거기서의 사흘, 시간은 멈췄다. 문사들과 시를 읊고 왕명의 일들로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날은 몽유夢遊에 불과했던 것일까. 깨고 나면 등장인물의 윤곽마저 흐물흐물해지는 그런 꿈. 경강 하류를 거쳐 손돌목, 강화, 교동으로 올 때 바다는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일어났으리라. 그리고 교동에 머물면서 안평대군은 바다가 정말로 감옥의 벽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앞바다가 벽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안평대군은 [수해부囚海賦]라도 읊으려 하지 않았을까?
(/ pp.29~30)

안평대군은 과연 왕이 되고 싶어했던 것일까? 자신이 왕이 안 되더라도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라서 세를 규합한 것일까?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 일이 있었을까?
속내는 물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수양대군의 늑박 아래 반포해야 했던 교서에서 "친당을 널리 심고 중외에 나뉘어 거점을 마련하고는 죽을 각오를 하는 무사들을 몰래 양성하고 변방 고을의 무기를 가만히 들여와 불궤를 도모했다"라고 말한 사실은 저 날조된 [단종실록]의 기록 속에서도 확실한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안평대군이 환관들과 친했고, 무사들을 몇몇 거느렸으며, 지방관의 호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있다. 그러나 무사들을 양성하고 변방 고을의 무기를 가만히 들여온 사실 기록은 [단종실록]의 편찬자들이라 해도 끝내 어디에도 써넣을 수가 없었다.
(/ p.37)

세종은 재위 3년인 1421년 3월에 우선 [자치통감강목]을 주자소에서 간행하도록 명하고, 다음 해 겨울 집현전의 교정이 끝나자 1423년 8월 하사했다. 1434년 6월에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도록 지시하고, 대제학 윤회尹淮, 1380~1436 등을 매일 밤 어전에 들게 해서 친히 교정했으며, 9월 병신부터는 경연을 중단하고 그 편찬에 몰두했다. 1435년 6월 8일 경회루에서 통감훈의 찬집관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참석자 47명에게 찬집의 위업을 찬미하는 오언, 칠언의 시를 제술하게 하고는 승지 권채權採에게 그 응제시축의 서문을 짓게 했다. 당시에는 기념 시집을 두루마리 형태의 시권으로 엮었는데, 두루마리의 마지막에는 대개 그 시권을 엮은 경위를 서문으로 적었다. 마침내 1436년세종 18 2월 세종은 [자치통감사정전훈의]를 반포했다. 그 성과물을 주자소에서 인쇄하려고 할 때 안지安止, 1377~1464가 왕명을 받아 [자치통감훈의서]를 작성했다. [자치통감]에 [사정전훈의]를 첨입한 [자치통감사정전훈의資治通鑑思政殿訓義]는 갑인자 활자로 간행되었다.
(/ pp.86~87)

세종은 세자만이 아니라 진양대군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국정에 깊이 간여시켰다. 진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갖가지 산역과 불사는 물론 국가의 출판사업을 관장했다. 진양대군도 학문에 힘써서 세종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1436년세종 18 7월 집현전에서 [강목통감훈의]를 편찬하고, 그것을 활자로 인쇄할 때 그 대자는 진양대군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주조할 정도였다. 1436년 윤6월 가뭄이 심하고 재난이 빈번하자 세종은 근신의 뜻으로 진양대군의 집으로 이어移御하기도 했다. 1437년세종 19 22세의 진양대군은 종친의 일을 총괄하는 종부시의 좨주에 임명되었다. 지금까지 맡아보던 효령대군이 병들자 진양대군이 왕명으로 대신 맡게 된 것이다.
1439년세종 21 스물네 살의 진양대군은 집현전학사들과 서적을 교정하는 일에 종사했다. 곧 이해 6월 세종은 지중추원사 정인지에게 [자경편自警編]에 필적할 서적을 편집하게 했는데, 정인지는 [치평요람治平要覽]으로 그 뜻에 부응한다. 이때 세종은 진양대군에게 그 일을 맡게 하고, 선비들을 집현전에 모아 일을 분담시켰다. 임영대군이 왕명으로 금성대군과 함께 화포와 신기전 개발을 맡은 것과는 달리, 진양대군과 안평대군은 당시로서는 국가의 중대 사업을 맡았다.
(/ p.103)

