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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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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를 책임지듯,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책임져야 합니다.”


    기돈 크레머(1947- )의 연주 인생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엇비슷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으니, ‘그가 곧 바이올린’이고 ‘바이올린이 곧 그’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지난해 가을, 영국의 음악 전문 잡지 〈BBC 뮤직 매거진〉이 100명의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1위로 꼽히는 기염을 토했다. 위대함의 기준이 비단 기술적인 연주 실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주한 세월의 총량만을 의미하는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무엇이 동료 연주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이토록 큰 영예를 선사하게 했을까.
    하지만 정작 이 대가는 타이틀이나 왕관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유는 딱 하나. 연주자라면 다른 무엇보다 ‘음악’ 자체에 집중하고 헌신하는 게 역할이고 사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혹은 인기를 얻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로서 자신들이 연주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궁구한다.
    화려한 이력으로 따지자면 그를 따라올 자가 드물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한 뒤(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설문조사에서 산 자 죽은 자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1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가니니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세계적인 대회를 휩쓸었다. 유럽과 북미의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함께 거의 모든 주요 연주회 무대에 서서 최고의 지휘자들과 협연했으며,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크레메라타 발티카’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발트 3국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음악 페스티벌과 콘서트홀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다. DG, 텔덱, 논서치, ECM 등 세계적인 레이블과 수십 장의 음반을 녹음한 것은 물론이다.
    기돈 크레머는 기본적으로 음악에 몸담은 사람이지만, 정치나 사회 현안에 대해 소신껏 의견을 밝히는 대표적인 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그의 조국이 소련에 속해 있던 시절 받았던 영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 스스로 “내가 만약 소련과 같은 희한하고 오염된 나라에서 성장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타인의 의견에 덜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 같다”고 얘기한 것처럼, 기돈 크레머는 항상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점검해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위와 같은 눈부신 이력에도 불구하고 노장의 예술가에게 ‘겸손’이라는 미덕, ‘가장 위대한 연주자’의 타이틀을 안긴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아우렐리아를 향한 거장의 따뜻한 충고와 가르침

