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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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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안승일
  • 출판사 : 연암서가
  • 발행 : 2014년 12월 20일
  • 쪽수 : 52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94054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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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스러져간‘혁명적 로맨티스트’들의 꿈과 좌절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주역인 레온 트로츠키는 정적 스탈린에게 쫓겨 그의 ‘연속혁명’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망명지 멕시코에서,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동적 테러’에 의해 독일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역 중국에서 혁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조선 혁명가 김산은 일제 첩자로 몰려 옌안延安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였고,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하투쟁을 하던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망을 피해 월북한 후 정적 김일성에게 국가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였으며, 박헌영과 뜻을 같이하며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을 지휘하던 이현상도 지리산 자락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한편, 공산주의 혁명가로 활동하다가 전향한 후 사회 민주주의적 ‘제3의 길’을 모색한 조봉암은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던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자본주의 최강국인 미국의 코앞에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볼리비아 정글에서 또 하나의 혁명을 꿈꾼 전설적인 게릴라 ‘영웅’ 체 게바라는 안데스 산맥에서 마지막 피를 뿌려야만 했다.
저자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 혁명적 로맨티스트들의 혁명운동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들의 꿈과 좌절, 사랑과 증오, 믿음과 배신, 그리고 고뇌와 결단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레온 트로츠키 -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설원의 젊은 ‘사자’
로자 룩셈부르크 - ‘유토피아’ 세계로 날아가다 추락한 외로운 암‘독수리’
김산 - 이역 중원中原에서 ‘아리랑’의 한恨을 묻은 고결한 순교자
박헌영 -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분단시대의 기아棄兒
이현상 - 죽음, 그 자체도 신화가 되어버린 전설적인 빨치산 ‘영웅’
조봉암 - 반공 이데올로기로 겉 포장된 독재정권의 희생자
체 게바라 - 혁명을 위한 혁명에 영육을 불사른 자학적인 휴머니스트

목차

|서문| 역사의 격랑 속에서 스러져간 ‘혁명적 로맨티스트’들의 꿈과 좌절

레온 트로츠키-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설원의 젊은 ‘사자’
역사의 급류를 헤치고 | 우크라이나 초원의 어린 ‘사자’ |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오데사 학창시절 | 니콜라예프에서 만난 운명의 여인 알렉산드라 | 첫 번째 투옥과 옥중 결혼,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 극적인 탈출 | ‘역사의 문’을 두드리다, 두 번째 여인 나탈리아 | 망명 혁명조직의 계파 간 갈등 |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과 12월 무장봉기 | 두 번째 시베리아 유형과 재탈출 | 지루한 망명 생활 | 1917년 ‘2월 혁명’과 제정 러시아의 붕괴 | 레닌과 트로츠키의 귀국, ‘볼셰비키 10월 혁명’ | 가을밤의 열기 속에서 | 혁명정부의 대내외 위기와 트로츠키의 맹활약 | 레닌의 사망과 트로츠키의 고립 | 스탈린의 승리와 트로츠키의 영구추방 | 망명지에서의 왕성한 저술활동 | 망명지 멕시코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 멕시코 밤하늘에서 진 러시아의 ‘붉은 별’

로자 룩셈부르크-‘유토피아’ 세계로 날아가다 추락한 외로운 암‘독수리’
살아있는 ‘혁명의 불꽃’ | 꿈 많은 지체장애 소녀 | ‘진정한 삶’을 찾아서 | 운명의 남자 레오 요기헤스 | 실망만 안은 플레하노프 방문 | 경제학 박사로서의 의욕적인 사회 첫 출발 | ‘독수리’의 비상 |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 로자와 레오의 갈등 | 첫 번째 투옥과 바르샤바행 | 투옥, 그리고 병보석 석방 후 탈출 | 레닌을 만나다 | 사랑에 빠진 로자 | 극적인 탈출 후 돌아온 레오 | 로자의 마지막 시련 | 고독을 이겨낸 [자본 축적론] 저술 | 재수감 생활 | ‘독수리’의 처참한 추락

김산-이역 중원中原에서 ‘아리랑’의 한恨을 묻은 고결한 순교자
[아리랑]으로 부활한 잊힌 혁명가 | 암울한 시대의 잿빛 추억 | 일본에서 아나키즘을 접하다 | 큰 꿈을 안고 대륙으로 | 상하이에서 만난 세 인물 | 의열단을 만나다 | 베이징에서 만난 ‘붉은 승려’ | 중국 ‘대혁명’ 속으로 | 광저우 코뮌(Commune)과 ‘3일 천하’ | 패배 속에서 경험한 따뜻한 동포애 | 동지들과의 극적인 재회 | 베이징에서의 사랑과 저술활동 | 참담한 귀향 | 당적을 박탈당하다 |또다시 체포되다 | 베이징에서의 결혼과 재기의 몸부림 | 옌안에서 ‘순교’하다

박헌영-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분단시대의 기아棄兒
이데올로기의 열풍 속에서 | ‘빗돌거리’의 반항아 | ‘상하이 고려공산당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다 | 상하이 ‘삼총사’의 국내 잠입과 투옥 | ‘1·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과 박헌영의 ‘광기’ | 박헌영의 재투옥과 김단야의 최후 | 출옥 후 ‘경성 콤그룹’ 지도자로 영입되다 | 박헌영의 동거녀 정 여인과 아들 원경스님의 기구한 사연 | 유명무실해진 ‘건준’ 결성과 ‘조선 인민공화국’ 선포 | 조선공산당 재건과 박헌영의 ‘8월 테제’ | 김일성의 등장과 북조선 노동당 | ‘찬탁’·‘반탁’을 둘러싼 좌우 대립 |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항쟁’ | 남로당의 창립 | ‘자의반 타의반’ 월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취임 | 북에서 누린 마지막 행복(?) | 피로 물든 남녘 산하-제주 4·3항쟁 및 여수·순천반란사건 | 잰걸음 김일성, 초조해진 박헌영 | 남로당 붕괴되다 |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고착화 | 박헌영과 그 측근들의 비참한 최후