안평대군은 세종의 뜻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1444년에 작성한 [당송팔가시선서唐宋八家詩選序]에 ‘存心養性존심양성 以事一人이사일인’의 8자 인과를 사용했다. ‘존심양성’을 ‘一人’, 즉 군주를 섬기는 일에 연결시킨 것이다. 또한 [서명]에도 "대군은 우리 부모의 종자이다[大君者 吾父母宗子]"라는 말이 있는데, 대군은 곧 군주를 가리킨다.
세종은 안평대군이 국가사업에 협찬해주길 기대하였기에 그에게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내려주었다. 안평대군은 "한편으로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 놀랐다." 그래서 궁궐의 문신들에게 그 사실을 두루 알려 기념하는 글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박팽년은 그 요청에 따라 [비해당기]를 지어, ‘비해’를 ‘지성불식’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것이 정치적 실천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 p.119)

세조는 친히 [주역전의周易傳義]에 구결을 달아 1466년세조 12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을 간행했다. 이것을 ‘강녕전 구결康寧殿口訣’이라 한다. 이처럼 수양대군세조은 역학에 밝았으며, 의리역보다도 상수역에 더 관심을 두었다. 특히 주희의 [역학계몽]은 퇴계 이황이 현창하기 전까지는 유학자들이라 해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조는 이미 수양대군 시절 이 책을 읽어 상수역을 연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글 창제의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득의 논리’로서 상수학을 차용할 때 수양대군이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정인보는 안평대군이 훈민정음 창제에 간여했다고 보았으나 그 사실은 아직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혹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를 안평대군이 썼다는 주장도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자체는 조맹부의 송설체로 쓰여 있는데, 안평대군은 송설체를 철저히 배운 서법가이기 때문에 그러한 말이 있게 된 듯하다. 안평대군의 시절에는 그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송설체를 중시했으므로 송설체의 글씨라고 해서 안평대군이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역시 입증이 필요하다.
(/ pp.168~169)

현재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보이는 감지금니紺紙金泥, 갈색 종이에 금가루로 씀의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이 전하고 있다. 이는 1446년세종 28 3월 24일 소헌왕후가 타계한 후 천도 불사로 베낀 것인 듯하다. 뒷날 1450년문종 즉위년 2월 19일계사 세종의 염습을 마치고 4월 3일 대자암을 중창한 후에도 안평대군은 강희안 등과 함께 여러 불경을 베꼈다. 그런데 세종의 천도를 위한 사경은 ‘정전금니’, 즉 ‘붉은 종이에 금글자’로 썼다. 따라서 감지금니는 소헌왕후의 천도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실물은 2008년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보묵寶墨]전에 선보였다. 이 [지장경]의 글씨는 두 가지로, 뒷부분은 약간 두터웠다. 최완수 선생님은 이 두터운 글씨를 강희안의 것으로 추정했다. 혹 이영서의 글씨일지도 모른다.
(/ p.209)

[도원기]에서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에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노닐었는데, 다시 보니 최항과 신숙주가 곁에 있었다고 하면서, 그들을 ‘동찬운자同撰韻者’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함께 ‘찬운’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며, ‘찬운’은 [동국정운]을 편찬한 것을 가리킨다. [동국정운]은 대개 1444년세종 26 2월 16일 세종이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개 등으로 하여금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운회의 번역’이 곧 [동국정운]의 편찬으로 이어지게 되어 1448년세종 30 [동국정운]이 간행되었다. 당시 세종은 동궁문종과 진양대군수양대군 및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했고,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9인이 실제 작업을 했다. 이현로도 당시 헌정한 부賦에서 "천인의 숙성한 덕을 가까이 하여, 부지런히 찬운에 종사했다만[近天人之夙德兮 蹇撰韻以從事]" 운운했으니, 이것은 그가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 pp.227~228)