    《젊은 예술가에게》는 바로 이 거장이 예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책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2013년 독일어로 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Briefe an eine junge Pianistin》(홍은정 옮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저서 부분과 2015년 발표한 영어 에세이 〈루트비히를 찾아서Searching for Ludwig〉(이석호 옮김) 부분이다. 한국어판 《젊은 예술가에게》에는 저자의 요청으로 이 둘을 한데 담았다. 전자는 가상의 젊은 피아니스트인 아우렐리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들을 모은 1부와, 현대 음악계의 모든 폐해를 가진 오케스트라(일명 ‘무능력자 연합 오케스트라’)를 상정해 현실을 반어적으로 꼬집은 2부 ‘악몽 교향곡’, 그리고 1부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연주자들에게 전하는 당부를 성경의 십계명에 빗대어 ‘연주자의 십계명’이라 이름 붙인 3부로 구성된다. 한국어판에서 4부로 구성한 ‘루트비히를 찾아서’는 크레머가 프랑스 클래식 음악 전문 잡지인 〈디아파종Diapason〉의 의뢰를 받아 세계적인 지휘자와 바이올리니스트가 협연한 열 장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을 비교 청취해, 그중 최고의 연주를 꼽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원제는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예술’의 본질을 묻고 있으므로 내용은 모든 예술 분야에 대해 열려 있다. 열 번의 이어지는 편지 속에 기돈 크레머가 인생의 선배로서 혹은 동료 예술가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따뜻한 충고와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이 담겨 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한마디로 상업주의에 물드는 예술이다. 가상의 후배 아우렐리아에게도 이 점을 가장 강조한다. 이제 막 날개를 달기 시작한 젊은 예술가들은 수치화되는 성공, 출세에 연연하기 마련이다. 판매량, 빈번한 무대 출연,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계약, 수많은 대중의 열광은 물론 달콤한 것이지만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영혼을 잃는다는 노거장의 이야기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다. 그 역시 젊은 시절 야망을 좇았음을, 그 대가로 얻은 것은 공허함뿐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훌륭한 예술가의 조건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칭송받는 대가大家를 본받는 것은 좋지만, 그들과 똑같아지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기 안에서 독창적인 개성을 끄집어내고, 스스로 선택한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지 않을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몽상에 자주 젖는 이상주의자라 하고 그 스스로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지만, 음악이 이상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예술가가 몽상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글 가운데 등장하는 숱한 예술가들의 이름도 흥미롭다.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에서부터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초월하여 지금의 자신이 되도록 이끌어준 거장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동료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비롯하여 자신이 진정 위대한 음악가라 여기는 ‘진짜’들, 유능하지만 위태롭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젊은이’들을 실명으로 언급한다.
    또한 최근 세계적 콩쿠르에서 자신의 목소리 없는 연주자들이 수상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자신이 꼽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늘 수상권을 벗어난 ‘4위’에 오르는 사실을 전하며 이들을 ‘크레머 상’ 수상자라고 씁쓸하게 이야기한다. 이들 가운데는 젊은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강주미, 1987-)의 이름도 눈에 띈다.
    3부 ‘연주자의 십계명’에 가서는 그런 그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진다. 연주자에게 있어 신은 곧 음악이어야 하며 콩쿠르 수상, 훈장, 국내외의 상, 상금으로 대표되는 우상을 섬기거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영감이 중요한 음악가에게는 안식일이 거룩히 지켜져야 하며, 음악을 연주할 때는 작곡한 이의 심중을 충분히 읽어내고 의도와 동기를 살려 작품을 죽이는 일이 없어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살인하지 말라’). 연주자의 개성에 관한 저자의 뚜렷한 주관은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음향을 탐내지 말라’와 같은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최고의 음반을 찾아가는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기돈 크레머의 예술 철학이 모두 녹아 있는 글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베토벤의 곡을 연주한 최고의 연주자와 지휘자의 음반을 감히(!) 평가해야 한다는 부담도 잠시, 저자는 파트너십, 템포, 슬라이드, 페르마타, 카덴차, 내용, 개성 등을 심사 기준 삼아 까다롭고 엄격하게 청취해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말마따나 바이올린 협주곡에 관해 그 어떤 완전무결하고도 이상적인 해석이 있을 수는 없지만, 생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추앙받는 이의 음악적 경험치와 판단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가 꼽은 최고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무엇일까.
    세상에 스타는 많다. 온갖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에게 쏟아지지만,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진정한’ 예술가는 드물다. 인기와 성공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아 으레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고, 어찌 보면 그게 또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노장의 예술가는 말한다. 그런 당신의 모습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다만 그 모든 길을 먼저 걸어본 자신의 이야기에 조금만 귀 기울여달라고. 이제 세상의 모든 아우렐리아가 주의를 기울일 차례다.

    목차

    1부.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
    첫 번째 편지
    두 번째 편지
    세 번째 편지
    네 번째 편지
    다섯 번째 편지
    여섯 번째 편지
    일곱 번째 편지
    여덟 번째 편지
    아홉 번째 편지
    열 번째 편지

    2부. 악몽 교향곡

    3부. 연주자의 십계명

    1.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음악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5. 대가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유혹에 빠지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음향을 탐내지 말라

    4부. 루트비히를 찾아서
    1. 프렐류드
    “그래야만 하는가?”