이현상-죽음, 그 자체도 신화가 되어버린 전설적인 빨치산 ‘영웅’
지리산은 말이 없다 | ‘바깥 가마실골’ 후덕한 면장 집 막내아들 | 운명의 ‘6·10만세’ 사건 | 4년 중형을 선고받다 | 이재유의 ‘재건동맹’에 참여, 재투옥 | 출옥 후 한때 덕유산 은둔 | 해방공간에 서의 사회 활동 재개 | 남로당 간부부장이 되다 | 모스크바 유학 좌절과 그 전말 | 운명의 산, 지리산으로 | ‘반란사건’ 지휘자들의 전사와 전열의 재정비 | 애처로운 ‘문화공작대’의 활동 | 살아남아 시인이 된 김영의 슬픈 삶 | 북상 중 고향에서 만난 어머니 | 산중 애인 하수복과 이현상의 인간애 |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남부군’)로 개편되다 | 잔혹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 | 남부군의 전성기에 밀어닥친 괴질 | 불씨를 남긴 송치골 ‘경험교환회의’ | ‘영웅’ 박종하의 죽음과 이현상의 시련 | 빗점골에서의 의문의 최후 | ※뒷이야기 토벌대 대위와 빨치산 여인의 비련 |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기구한 운명 | 빨치산‘별’들의 추락과 ‘인민 유격대’의 종말

조봉암-반공 이데올로기로 겉 포장된 독재정권의 희생자
굴절된 한국 현대사의 ‘풍운아’ | 3·1독립만세운동에 뛰어든 ‘강화도령’ | 일본 유학 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수학 | ‘신흥청년동맹’가입과 첫 여인 김조이와의 만남 |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 상하이에서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설치 | 상하이까지 찾아온 김이옥 여인 | 신의주 감옥생활 | 출옥 후 동지들로부터 외면당하다 | 공산주의와의 결별, 전향하다 | 제헌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다 | 제2대 국회 부의장이 되다 |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안’ | 제2대 대통령 출마와 3대 국회의원 출마 좌절 | 희한한 ‘사사오입개헌’ 사건 | 진보당 창당준비위 발족과 조봉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하다 |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과 ‘사회적 민주주의’ | 진보당 창당 | 조봉암과 진보당의 시련 | 학술 토론장을 방불케 한 ‘진보당 사건’ 재판정 | 1심에서 5년 형, 2심 및 최종판결에서 사형을 선고 받다 | ‘지금 사형수가 몇 명이지?’ |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조봉암 사형집행

체 게바라-혁명을 위한 혁명에 영육을 불사른 자학적인 휴머니스트
체 게바라 증후군 또는 그 현상(Phenomenon) | 스페인 바스크 족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은 미소년 | 의과대학에 입학하다 | 라틴 아메리카 제국 첫 번째 긴 여행 | 의사 자격 취득과 두 번째 여행 | 운명의 여인 일다 가데아를 만나다 | 카스트로와의 역사적인 만남 | 에르네스토 게바라에서 체 게바라가 되다 | 목선 그란마 호를 타고 |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의 항전 | 전선에서 만난 두 번째 여인 알레이다 마치 | 산타클라라에서의 마지막 결전과 아바나 입성 | 아바나에서의 바쁜 나날들 | 해외순방 길에 오르다 | 뜻밖에 국립 중앙은행 총재가 되다 | ‘쿠바는 오고 양키는 가라!’ | ‘행동하는 지성’ 게바라 | 모국을 방문하다 | ‘구시대 인은 가고 새로운 인간만 오라!’ | 카스트로와의 결별, 그리고 콩고에서의 실패 | 볼리비아에서의 마지막 처절한 투쟁 |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다 | *오늘의 쿠바

본문중에서

레닌은 트로츠키를 좀 더 관찰하기 위해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트로츠키는 크룹스카야의 도움으로 동지들이 기거하고 있는 하숙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르토프와 친해졌다. 마르토프도 트로츠키처럼 유대인으로 논쟁을 좋아하였으며, 훗날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연맹’ 공동 발기인으로 활약하였다. [이스크라] 편집진들은 트로츠키의 탁월한 글 솜씨와 연설 솜씨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대중연설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의 거침없는 ‘포효’와 수사학적 언변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이제 트로츠키의 이름은 망명객들은 물론 사회주의 관변의 화제가 되었다. 레닌은 마침내 트로츠키를 [이스크라] 편집진에 참여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트로츠키가 아직 젊고, 그의 문장 스타일이 매우 화려한 점 등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의 종합적인 능력에 비하면 전혀 장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레닌은 역시 사람을 볼 줄 아는 큰 그릇이었다. 6명의 위원 중 마르토프(L. Martov)를 비롯해서 다른 위원들은 이의가 없었으나 오직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만 반대하였다. 속 좁은 사람으로 이미 알려진 플레하노프 입장에서는 트로츠키가 들어옴으로써 그의 입지가 좁아지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편집진 인선은 전원일치제였기 때문에, 레닌은 결국 절충안으로 트로츠키를 투표권 없는 편집위원 자격으로 끌어들였다. 플레하노프는 1856년생으로 러시아에 마르크스 사상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으로서 연배로나 이론 면에서 대부격이었다. 트로츠키와 플레하노프는 두 사람 모두 상상력이 풍부하고 기지가 번득이는 논객이었으나 트로츠키가 ‘뜨는 해’라면 플레하노프는 ‘지는 해’와 같았다.
(/ p.33)

1912년 트로츠키는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여 발칸 전쟁을 취재하였다. 발칸전쟁은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연합군이 발칸 반도에서 터키의 세력을 잠재우기 위한 전쟁이었다. 종군기자로서의 취재는 훗날 그가 러시아 혁명 당시 적위대를 진두지휘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13년 초 비엔나에 잠시 들른 스탈린과 그의 동료 집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 당시만 해도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대해서 "가무잡잡하고 회색빛이 도는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는 깡마른 이 사내는 존재감은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무뚝뚝하면서도 집중력이 강한, 그러면서도 싸늘하고 적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라고 회상하였다. 사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마주치기 얼마 전에 그에 대해서 "가짜 완력을 가진 시끄러운 챔피언"이라고 헐뜯은 바 있었다. 이처럼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만나기 전부터 이미 운명적인 앙숙이었다.
(/ p.44)