안견이 그린 [도원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어 왔고, 여러 의문이 남아 있다. (...) 안평대군의 꿈은 궁중의 여러 일로 다망한 사람이 홀연 별세계로 들어갔다는 사실, 산관야복의 사람에게 길 안내를 받고 도화원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 몇몇 ‘찬운撰韻’의 동지들과 함께 별세계인 도화원을 유람했다는 사실, 그가 찾아간 별세계인 도화원에는 인간의 그림자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안점이 놓여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의 [도원기]를 읽고 제찬을 붙인 사람들은 대부분, 안평대군의 정신세계가 청한하여 다른 사람이 이르러 갈 수 없는 별세계를 어렵지 않게 도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안견이 그린 [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도화원에 이르는 길을 구불구불하고 중간에 끊어진 길로 묘사했다. (...)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이라는 존재적 경험이 결코 단순한 구조로 이루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 현존재의 생활이나 마찬가지로 꿈이라는 것도 직접성, 단순성, 순간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안견의 [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안평대군의 [도원기]도 안견의 [도원도]를 해설한 글이 아니다. 이 셋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있다. 그 의미 해석은 여전히 열려 있다.
(/ pp.229~230)

아마도 신숙주가 예겸에게 병서를 펴놓고 음운에 대해 물은 것은 9일 이후의 일인 듯하다. 신숙주가 병법의 음을 중국 사신에게 물은 것은 훗날 [역대병요歷代兵要]로 결실을 맺게 되는 책의 편집이 시작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1450년세종 32 세종은 정인지 등에게 명해 역대의 전쟁과 그것에 대한 선유들의 평을 집성하도록 하고, 그것이 완성되자 친히 ‘역대병요’라고 책명을 붙였다. 1451년문종 1 문종이 김구·김말·김담·서거정 외 6인에게 기록을 원전에 확인하고 음音에 대한 주를 보완하게 하는데, 이때 수양대군이 작업을 지휘하게 된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완성본을 올리자, 안평대군의 글자를 이용하여 주조된 경오자로 간행하게 된다.
(/ pp.323~324)

안평대군의 글씨로 2010년 무렵 간송미술관이 전주 A옥션 경매에서 구입한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가 있다. 안평대군이 32세 때인 1450년 7월 하순에 엄 상좌를 떠나보내며 쓴 글씨첩이다. 이 실물은 ‘원작 → 석각 → 석각의 탁본 → 석각의 탁본을 모사한 복제품’이라는 설도 있다. 돌 표면에 글자를 파낸 석각을 종이에 먹으로 뜬 탁본은 일반적으로 원작 글씨보다 필획이 가는데, 이는 도장을 찍을 때 인주가 묻은 면이 종이에 더 넓게 찍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이 글은 분명히 석각되어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석각본은 석판 1매에 4행씩 모두 8매에 모각했다. 마지막 판 끝에 소해小諧로 "己未孟夏 福昌君 楨 模刊"이라고 새겼다. 1679년 복창군 이정李楨, ?~1680이 석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의 이 글은 비단 바탕에 정세하게 모사한 것이 중국에 전하고 있다. 모서摹書도 두 종 전한다고 한다.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원본일 수가 없다. 판각복이나 석각본을 모서하되, 글자 형태가 또렷한 것들만 골라 임모해서 글자들을 이리저리 합성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판각되거나 석가되어 법첩으로 전했을 뿐 아니라, 불사의 권연을 위해 성책이 되기도 했다. 원본은 목판으로 만들 때 저본이 되었을 것이다.
(/ pp.367~368)