    2. 주제, 그리고 제1변주부터 제5변주까지
    파트너십
    템포
    슬라이드
    디테일의 신비
    또 다른 디테일, 페르마타

    3. 간주곡: 스케르찬도

    4. 제6변주부터 제9변주까지
    카덴차
    내용
    개성
    진정성, 진실성, 대중성

    5. 피날레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했다!”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난 함정에 빠져들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곤 합니다. 또 끊임없이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옛것이든 새것이든) 유명한 작품들을 한자리에 세우는, 낯선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찾아가는지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되새겨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음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왜 이렇게 회의적이냐고요? 아마 내가 계략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성과와 그로 인한 결과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음악의 창공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다행히 독창적인 별들도 있습니다. 내 관심은 바로 이들을 향해 있답니다.
    (/ pp.26~27)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야망에 끌려다녔답니다. 그때는 나도 야망의 시도에 왜 매번 저항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요. 오랫동안 청중이 넘쳐나고 스타의 명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평판이 좋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대받거나 스위스의 베르비에 페스티벌에 가서 친구들을 든든히 받쳐주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다고 믿었죠. 난 아무 생각 없이 ‘사교계’에 도취되었고, 가능한 한 많은 ‘유명인사들’을 모아 최소한의 짧은 리허설을 거친 뒤에 함께 무대에 세우는 기획자의 야망을 따라갔습니다. 이런 식의 페스티벌은 음악이 아닌, 공허함의 놀이마당입니다.
    (/ pp.28~29)

    ‘전문가들’은 또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들만 해대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라나는 새싹들을 반격하고 위험에 방치하는 자들이 되고 말지요. 이런 식으로 지배층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지배층은 유치한 규범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체계에 완전히 동화하기를 요구합니다. 음악계에서 누군가가 지배층이 정해놓은 길, 즉 확실히 상업적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그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지배자는 그런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그를 아나키스트 내지는 이방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럼 그의 이름은 쉽게 잊히겠지요.
    (/ p.32)

    장담하건대, 마리아 칼라스(1923-1977)나 파블로 카살스 같은 음악가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주하는 방식이나 자신의 목소리나 첼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숙함이 아니라, 그들의 진술입니다. 그들의 말에는 다른 예술가와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특징이 배어 있습니다. 펠리니(1920-1993)가 이런 말을 남겼죠.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 p.58)

    명예로운 칭호, 상금, 그래미 상, 음악 콩쿠르 수상, 화려한 성공, 훈장, 메달, 금주의(이달의, 올해의) 음반, 평점이 높은 비평, 순위, 웹사이트, 국내·외의 상, 국가나 국가가 아닌 집단이나 개인이 수여하는 상, 대가 연주자들과의 비교, 박수갈채, 환호…… 이 모든 것은 공허하다. 이것들이 애써 노력한 성과에 대한 칭찬이고 표창일 수는 있지만, 음악에 헌신하는 것의 가치는 그 무엇으로도 평가될 수 없다.
    (/ p.91)

    무엇보다 연주자는 ‘작품’을 사랑해야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 사랑은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힘이며, 그 사랑에는 모든 것을 영원하게 만들어주며 위대한 예술가들의 음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은총이 깃들어 있다. 이들 중에서 몇 사람의 이름만 나열해보자. 파블로 카살스, 글렌 굴드,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레너드 번스타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피셔 디스카우는 이를 멋진 말로 표현했다. “음악가가 음악을 위해 헌신해야지, 음악이 음악가를 위해 존재해선 안 된다.”
    (/ p.92)

    진정한 음악가는 자신이 한 ‘해석’에서 신화를 창조해서는 안 되며, 다른 더 좋은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이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고귀한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까지다. 그것을 통해 그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날아오를 수 있다. ‘전문가’랍시고 작곡가를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려 해서는 안 되며, 그의 의중을 악보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 없이 계속해서 찾고 노력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연주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 p.94)

    “음악가여, 멈추고 정신을 차려라! (금요일이든 아니면 월요일이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그래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감의 원천은 산이나 바다가 될 수도 있고, 은방울꽃이나 난초, 말이나 음향, 목소리나 생의 노래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음향도 직접 만들지는 말라.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라!”
    (/ p.97)