1917년 11월 말경 트로츠키는 독일과의 종전협상을 위해 폴란드 도시 브레스트(/ p.리토프스크로 향하였다.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17일간의 휴전기간이 정해졌다. 트로츠키의 계산으로는 이 기간 중에 독일에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황제(빌헬름 2세)가 퇴위한 후 사회주의 정부와 협상을 공정하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트로츠키의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1918년 2월 독일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황한 트로츠키는 연합국 측에 평화협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연합국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가 독일에게 망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트로츠키는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과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일단은 평화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 p.59)

레닌의 장례가 끝나자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여 갔다. 이에 맞선 트로츠키는 1924년 말 [10월 혁명의 교훈]이라는 저작물을 통해 1917년 10월 혁명 때 거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거사 결정을 끝까지 반대했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판단착오를 맹렬히 비난하는 한편,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이의 진정한 성공에 회의적이었던 그들의 우유부단함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이러한 자들이 어떻게 주도권을 갖고 혁명과업을 수행할지 의문시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트로츠키즘인가, 레닌이즘인가?]라는 논문에서, 10월 혁명 당시 트로츠키는 오직 당의 의사를 실천했을 뿐인데 그의 역할과 공적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트로츠키는 당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대해 불신과 모욕을 조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10월 혁명의 교훈]이 제기한 또 하나의 쟁점은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소위 ‘연속혁명’) 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이었다. 즉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는 한 국가에서만 제도화되었다고 해서 성공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이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에 머물러 있다면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은 실험적 사회주의 국가를 고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도 사회주의가 확산되도록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고, 사회주의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 p.67)

트로츠키가 멕시코에 온 이래 스탈린의 트로츠키 가족과 그의 주변 인물에 대한 탄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트로츠키가 추방된 후 모스크바에서는 1937년 1월 트로츠키 옹호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려 무고한 사람들이 처단되었으며, 정치와 거의 무관한 그의 작은아들 세르게이도 5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후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트로츠키는 이 ‘사기재판’의 부당성과 스탈린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 초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체코 등의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트로츠키 변호인단이 합동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켜 멕시코에 있는 트로츠키를 방문하였다. 이때 조사위원회의 단장은 미국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존 듀이였다. 조사위원회(세칭 ‘듀이 조사위원회’)는 13차에 걸쳐 트로츠키와 면담을 실시한 결과 모스크바 재판이 ‘사기재판’임을 입증하였다.
(/ p.77)

1890년 여름, 로자에게는 그녀의 운명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일이 벌어졌다. 로자가 거주하는 뤼베크 집 맞은편 집에 훤칠한 키에 과묵하고 잘생긴 청년 한 사람이 세 들어왔다. 그의 본명은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이지만 레온 그로소프스키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레오는 1867년 7월 17일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한 러시아령 리투아니아의 대도시 빌나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막내아들(3남 1녀)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레오는 자기 형제들처럼 평범한 사업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대학에 다니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고 고등학교마저 중도에 포기한 채 러시아 젊은 인텔리겐치아들이 조직한 ‘인민의지당’에 가입하였다. 인민의지당은 차르의 속박으로부터 러시아 인민을 해방하는 것을 기치로 내건 반정부 지하조직이었다. 바로 이 조직에 의해서 1881년 3월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지 않았던가.
(/ p.101)

레오는 노련하고 능숙하며 세심한 남자의 경험으로 지금까지 한 남자도 사랑해본 경험이 없는 로자를 손쉽게 요리하였다. 뜨거운 가슴의 로자는 그에게 망설임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녀에게 성의 비밀을 일깨워준 이 남자는 로자의 강한 자존심마저 여지없이 무너트렸다. 로자는 레오 곁에 누워 자신을 열광시키는 것들에 관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연인이자 투쟁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레오도 로자의 명쾌한 언어 감각과 세련된 문장력, 뜨거운 눈길에 거의 무장해제 당하였지만, 어떤 순간에는 냉정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로자는 레오를 끌어당기는 데 안달이었다. 로자는 첫 남자인 레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뿐만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레오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해서 그녀와 일생을 함께 할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 p.103)

1898년 5월 로자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히고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사회주의 활동과 국제 노동운동의 요람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그 당시 독일은 러시아와 폴란드의 망명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이 있는 나라였으며, 신흥 산업국가로서 강력한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어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당국의 사회주의자 단속법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폐질환 보험, 연금보험을 쟁취해냈다. 1890년 마침내 사회주의자 단속법이 폐지되고 1891년 독일 사회주의 민주당 강령이 채택되었는바,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 강령을 원용하였다.
(/ p.111)

로자는 핀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얼마 후 [대중파업과 당, 노동조합]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녀는 이 글에서 ‘러시아 혁명(1905년 제1차 민중혁명)’의 교훈을 독일에서 적용하려고 하였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로자의 머릿속에서는 바르샤바의 레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은 모처럼 하나가 되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하지 않았던가. 혁명이 비록 실패로 끝나고 죽을 고초를 겪었지만 바르샤바에서 모험적인 순간들이 그래도 행복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니 로자는 자기 자신만 빠져나와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혁명에 도취된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서도 , 또한 죽음과 패배의 순간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자기 옆에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두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젊은 여자가 아니었다.
(/ p.133)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온 로자도 이제 40줄에 접어들었다. 투쟁과 과로로 유발된 잦은 병치레로 그녀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도 하나둘씩 백발이 되어갔다. 로자는 레오와 연인으로서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지만 혁명의 동지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직접 만나는 대신에 여전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10년에는 90통의 편지를, 그리고 이듬해에는 60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편지는 옛날과 달리 애정 어린 표현 없이 대부분 사무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많은 편지를 교환하였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는 완전히 끊을 수 없는 어떤 숙명적인 연緣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비록 몸은 멀어졌지만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동지사이가 아닌가?
(/ p.141)