안평대군은 [용비어천가]의 한시를 제작하는 일을 총괄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 반포 이전인 1442년세종 24 3월 1일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445년 4월 5일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원고를 올렸다. 그 뒤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영손 등 집현전 관원이 주해를 첨부했다. 1447년 2월 10권 5책으로 성책되어 10월에 출간되었다. 현전하는 [용비어천가]는 시가와 주해로 이루어져 있다. 시가는 목조로부터 태종의 잠저 시기까지 6대에 걸친 창업의 사적을 칭송하고 후대 왕들에 대한 규간의 뜻을 담은 125장으로 편성되어 있다. 시가는 다시 국문 가사와 한시로 이루어져 있다. 1445년세종 27 11월 3일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용비시龍飛詩는 공덕을 가송歌頌하고 있는데, 그 체體는 [시경]을 본받아서 4언으로 지어 본뜻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여, 용비시가 [시경]의 4언체를 본받았다고 밝혔다. ‘용비시’는 한시만을 가리킨다.
(/ p.393)

안평대군 시문 12
[반산정화서半山精華序]
시詩란 지志가 가는[之] 것이다. 마음에 있으면 지志이고 말로 발하면 시詩이다. 그러므로 시에 어찌 잘되고 못 되고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그 지의 향하는 바를 볼 따름이다. 격률이 정세하거나 조잡함, 견사遣辭의 뛰어나고 못남은 위진 때 여러 현자들도 그 사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거늘, 고시의 경우에야 어떠했겠는가? 나는 그래서 "시는 천취天趣이다"라고 말한다. 옛날의 군자는 덕을 지녀 뜻을 구할 만하면 지가 이르러가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져 격률과 견사가 모두 법도에 들어맞았던 것이지, 조잡함을 버리고 정세함을 추구하거나 못남을 버리고 뛰어남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다.
(/ p.466)

안평대군은 많은 서화를 소장하고 감상했다. 신숙주가 세종 27년을축, 1445 맹추음력 7월 상순에 안평대군 소장의 그림들에 대해 [화기畵記]를 적은 것이 남아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모두 다섯 시대에 걸친 화가 35인의 산수화 84종, 조수초목화 76종, 누각인물화 29종, 글씨 33종 도합 222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성녕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것들을 물려받기도 했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28세 되던 한유韓愈가 795년당나라 신숙 덕종 정원(貞元) 11년에 독고생獨孤生을 위해 [화기畵記]를 작성했던 예를 본떠, 자신이 소장하는 그림들에 대한 기문을 신숙주에게 청했다. 이에 따라 신숙주는 [화기]를 작성해서 안평대군의 서화 취미에 대하여 상세히 밝혔다. 이때 신숙주는 백거이白居易가 803년당나라 정원 19년에 장돈간張敦簡의 가장家藏 그림 10여 폭에 대해 [기화記畵]를 적어준 일을 들어, 안평대군의 그림 소장은 그보다 더욱 성대한 일이므로 기문을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 p.501)

안평대군은 비해당을 단장하고 48영을 선정하여, 자신이 먼저 48영을 노래하고 문사들에게 차운을 청했다. 안평대군의 시에 차운한 사람들은 최항, 신숙주, 성삼문, 이개, 김수온, 이현로, 서거정, 이승윤, 임원준 등이었다. 최항의 [태허정집]에 실린 그의 시에는 후대인이 다음 주를 달아 두었다.

사십팔영은 별도로 인본印本을 참고하니, 안평대군이 칠언율시를 선창하고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이 차운했고,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김수온金守溫,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이승윤李承胤, 임원준任元濬 등 여덟 분이 혹은 오언율시나 칠언율시, 혹은 오언절구나 칠언절구로 각각 시를 지었다.