    세상은 음악에 대한 충심을 잊고 성공(혹은 수익?)에 매달리라고(행동도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중요한 건 고객(청중)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홍등가에서나 볼 법한 태도 아닌가? / 진정한 사랑은 결코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니다. / 그것의 순수함과 신비로움은 보존되어야 한다. / 강렬한 감성이 빚어낸 음악 역시 지켜져야만 한다. 깨지기 쉬운 감성을 우리가 잘 지키고 함부로 유통시키지 않아야 음악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 / 본분을 저버린다는 건 배반을 의미한다. / 배반은 우리를 쾌락으로 몰아넣고, 열광과 이익에 목매게 만들며,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도외시하게 한다. 그러면서 배반은 우리에게서 본질적인 것, 즉 높고 숭고한 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선사된 우리의 재능을 앗아간다. …… 배반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락으로 떨어지고 우리 자신을 잃게 된다.
    (/ pp.109~110)

    젊은 연주자는 반드시 자기 확신, 스스로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때 대가의 도움은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충분히 받을 만한 것 같은데도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는 이들도 많다. / 그러니 기회가 선물처럼 주어진 이들은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말이나 물질적인 측면으로 그 감사가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언제가 됐든 ‘진짜’ 후배 음악가들에게 그 기회를 베풀겠다는 의무감을 갖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하면 된다. / 나의 운명적인 선물은 위대한 예술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께 8년 동안 사사하며 그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난 그분의 감동적인 말씀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기돈, 자넨 이제 내 제자가 아니라 내 동료일세.” 요즘은 그처럼 진정한 스승이라 부를 만한 고결한 인물을 만나기 힘든 것 같다.
    (/ p.119)

    진정한 오르페우스가 되고자 한다면, 사랑을 찾아 나서고 그 길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견뎌내야만 하며, 자신에게 유일한 길잡이이자 순수함과 가치의 척도인 에우리디케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 p.120)

    음악가 간의 상호 존중은 누가 뭐래도 성공적인 연주의 필수 요소다. 상호 존중이 전제된다면 서로의 연주를 ‘따르는’ 데 필요한 공간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작품을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기게 된다. 바로 그러한 종류의 ‘대담함’은 작품에 신선한 통찰력을 불어넣게 되고, 이는-예술가와 관객이 공히-응당 ‘해석’이라 부를 수 있는 성질의 연주로 이어지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 pp.140~141)

    여러 연주를 들어보면 바이올리니스트들마다 각자의 ‘지문’을 남기려 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그러나 ‘지문’ 운운했다고 해서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넘겨짚어선 곤란하다. 결국 대부분의 연주자는 악보를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저마다의 본능을 따르는 것이니 말이다. 걸작을 파괴할 의도로 달려든 흔적은 내 앞에 놓인 후보작 가운데서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연주자에게 씌울 수 있는 최악의 혐의는 자신의 에고를 작품보다 윗길에 놓는 것인데, 열종의 음반은 모두 최소한 그러한 혐의로부터는 자유로웠다.
    (/ p.167)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좋아하는 뮤지션의 연주를 모방하는 것이 해석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결국 해석이라는 것은 작품 창조에 부수되는 이차적 직종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개인적 감정을 흉내 내려는 시도는 결국 영감의 원천이 되어야 할 작품으로부터 더욱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해석자는 작품 그 자체와 작품을 쓴 작곡가를 창조의 샘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영감을 읽어내야 한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느낌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우러르는 역할 모델의 해석을 맹종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건 그릇된 처사다. ‘모조품’이자 ‘위조품’으로밖에 이어지지 않는 악수惡手인 것이다.
    (/ p.172)