1919년 1월 14일 레오가 다시 체포되고 이어 다음날 밤에는 로자와 리프크네히트가 민병대에 의해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 민병대원들은 두 사람을 현상금을 받을 수 있는 근위 기병대사령부로 끌고 갔다. 곧이어 팝스대위의 로자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고, 노스케와의 전화 통화가 끝난 다음, 처치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앞서 리프크네히트는 하수인 룽게에 의해서 소총 개머리판으로 수차례 난타당한 끝에 중사 하르퉁에 의해 확인 사살되었으며, 로자는 밤 11시 45분경 사령부 계단으로 끌려 내려오는 순간 같은 방법으로 룽게에 의해서 뒤통수를 무수히 얻어맞았다. 그리고 책임 장교 포겔 중위가 쓰러진 로자를 향해서 권총으로 확인 사살하였다. 1월 15일 자정 무렵이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꾼 ‘반역의 여인 붉은 로자’, ‘이단의 여인 붉은 로자’의 치열했던 삶은 49세를 일기로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로자의 시신은 국경운하에 내던져졌고, 1월 17일 사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지는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의 사망소식을 공식 발표하였다. 1월 26일 리프크네히트와 시가전 때 숨진 31명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로자의 빈 관도 있었다. 아직 요행히 살아남은 레오는 2월 12일 [로테 파네(Rote Fahne)]를 통해 살인자들의 명단을 공개하였으며, 그 자신도 3월 10일 체포되어 모아비트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사살되었다. 시신을 확인한 마틸데는 "당시 레오의 처참한 모습을 영원히 지울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로자에 대한 봉사를 다한 것이다.
(/ p.154)

웨일스는 장지락을 대면하자 그에게서 풍기는 매력도 매력이려니와 그의 행동에 궁금증을 느끼고 대화를 통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며 지하 혁명운동가로,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사나이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웨일스는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앞으로 2년 동안 출판을 보류하는 조건으로 그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이 [아리랑]이란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김산이라는 이름도 그녀의 제안에 따라 그가 수락한 것이며, 금강산에서 따온 것이다. 비록 이 책은 김산이 죽기 전 32년간의 짧은 삶을 조명한 것이지만, 영원히 잊힐 뻔했던 한 혁명가의 험난한 생애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도 드라마틱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산의 사인死因은, 그가 1938년 옌안에서 의문사한 후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다가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그의 잘못된 처형 사실을 공식 확인함으로써 세상에 밝혀졌다.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레온 트로츠키]편 참조), 또는 일제日帝의 첩자로 의심받아 당시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온 중국공산당 실력자 캉성康生의 지시로 처형된 것이다.
(/ p.159)

웨일스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산이라는 한 지식인이 어떻게 살고 행동하였으며, 지식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단테 알리기에리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고뇌하였으며, 아나키즘을 넘어 마르크시즘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김산도 정치적 이상주의자요 정치적 낭만주의자이며, 뜨거운 인간애를 지닌 휴머니스트이자 ‘혁명적 로맨티스트’였다. 이런 김산이었기에 우리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리영희 선생(1929(/ p.2010)도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해답을 찾아 헤매던 때, 김산의 삶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으며,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에 빠졌을 때는 ‘김산’을 찾았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물질만능으로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우리는 김산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처절한 삶을 통해서 위안과 감동을 얻을 수 있으며, 더 나은 인간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인생에서 한 가지를 제외하고 나는 모든 것에서 패배했다(/ p.나는 나 자신에게는 승리했다."라는 김산의 한 맺힌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험난한 삶의 기록과 증언 등을 통해서 탐색해본다.
(/ p.162)

김산이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1920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15세의 김산에게 상하이는 새로운 세계였으며, 모든 풍요로움과 비참함이 함께 어우러진 거대한 도시였다. 이 낯선 도시에서 그는 누구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차피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었다. 김산은 무턱대고 민단을 찾아가 자기소개를 하고 월 15달러 하는 하숙을 구한 다음, 그곳 [독립신문]에서 월 20달러를 받기로 하고 교정 겸 식자업무를 맡게 되었다. 김산은 저녁이면 그곳 성인 영어학교에 등록하여 영어와 에스페란토어도 공부하고 일본에서 접했던 아나키즘 서적과 기타 사회과학 서적도 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산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그 무렵 상하이의 조선인들 간에는 ‘아메리카파’와 ‘시베리아(/ p.만주파’라는 두 부류의 민족주의 그룹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아메리카파’는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기독교를 믿고 있었으며,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였기 때문에 외교적인 수단을 동원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들은 당시 100여 명으로 의정원 내에서 다수를 점하였다. ‘시베리아(/ p.만주파’는 80여 명으로 초창기부터 민족운동을 이끌었으며, 이동휘 장군이 이 그룹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유격활동을 펴온 골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 p.173)

1929년 8월 김산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베이징에서 펑톈奉天행 기차를 타고 일본인들이 출입하는 남문 대신에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선양역에서 내렸다. 그는 일본 경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회색 장삼에 두 손을 중국인처럼 긴소매 속에 찔러 넣고 역 출입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3일 후 중국 대표와 지린으로 가 산 속 비밀회의장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1924년에서 1931년까지 조선민족주의자들에게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협조하는 두 개의 정부가 있었다. 그 하나는 ‘대한정의부’였고, 또 하나는 ‘대한신민부’였다. 이 두 정부는 각기 자기들 영역 내에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부’는 7만 명을 통치하였으며, 수도는 펑톈성 신빈군에 두고 그 지도자는 일본무관학교를 졸업한 홍우찬이었다. 한편 신민부는 3만 조선인을 통치하였으며, 그 수도는 지린성 북방에 두고 김좌진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이들 두 민족주의 정부는 그 당시 만주의 조선공산당에 반대하였다. 반면 1924년에 설립된 만주 조선공산당은 농촌청년으로 이루어진 ‘동만東滿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민족주의자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만주 조선인들은 그때 중국인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다가 두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 이중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결국 두 정부는 와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두 정부가 백해무익하며, 그 대신에 공동항일 연합전선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그해부터 1937년까지 만주에서는 항일 빨치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만주 공산주의 계열의 빨치산이 7천여 명, 민족주의 계열의 그것이 3천 명 정도였다.
(/ p.207)