이를 보면 [비해당사십팔영시권]은 인본印本이 있었던 듯하나, 전존傳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안평대군의 원운原韻도 확인할 수 없다. 또 [비해당사십팔영]은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수온, 서거정 등 다섯 사람 것이 전하고, 이개, 이현로, 이승윤, 임원준 등 네 사람의 것은 전하지 않는다.
(/ p.618)

안평대군은 몽유도원의 꿈에서 본 곳과 같은 곳을 창의문 밖에서 찾아 무계정사를 지으면서, "나는 홍진을 싫어하고 산수를 좋아해서 이 집을 지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적들은 안평대군이 김보명의 풍수설을 믿고 그 정사를 지었다고 비난했다. 정권 쟁취의 제1단계라고 할 여론조작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기경도산수記京都山水]란 글에서, 무계정사가 인왕산 운장곡雲藏谷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감암坎巖과 응봉鷹峯의 사이에 위치했는데, 그곳은 금원禁苑의 뒤에 해당한다고 했으며, 그 때문에 죄를 입어 죽었다고 했다.
안평대군은 권력을 지향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수양대군의 권력 쟁투가 본의 아니게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권력 쟁투의 대상으로 간주했고,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영건을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 장악 계획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 p.708)

오늘날 안평대군의 유묵이나 진적으로 전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다만 친필의 유묵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몽유도원도시화권]에서 볼 수 있는 안평대군의 [도원기桃源記]와 [칠언제시七言題詩]는 가장 소중한 유묵이다. [보권계살생문普勸戒殺生文]1449년 12월 8일 휘호이나 이백의 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흑지黑紙에 금니金泥로 쓴 글씨, ‘만리관산계영추萬里關山桂影秋’ 운운의 칠언절구를 청지靑紙에 금니로 쓴 글씨도 유묵으로 확인된다. 그밖에 금니 사경寫經의 단편들이 여러 곳에 전하는데,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안평대군의 작으로 간주되어오고 있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안평대군의 진적을 바탕으로 석각되거나 목각된 것도 있고, 그것들을 재구성해서 판각된 것도 있다. 정황으로 보아 진적을 모각했거나 모각을 다시 모서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더러 있다. 이러한 모본模本들은 비록 친필의 유묵은 아니지만 안평대군 운필의 힘과 속도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더구나 하위지河緯地 작성의 [권농교]를 휘호한 글씨를 새긴 목판본은 안평대군의 비동하는 서체를 비교적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
(/ p.773)

담담정은 마포 북쪽 오석강 가까이 조선 초 독서당 부근에 있었다. 본래 안평대군의 소유였으나, 계유정난 이후에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 모아서 십이경 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팔영四十八詠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라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본편에는 "옛터가 삼개[麻浦] 북쪽 언덕에 있는데,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이었다"라고 하고, 이극감과 강희맹의 시를 부기했다. 신용개申用漑는 [오석강에서 저녁에 바라보다[烏石岡晩眺]] 시에서 담담정 주변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산언덕은 독서당 서쪽 백 보쯤 되는 곳, 담담정 동북쪽에 있다. 올라가서 바라보면 극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산언덕 머리에는 오석이 있어, 사호士浩가 반산半山, 황정견의 시에 나오는 ‘오석강 머리의 길[烏石岡頭路]’이라는 구절을 따서 그곳을 오석강이라 이름 했다.

창산이 열렸다 닫히는 곳, 해문이 긴데 蒼山開闔海門脩
낙조 안개는 흩어져 걷히지 않았구나. 落日風煙散未收
짙었다 옅어지는 무변무제 태깔을 그리려 하지만 欲寫無邊濃淡態
밤나무숲 모래톱에는 어느새 가을빛. 秋光已在栗林洲
(/ pp.929~930)

단종 원년1453, 계유 10월 10일계사, 수양대군은 최사기와 의금부도사 신선경에게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성녕대군 집으로 가서 안평대군을 잡아오게 했다. 또 삼군진무 나치정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우직을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는 안평대군을 이우직과 함께 압송하여 강화에 두고, 또 사람을 시켜서 안평대군에게 말하기를 "네 죄가 커서 주살하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세종, 문종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안평대군은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양화도에 이르러 종 영기永奇에게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며 "급히 가서 김종서 정승에게 때가 늦었다고 말하라" 했다고 한다. 또 안평대군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석河石이 반드시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니, 네가 꼭 뼈를 거두어 오라. 내가 다시 보고야 말겠다"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 p.1047)