    수상 결과가 발표되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우연의 일치였을까? 심사위원단의 표결 논리가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유로비전 콘테스트처럼 심사위원진의 표결 과정에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점찍었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4위에 입상했다! 참고로 내가 찍었던 친구들의 면면을 이 자리에서 밝히자면 첼리스트 파블로 페란데스(1991- )와 피아니스트 뤼카 드바르그(1990- ),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강주미, 1987- )이다. 재미 삼아 나는 이들 4위 입상자들을 ‘크레머 상’ 수상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만 그랬던 게 아니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두 신입 단원 역시 내가 골랐던 출전자들을 그대로 골랐다고 했다. 선택지가 겹친 데에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다.
    (/ pp.175~176)

    나는 ‘우리가 연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런 물음이겠다. ‘연주자가 됨으로써, 그리하여 녹음 스튜디오와 무대에서 고금의 걸작을 해석하는 일을 떠맡음으로써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이유는 무엇인가?’ 바흐의 음악을 아무런 표정 없이 내달리는 식으로 연주해버린 어느 학생의 연주를 듣고 해주었던 말마따나, “왜 사람들이 돈까지 내가면서 자네 연주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 pp.176~177)

    젊은 시절에는 좀처럼 정복하기 힘든 까다로운 기교에 집중했고, 확실히 그 산을 넘는 과정은 지난한 도전의 길이었다. 그러나 기교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음악에 있어서 진짜 어려운 것은 악보를 읽고 이해한 뒤 연주를 통해 악보 이면에 감춰진 모든 것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표면(악보)은 투명할 수도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보가 제아무리 쉬워 보인다 한들 거기 담긴 초월적인 내용을 보고 경험하고 이해한 뒤 감정에 실어 듣는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 pp.188~189)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후기 사중주나 슈베르트의 가곡, 피아노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음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곡이다. 단정하고 충실하며 순수한 기념비와도 같은 작품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일 기호 식품과 달리 그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원천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영겁의 시간 동안 해안을 쓰다듬으며 부서지는 파도처럼, 긍정적인 에너지의 바다가 우리 모두를 채워준다. 앞으로도 몇 겹의 세대가 살고 져도 그리 될 것이다.
    (/ p.189)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일상생활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언어로서의 음악은 너무도 알쏭달쏭한 것이어서 연주가 일정 수준의 신비감을 품지 못한다면 결코 완벽한 연주로 인정할 수 없다. 개성적인 독해나 감정이 결여된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과 같은 ‘재료’를 고루 아우른 연주라야 비로소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pp.191~192)

    음악과 책, 영화, 일인극 등 장르를 막론한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바는 대중성이 아니라, 때로는 모든 규칙을 깨부수고서라도 우리를 심원한 감정과 새로운 발견으로 이끄는 그 무엇이다. 시끄러운 말과 화려한 색채, 숨 가쁘게 빠른 음표, 높은 평점 따위로 치장되었다 한들 그것은 우리를 압도하는 예술 경험의 담보가 되지도 못하고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내 변함없는 바람은, 걸작에 걸맞은 완벽한 해석은 뭔가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p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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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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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이자 바이올린의 대가였던 카를 브뤼크너(1893-1963)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양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리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 연주자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1967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했고, 1969년 몬트리올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같은 해 열린 파가니니 콩쿠르와 1970년 차이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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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음악학을 공부했다. 2004년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1960년대 현대음악에서의 그룹 임프로비제이션]이라는 논문으로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문화 예술 교육 분야의 일을 하면서 꾸준히 번역 작업도 하고 있다.
    역서로 [피아노를 듣는 시간] [혹등고래가 오페라극장에 간다면] [음악가의 탄생] [어린이를 위한 음악사](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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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그라모폰 코리아』의 편집 기자를 거쳐 EMI 뮤직의 클래식 부서에서 일했다. 지금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과 관련된 좋은 책을 옮기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다시, 피아노』,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왜 말러인가』, 『바그너, 그 삶과 음악』, 『드보르자크, 그 삶과 음악』, 『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 『버르토크, 그 삶과 음악』, 『로드리고, 그 삶과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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