베이징에서 체포된 지 100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김산은 거의 폐인의 몰골로 고향으로 갔다. 이런 모습으로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늙은 어머니가 그리웠다. 자식의 처참한 몰골을 본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에게 의학 공부를 하라고 번번이 속다시피 하며 많은 돈을 준 작은형의 심경은 너무도 착잡했다. 이제 겨우 26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를 본 어린 조카가 몰골이 추한 할아버지 취급을 하며 슬슬 피하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김산은 두 달 동안 고향에서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정양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끝없는 모성애에 눈물로 보답할 뿐이었다.
(/ p.213)

김산은 1934년 1월이 지난 후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연인 조아평과 다시 만났다. 그녀는 개성이 강한 유령과는 달리 헌신적이었고 김산을 무척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김산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하였지만 그녀는 김산에게 더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가정교사와 번역으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생활이 여의치 못하여 1934년 겨울 허베이성河北省의 스자좡石家莊으로 가서 월급 40원을 받고 일간지 편집 일을 보았다. 1935년부터 그는 철도노동자들의 학업을 도와주고 정치교육도 담당하였다. 1935년 봄 김산은 부인을 스자좡에 남겨두고 다시 상하이로 가서 조선인 혁명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10년 동안 중국혁명에 투신했으므로 이제는 조국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광시에 살고 있는 김충창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두 사람은 오랜만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김산은 그곳 상하이에 있는 조선인 동지들과 향후 항일투쟁에 관해서 논의하였다. 이 무렵 김산이 조선 혁명가들과 다시 접촉하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당적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재기를 다지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 p.220)

박헌영은 월북 후에도 북에서 소위 ‘남조선 인민의 반미·구국 투쟁’을 원격 지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설(1948년 9월 9일)되자 부수상 겸 외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코민테른 중앙지도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실권을 장악한 김일성에게 박헌영은 눈엣가시가 되었다. 어제의 이념적 동지에서 오늘의 정적으로 돌변한 김일성은 1953년 8월 박헌영 직계인 이승엽 등 12명에 대해 ‘반국가·내란 음모 죄’를 적용하여 이중 이승엽을 포함한 10명에 사형을 선고케 하여 곧바로 처형하고, 박헌영에 대해서는 1955년 12월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죄’ 등을 덮어씌워 사형을 선고케 한 후 이듬해 7월 처형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박헌영의 월북은 자의든 타의든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었다. 그로서는 남한에 잔류하여 투쟁하다가 죽는 것보다 북에서 더 큰 치욕과 불행을 당한 것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천추의 한恨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분단 60년이 흐른 지금 박헌영은 남에서는 물론 북에서 더 버림받은 반역자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230)

박헌영의 딸에 대한 편지는 위험하고 어려운 길을 걷느라고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책감과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헌영은 그 뒤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시절 그러니까 1949년 8월 딸 비비안나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잠시(약 한 달)나마 부녀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 이 무렵 박헌영은 주세죽(러시아명 한베라)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반응과 관심은 냉담하였다. 주세죽은 크질오르다에서 봉제공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모스크바의 딸을 찾아 다녔는데, 1953년 겨울 어느 날 이날도 그녀는 모스크바로 딸을 만나러 가던 중 폐렴이 악화되어 사위 빅토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굴곡이 많은 삶을 쓸쓸히 마감하였다. 그때 비비안나는 순회공연차 키에프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주세죽의 유해는 현재 모스크바 시내의 단스키 수도원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 p.250)

반세기 동안 북한 사회를 지배하면서 1994년 7월 9일 사망할 때까지 ‘위대한 수령’과 ‘전쟁 범죄자’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김일성의 등장은 이렇게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실제로 북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19일이었다. 그 때 김일성은 ‘88여단’ 소속의 항일 빨치산 부대 간부들과 소련 함정 푸카초프 호를 타고 원산항에 내려 원산항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과 강원도의 공산당 간부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일성은 9월 20일 기차를 타고 22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김일성은 평양 중구역 근처에 사무실을 차린 뒤 김동환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당 조직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가 1차적으로 접촉한 인사는 서울의 박헌영과 노선을 달리한 박정애, 이용범 등이었다. 그때 김일성은 당시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당시 63세)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과도 만나 향후 민족통일 문제 등을 논의했다. 김일성은 근한 달간에 걸친 조직사업과 정치사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을 결성한 다음 소련군과의 치밀한 준비 끝에 10월 14일 군중대회에 극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 p.264)

‘9월 총파업’은 어떤 면에서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대대적인 투쟁의 시험무대였다. 1946년 9월 14일, 운수부 철도국 경성공작창 종업원들(3,700명)은 9월 1일부터 실시된 일급제를 반대하고 가족수당과 물가수당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9월 23일 밤 11시까지 당국에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자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즉각 전국 산하 지부에 파업지령을 내렸다. 이 파업은 부산철도 공작창으로부터 시작하여 남한의 전 철도노조로 파급되었다. 이 당시 조선공산당 수뇌부는 철도파업에 동조하기 위하여 체신, 전기, 해운 등 각 산업별 노조에 파업을 부추겼다. 이 파업은 출판, 전신전화, 전기(경성전기) 분야 등에까지 확대되어 ‘전평’ 산하 조직 노동자 25만 명과 비 조직 노동자 5만 명이 참여하였으며, 학생들까지도 동맹휴학에 들어갔는가 하면 은행, 회사, 병원의 직원, 심지어 군정청의 일부 직원까지도 파업에 동조하였다.
(/ p.271)