1456년 병자화, 즉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가고, 남편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유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듬해 단종이 죽고, 다시 4년 뒤 정종이 죽었다. 정종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공주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관노비가 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무렵 수양대군당시는 임금은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불렀다.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 p.1076)

안평대군이 사사된 후 무계정사, 수성궁비해당, 담담정 등 그와 인연 깊었던 건물들은 훼철되거나 황폐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한 모든 기록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영향력은 결코 시들지 않았다. 초혼의 의식이나 안평대군 관련 인물의 속량 등은 별개로, 안평대군의 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진적을 소중하게 보존하면서 안평대군에 대한 추모의 뜻을 낮은 목소리로 드러내었다.
선조 때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안평대군이 쓰던 벼루를 얻고는 감회에 젖어 글을 지었다. [안평연기安平硯記]가 그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윤근수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자본으로 활자를 만들어 [한문韓文]을 간행한 일이 있다. 그만큼 안평대군을 추모하는 정이 남달랐다.
(/ p.1089)

덴리도서관에는 편자 미상의 필사본 [안평사적安平事迹]이 있다. 대개 [팔가시선], [완릉매선생시집], [비해당소상팔경시권], 담당정 관련 시, [용재총화] 등 필기야담 속의 안평대군 관련 기록을 모은 것이다. [동문선]의 무명씨 작 [팔가시선서]가 안평대군 작임을 몰라 수록하지 않았다. 또한 [비해당사십팔영시권]과 관련해서는 신숙주 [제비해당사시도題匪懈堂四時圖], 성삼문 [비해당사십팔영 병인匪懈堂四十八詠 幷引], 최항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 등을 수록하지 않았다. 담담정 관련 시로는 강희맹의 [담담정십이영淡淡亭十二詠], 이극감의 [담담정淡淡亭] 등을 채록하지 않았다. 그 편자는 [몽유도원도시화권]을 열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화축의 제찬시와 문, 부를 언급하지 못한 것은 물론, 문집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을 최항의 [도원도삼십운桃源圖三十韻]을 채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숙권의 [패관잡기]에서 [몽유도원도시화권]과 최항 시에 관해 언급한 기록을 채록한 것은 [몽유도원도시화권]의 유전流傳 상황을 이해할 때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 p.1097)

차상찬의 이 야담소설은 실은 앞서 본 서형수의 [최생전]을 통속적으로 번안한 것이다. 그런데 서형수의 [최생전]이나 차상찬의 [안평대군의 실연]은 [운영전]과 모티브가 비슷한 면이 있다. 운영이 대군의 궁녀였던 데 비하여 이 야담소설의 여주인공은 평양 기생이다. 하지만 모티브는 [운영전]과 비슷하다. 한시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발상도 똑같다. 그런데 [운영전]과 마찬가지로 이 야담소설에서도 안평대군은 사랑의 패배자로 등장한다. 안평대군은 "용모 풍채가 일세를 압도함은 물론이고 풍류호방한 중에도 명필로 세상에 유명해 당시에 서로 교류하는 이가 일대 명사 아닌 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궁녀나 기생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궁녀나 안평대군이 마음에 둔 여인을 쟁취한 남성도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않는다.
재능과 신분의 면에서 모든 것을 갖춘 존재를 이겨보려는 빈한한 선비나 글쟁이의 원한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르상티망이다. 그러나 사랑의 삼각형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평대군 주변의 존재들은 안평대군과 함께 비극을 맞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에 대항해 그를 극복하는 순간 안평대군으로 상징되는 무목적의 열정도 파국을 맞는다.
(/ p.1124)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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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한국 한문학사와 한시 및 한문 산문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한문 기초학, 한국 한문학사, 한문 논리·수사학사 관련 문제들이다.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1-4](단독 및 공저, 1993-1999),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1999), [김시습평전](2003), [한문산문미학](2013), [한국 한문기 초학사](2012), [안평대군평전](2016 출간 예정) 등이, 역서로 [금오신화](2000), [역주 원중랑집](공역, 2004), [증보역주 지천선생집](공역, 2008), [서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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