스탈린 면담을 계기로 김일성과 박헌영의 힘의 균형은 김일성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박헌영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내려진 미군정의 박헌영 체포령은 그의 몰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즉 1946년 9월 초순 박헌영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발표되자 이북에서는 연락원을 파견하여 박의 월북을 종용하였다. 박헌영은 처음에는 월북을 거절하고 남한에서의 투쟁의사를 밝혔으나 10월 8일 북에서 다시 연락원을 파견하여 박의 월북을 강력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11일 박헌영은 그의 비서격인 경기도당 간부 서득언과 함께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남로당 조직원이었던 박갑동은 박헌영의 월북 순간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쓰고 있다. "박헌영은 이날 밤 한 평 반 남짓한 영구차 속, 자기 키보다 조금 큰 검은 관속에 반듯이 누워 시체를 가장해서 월북했다고 한다. 38선 접경에 이를 때까지 혹시나 경찰의 검문을 염려하여 가족으로 분장한 남녀당원 몇몇이 흡사 경기도 일원의 어느 선산에 매장이나 하러 가는 듯한 장례차림을 꾸민 것이다. 그때 영구차 뒤를 따르던 호상차에 두건을 푹 둘러쓴 박헌영의 보디가드 이동수의 얼굴을 눈여겨보지 않았더라면 이 장의행렬이 박헌영의 ‘서울 탈출’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행렬에 뽑힌 5명의 호위원은 공산당 내에서 엄선된 일당백의 행동대원들이었다."(박갑동 지음, [박헌영], 도서출판 인간사, 167쪽) 그러나 이 극적인 탈출기는 박갑동도 간접적으로 들어서 안 사실이어서 그 진위는 명확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 p.278)

박헌영에 대한 형 집행은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즉시 처리와는 달리 사형판결이 난 이듬해인 1956년 7월 19일에야 이루어졌다. 그의 사형집행이 이처럼 지연된 것은 일부 양심 층의 선처 건의와 소련 당국의 형 집행 재고 분위기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형 집행이 늦어질수록 불필요한 잡음이 증폭될 것을 우려한 북한 당국은 김일성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사회안전상 방학세가 권총으로 박헌영을 직접 총살했다. 총살형에 처해지기 위해 지하감옥에서 끌려나온 박헌영(투옥 중 셰퍼드 견에 의해서 갖은 고문을 당했다는 설도 있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재혼한 아내 윤레나와 두 자식(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의 후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곧바로 총살되었으며 그의 사체는 인근 야산의 잡풀 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 버렸다. 현재 재혼녀 레나와 두 자식의 그 후 행방은 알 길이 없다. 한국 공산주의 혁명가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삶은 56세를 일기로 이렇게 처참하고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분단의 현실에서 박헌영의 ‘죄상’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그는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고 ‘민족 반역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 박헌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의 그날 이후로 유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p.301)

이현상은 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1923년) 4월 당시 호남 명문인 전북 고창고보에 진학하였다. 머리 좋은 이현상은 1학년 때 성적이 평균 91점으로 48명 동급생 중 1등이었으며, 2학년 때는 조금 떨어진 3등으로 평균 85점이었다. 그의 성적이 2학년 때 다소 떨어진 것은 그가 공부 이외에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성적표의 성격 등 특기사항란에 ‘침착하며 집요한 데가 있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그는 동료들과 달리 무언가에 집요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뜻 있는 젊은이들처럼 시대의 아픔을 일찍부터 인식하기 시작한 이현상은 2학년을 마치고 1925년 봄 서울로 상경, 3학년 때부터 중앙고보로 전학하였다. 당시 중앙고보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의 요람이었다.
(/ p.309)

이현상이 지리산에 잠입해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8년 10월경이었다. 그는 강동정치학원에서 3개월간 훈련을 받고 비밀리에 38선을 넘어와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재해있는 야산대를 규합하고 체계적인 유격대 발진을 구상하였다. 이현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지리산에 잠입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여수·순천 반란 사건([박헌영]편 참조)이 한창이던 10월 22일 밤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날 밤 이현상은 부하 몇 명을 대동하고 순천역에 나타나 반란군 지휘자 홍순석 중위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이현상은 노상명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남로당 지하 세포인 홍순석도 ‘노 동무’로 알려진 이현상이 남로당 거물임을 알고 있었다. 이현상은 전황을 보고 받고 반란군 조직 내 장교들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수·순천 반란 거사 직후 사병들은 16명의 장교들을 체포한 후 그 중 15명을 즉결처분하고 평소 좌경 성향인 장교 1명만 더 조사해볼 계획으로 순천역 열차 화물칸에 구금하고 있었다. 이현상은 즉각 그 장교를 데려오도록 하여 그를 만나보니 그는 14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인 김지회 중위로 남로당 지하당원이었다. 이현상 앞으로 끌려나온 김지회는 이현상을 보자 ‘선생님’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 장교든 사병이든 간에 군부대내의 남로당 조직은 점 조직이었기 때문에 이들 간에는 서로의 횡적인 연락체계가 없어 누가 남로당원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죽음 직전에서 김지회는 이현상과 홍순석을 만남으로써 지창수로부터 지휘권을 물려받게 되었다. 당시 국방경비대 내의 남로당 비밀조직에 의하면 장교는 중앙에서, 사병은 도당에서 관장되었다. 왜냐하면 장교의 선발배치는 중앙에서 일원적으로 하고 있었고 보직 관계로 근무지 이동이 심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병의 경우는 모병단위로 되어 있었고 부대이동이 별로 없어 각 도당에서 공작을 책임지는 것이 유리하였다.
(/ p.327)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결렬위기에 놓였던 휴전협정이 체결(7월 27일)되었다. 이 협정체결 당시 지리산의 잔존 빨치산은 1,500명 내외로 추산되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중증환자이거나 여성대원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 가동대원은 기백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동원된 군경토벌대는 무려 1만 8천여 명이었다. 이제 남한 빨치산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이때 북에서는 UN군이 제안한 남한 유격대의 완전철수를 일방적으로 묵살해버렸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며칠 후인 8월 3일에서 6일 까지 열린 북한의 특별법정에서 남로당계 이승엽 등 12명이 간첩 및 국가전복 음모죄로 기소되어 이중 윤순달(15년 형)과 이원조(12년 형)를 제외한 이승엽 등 10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처형(박헌영 역시 2년 4개월 후인 1955년 12월 15일 특별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이듬해 7월 19일 처형됨, [박헌영]편 참조)되었다. 이 재판 후 이현상과 잔여 친위 세력들도 뿔뿔이 분산 배치되었으며, 북에서 밀파된 김병진의 지령을 받은 방준표는 8월 26일 5지구대 조직위원회를 열어 이현상을 탄핵하는 결정서 9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는 ‘반당, 반국가 종파분자인 박헌영, 이승엽 반역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청소하기 위한 제반 대책’으로 남한 유격대에서의 모든 실패와 과오를 이현상이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 p.358)

굴절된 한국 현대사, 그 거친 물결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하였다. 순수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 합리적인 중도 좌파 몽양 여운형, 친일파를 끌어안고 무소불위의 권좌에 오른 현실정치가 우남 이승만, 철저한 공산주의자 박헌영, 그리고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하여 사회 민주주의적 ‘제3의 길’을 모색한 죽산 조봉암 등, 이들 정치 지도자들은 저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으나 가는 길은 서로 달랐다. 이들 가운데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항일투사의 길에 섰던 조봉암은 해방된 조국의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박헌영 등 골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전향하였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의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체제에서는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혁신정당(진보당)의 지도자로서 투쟁과 타협, 변화와 개혁을 모색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험난한 정치역정은 끝내 좌절로 매듭지어졌다.
(/ p.376)

조봉암은 농림부장관에 취임한 후 1949년 초까지 농지개혁을 완료하고 그해 말까지 농업협동조합을 만든다는 농촌종합개발계획을 세우고 이를 적극 추진해나갔다. 이에 따라 조봉암은 농림부내에 농지국과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지도할 농촌지도국(국장 조동필)을 설치하고 농업협동조합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법 초안은 ‘농촌제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국회 농림위원회에 상정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봉암은 농림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도 못하고 취임 6개월 만인 1949년 1월 13일 정부 내 감찰위원회(위원장 정인보)로부터 공금유용혐의로 고발당하고 말았다. 주요 고발내용은 양곡 매입대금(3,500만 원)과 기타 농림부 관할 기관의 자금을 농림일보 설립과 그 밖에 관사수리비, 출장비 등으로 유용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국회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서이환)가 구성되어 진상조사에 나섰고 조봉암이 적극 해명했지만 검찰 측에서 5월 28일 기소하였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그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에 앞서 2월 22일 ‘부덕한 소치로 물의를 빚은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농림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며 농촌의 뿌리 깊은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농민의 생활향상에 의욕을 보였지만 지주세력을 비호하는 한민당 측의 갖은 모략으로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
(/ p.408)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그의 정치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러면 그의 ‘평화통일론’은 무엇인가? 조봉암은 ‘대對공산당 투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우리의 당면과업](1954년)에서 통일방법은 무력통일, 즉 북진통일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방법도 있으며, 오히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정치적 통일, 즉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하면서 무력에 의한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의 통일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의 이러한 평화통일 방안은 그 후 대담 형식의 [평화통일의 구체적 방안](1957년)에서 평화통일이 군사적이 아니고 평화적, 정치적이어야 할 이유를 밝힘으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부각되었다. 즉 조봉암은 이 논문에서 첫째 무력적 통일의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 둘째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셋째 정치적 승리만이 완전하며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넷째로 평화가 달성되어야만 모든 인류가 잘살 수 있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 p.423)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봉암에 대한 두 번째 탄압은 소위 ‘간첩 박정호 사건’과의 관련이었다. 즉 1957년 10월 혁신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정호와 김경태 등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박정호는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으로 위장 자수한 후 몇 년 동안 숨어 지내다가 1955년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고정간첩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1957년 11월 6일 시경 사찰과에서 10월 18일 ‘남반부정치변혁공작대’의 총책임자 박정호와 박의 대북 연락원 김태형 등 2명의 간첩을 비롯하여 박에게 공작금을 받고 포섭되어 진보당, 민주혁신당 등 평화통일 지향의 조직세력에 끼어 있던 장건상, 최익환 및 실업계의 정이식 등 1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하는 한편 이만춘이 경영하는 서울 중구 소재 남대문주유소 내에서 은닉 보관되어 있던 다이너마이트 궤짝 450개를 압수하였다."라고 발표함으로써 공개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조봉암이 이들과 접촉한 사실은 있지만 포섭되지는 않았다."라고 하여 그에 대한 직접 수사를 일단 보류하였다.
(/ p.429)

조봉암은 10시 45분경 교도관에 끌려 형장으로 향하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 가슴에는 수인번호 2310번을 달고 있었다. 형틀 앞에 다가선 조봉암은 의연했다. 그의 머릿속에선 지난 6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형 집행관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봉암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가 고루 잘 살기 위해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 내가 마지막이 되길 바랄 뿐이오." 이어서 입회목사가 기도를 하려 하자 조봉암은 목사에게 [신약성서] 누가복음 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때려서 놓으리라 하자,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성경구절을 다 듣고 난 조봉암은 집행관의 인도로 교수대로 다가섰다.
(/ p.445)

20세기의 전설적인 게릴라 영웅 체 게바라, 그는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밀림 협곡에서 정부군 수색대에 의해 총상을 입고 체포된 다음날 미 CIA 지시로 무참하게 처형당함으로써 서른아홉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유한한 삶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이런 그에게 같은 의학도이자 선배인 알베르토는 학창시절 라틴 아메리카 여행에 동행하며 삶의 훌륭한 조언자가 되었으며, 페루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일다 가데아 여인은 짧은 기간이지만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반려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1955년 7월 어느 날 밤 멕시코에서 쿠바 망명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방황하는 이 젊은이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게바라는 기골이 장대하고 다변가인 이 쿠바인이야말로 자신을 시시한 현실로부터 낭만적인 모험의 세계로 이끌어줄 동행자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하루 밤의 대화로 족하였다.
(/ p.450)

총명한 게바라는 의과대학에 들어가서도 교수들로부터 점차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당시 이 학계에서 알레르기 권위자인 살바도르 박사는 게바라를 자신의 연구실에서 연구토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그 무렵 선배 알베르토도 이 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무려 8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 프란시스코 한센병원에서 무료진료를 하고 있던 중 잠시 휴가를 내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게바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 알베르토는 게바라에게 방학 중에 그곳 한센병원에서 일을 도와줄 수 없느냐고 제의하였다. 게바라는 존경하는 선배의 제의를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게바라는 방학이 되자 몇 벌의 옷가지와 자루할랄 네루의 [인도의 발견]이라는 책을 가방에 쑤셔 넣고 알베르토를 따라 산 프란시스코 한센병원으로 향하였다. 게바라는 그곳 한센병 환자 병동에서 방학을 정신없이 보내고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게바라는 부모가 찔러주는 용돈도 거절하고 도서관 사서보조와 기타 잡다한 일로 용돈을 벌어 학비를 보탰다. 그러면서도 그는 잠자리에 들 때는 독서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이처럼 게바라는 이미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로 삶을 농축하며 살아갔다. 1951년이 저물어갈 무렵, 그는 기말 시험에 통과하였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파시니 교수조차도 게바라를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손꼽을 정도였다.
(/ p.460)

쿠바의 비극은 그때부터 가중되었으며, 미국에 가까워 더 불행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수중에 들어간 쿠바에는 대규모 미국 자본이 유입되었고, 그것은 미국에의 종속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바에서는 점차 좌파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반미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우려한 미국은 우파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부의 편중을 심화시켰다. 그때까지 쿠바는 마차도 정권이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집권하였으며, 그의 폭정을 붕괴시킨 것은 육군 참모부 부사관 출신인 바티스타였다. 혼혈 출신인 바티스타는 1934년 1월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잡은 후에 1938년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집요한 압력에 굴복하여 하야 하지만 1940년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거센 항거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1952년 3월 10일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정도로 권력의 화신이었다. 그는 재집권 후 미국을 등에 업고 전 정권보다 더 심한 철권정치를 휘둘러 부패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때 반정부 투쟁 선봉에 나선 사람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이다.
(/ p.471)

게바라가 카스트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55년 7월 9일 밤 쿠바 출신 마리아 안토니아 부인의 비좁은 아파트에서였다. 그런데 그 만남은 실로 우연한 일로 시작되었다. 그날 낮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은 동료 로페스와 함께 멕시코시티 후아레스 거리의 프라도 호텔 앞을 지나며 사진을 찍고자 했다. 이들은 때마침 그 거리를 자나던 게바라를 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를 쾌히 승낙한 게바라는 사진을 찍어주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 이들과 인연이 된 것이다. 이야기는 어느새 쿠바혁명으로 옮겨졌고, 라울은 자신의 형 카스트로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게바라는 카스트로에 관해서 이미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바싹 구미가 당겼으며, 이로 인해서 이들은 순식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게바라는 이 쿠바인들이야말로 자신을 시시한 현실로부터 모험의 세계로 이끌어줄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사실 그때까지 게바라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 그러나 가슴속에 격렬하게 싹트고 있는 그 무엇을 찾고자 방황해온 것이 아니던가.
(/ p.475)

게바라는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런 만큼 범세계주의자로서 불의와 싸우고 핍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격려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그는 게릴라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게릴라란 흔히 말하듯 소규모 국지전투나 강력한 군대에 대항하는 소수의 과격대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게릴라전이란 압제에 대항하는 전체 민중의 싸움이다. 게릴라는 민중군대의 전위이다. 작게는 어느 지역, 크게는 어느 나라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형성한 군대의 주력이 게릴라이다. 제 아무리 심한 탄압 하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언젠가는 이기게 되는 게릴라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민중이야말로 게릴라전의 바탕이요 본질이다." 이런 그였기 때문에 게바라는 농민들과 가식이 없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콧물이 쉴 사이 없이 흐르는 아이들을 안고 귀여워 해주었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더욱 신뢰를 받았다.
(/ p.485)

1960년 새해가 되면서 게바라는 고인이 된 시에라마에스트라 시절 동료 카밀로에게 헌정하는 [게릴라 전쟁]을 탈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게릴라전의 전략과 전술, 장소선택, 적지에서의 전술 등에 관해서 상세히 기술하였다. 후일 이 책은 베네수엘라 반군과 다른 나라 게릴라들의 필수 교본이 되었다. 그 무렵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그의 계약 동거녀 시몬 보부아르와 함께 쿠바를 방문하여 게바라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이렇게 말했다. "파리에서 나는 쿠바혁명의 목표가 사회주의 건설인지 아닌지 이해되지 않아 쿠바인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야 그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혁명의 본질이 바로 국민에게 결핍된 것을 메우려는 데 있었지, 선험적인 이데올로기를 빌려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쿠바방문 후 게바라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하였다.
(/ p.498)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전진 기지로 삼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볼리비아는 르네 바리엔토스 친미 군사정부의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공산당 계열의 반정부 세력이 있었고, 저임금에 반항하는 광부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볼리비아가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강을 끼고 라틴 아메리카 심장부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페루, 브라질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혁명이 성공한다면, 그 불길이 이들 국가에도 쉽게 파급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정글은 게릴라 활동의 최적지로서 어떤 면에서 쿠바 시에라마에스트라 보다 천연 요새가 많아 ‘해방구’를 설치하기 쉽고 외부세력의 침투가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다.
(/ p.513)

바로 그 순간 볼리비아 바리엔토스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외무장관 아브세도로부터 게바라 체포사실을 통보 받았다. 그는 게바라를 일단 살려둘 것을 고려하였으나 워싱턴 당국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게바라를 총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게바라를 살려둘 경우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성가신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3시 10분경 볼리비아 장교단과 미 CIA 요원의 지시에 따라 토벌군 책임자는 병사 마리오 테란에게 술을 먹여 게바라를 총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테란은 공포에 떨며 주저하다가 윽박지르는 상관의 지시를 받고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게바라는 즉사하지 않고 두 번째 사격으로 겨우 절명하였다. 이에 앞서 옆방에 있던 엘치노와 윌리도 총살되었다. 이렇게 해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영원한 우상이자 다른 한편으로 ‘살아있는 악마’요 공포의 대상이 되어온 게릴라 대장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39세라는 짧은 생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 p.519)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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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국은행에서 근무한 후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엘리트 파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2012),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추천도서, 2014) 등이 있으며, 주요 연구 논문으로는 [소외의식의 극복-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중심으로], 번역문은 고트프리트 A. 뷔르거의 [레노레(Lenore)] 등이 있다.

저자의 글쓰기 영역인 인물 탐구 대상은 현실의 안일한 삶을 거부하고 창조와 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다.
현실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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