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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들이 쏟아진다 : 정재학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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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현실 같은 환상, 다채롭게 펼쳐지는 묵직한 언어의 선율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적 상상력과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적인 초현실주의적 시세계를 펼쳐온 정재학 시인의 신작시집 [모음들이 쏟아진다가 출간되었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민음사 2008)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등단 이후 ‘한국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모색’으로서 시단의 주목을 받아온 시인은 “세계의 음사(音寫)를 언어로 실현하려는 일종의 공감각적 아포리아에 도전”(조강석, 해설)하는 이번 시집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하는 환상의 풍경 속에서 이성적 사유와 통념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시세계를 감성의 언어로 탄주한다. ‘소리와 비전’ ‘성과 속’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채로운 리듬으로 변주하면서 자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시편들이 환상적인 이미지와 감각적인 언어의 선율 속에서 묵직한 울림을 자아낸다.

음악 마니아로서 음악과 시를 절묘하게 접목시켜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삶의 다른 몸으로서의 음악을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다채로운 언어로써 연주한다. “음(音)을 색(色)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몸으로 감각화시키는 재기”(이재훈, 추천사)를 펼치는 시인은 아코디언, 풍금, 콘트라베이스, 아쟁 등 다양한 악기들을 회화적으로 변주하는가 하면(여덟개의 악기가 뒤섞인 크로스오버적인 방의 공기 알갱이를 흡입한 기록들), 스페인의 맹인 작곡가 호아낀 로드리고의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의 음악적 이미지를 시의 몸으로 형상화한다(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특히 버드 파월, 빌 에번스와 스콧 라파로, 에릭 돌피 등 재즈 음악가들의 삶을 다룬 여러 시편들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들을 연주”(재즈의 맛)하는 시인으로서의 고뇌가 엿보인다.

시집 2부의 부제에서 “내 펜이 악기다”라고 할 만큼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시인은 나아가 음악과 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제의(祭儀)의 세계를 시로써 탐색해 들어간다. “이 세상의 음악이 아니”라 “깊은 별천지의 소리 같”은 ‘동해안 별신굿’과 “록음악보다 헤비하고 오케스트라보다 장중”(샤먼의 축제 -1)한 ‘진도 씻김굿’에 대한 오마주로서 새로운 진경을 보여주는 [샤먼의 축제] 연작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바다에 묻힌 아버지들 혼이 귀만 두고 갔으니 소리로 위안해주소”(샤먼의 축제 5)라는 말로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연행으로서의 ‘굿’의 핵심을 짚어내며 시인은 이 제의의 세계를 낯설게 여겨질 만큼 무척이나 독특한 형식과 내용으로 꼴라주한다.

현직 교사이기도 한 시인은 한편으로 [흑판] 연작을 통해 “하면 안되는 게 너무 많”고 아이들의 “뇌와 콩팥까지 감시하려”(흑판 7) 드는 교육 현장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면서 “장밋빛을 향하여 먼저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흑판 4) 쓰는 무한경쟁 속으로 아이들을 몰아넣는 비정한 교육 현실을 환기한다. “흑판 뒤에는 다른 흑판이, 그 뒤에 또다른 거대한 흑판이 모든 색을 집어삼키”(흑판 4)는 교실 안에 갇힌 채 “얼굴이 쓱싹쓱싹 지워지고 있”는 아이들의 입을 빌려 “우리는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교육만 받았지,/그 친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흑판 3)라거나 “대체 우리가 얼마나 더 죽어야 어른들이 정신 차릴까”(흑판 7)라는 발언은 우리 교육 현실의 반영으로서 자못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너는 나의 모든 음을 듣지 못하고/나도 나의 음을 더이상 듣지 못하”(모노포니)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늙은 성벽이 되”(공전)어버린 시인 자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나불대면서도 남들 속에 묻어 있기를 좋아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자기반성을 진솔한 어조로 토로하기도 한다.

그의 시는 “이천년대의 소위 모던한 시인들치고 정재학 시에 빚을 지지 않은 자는 드물다”(이재훈, 추천사)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만큼 우리 시의 뚜렷한 전위를 구성하고 있다. 이번 시집은 ‘환상적 실험시’로 일컬어지는 그의 독자적인 시세계가 우리 시의 영역을 더욱 새로운 영토로 넓혀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천년대 한국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파 담론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던 그의 시적 모험은 그만큼 좀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재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가장 진부한 악기들로 가장 진보한 형태의 음악”(재즈의 맛)을 들려주는 이 시집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한국현대시에서 “미답의 절경”(조강석, 해설)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추천사

정재학의 시는 90년대 후반부터 전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하나의 영토이자 세계다. 이천년대의 소위 모던한 시인들치고 정재학 시에 빚을 지지 않은 자는 드물다. 그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상상력과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미니멀리즘의 감각세계, 그리고 예민한 정신분석의 세계에까지 다양한 범주로 전위적인 개성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새로움의 외피를 입은 언어적 양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유희를 넘어 그는 늘 묵직하게 자아의 내면세계를 오래도록 탐하였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언어로 연주하는 재즈에서부터 씻김굿까지의 향연을 펼친다. 음(音)을 색(色)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몸으로 감각화시키는 그의 재기가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의 음계(音階, 音界)는 새로운 화성학이라 할 만한 불협화음적인 상상력과 악기의 상상력, 음악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를 시어로 연주한다. 더 나아가 음악과 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의(祭儀)의 세계를 낯선 방식으로 꼴라주한다. 서양음악에서부터 우리의 소리로까지 수렴되는 과정을 따라가보면 신비한 빛을 발하는 길목에서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선보이는 장면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어울려 있는 교실의 공간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몇몇 시들은 지금의 교육현실과 학창시절의 기억이 중첩되면서 소름이 끼쳐지기까지 한다. ‘흑판’ 연작은 환상적 이미지를 통해 고통받는 아이들의 교실을 환기하고, 경찰관이 시체를 두고 벌이는 ‘공모’는 지금 현실의 은유이다. 어쩌면 이 풍경들은 환상이 아니라 가장 극적인 현실인지도 모른다.
- 이재훈 / 시인

본문중에서

물고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생선이 되어볼까/갈기갈기 찢어져서 그녀에게 들어가볼까//서로의 잇몸과 혀를 뜯어 먹는 광경//태양과 키스한 후의 나는/나일 수 있는가//불규칙한 월식,/지옥의 문이라고 해도 이미 늦었다
(/ '모노크롬, 레드' 전문)

밤이면 허름한 재즈 까페들을 돌며 연주한 지 십육년째. 난 오늘도 콘트라베이스를 애인 대신 안는다. 피아노를 시작으로 트리오 연주를 시작한다. 오늘따라 드럼이 조금 절기는 하지만 최근에 저만한 드러머도 없다. 요즘은 찰리 헤이든의 곡을 자주 연주한다.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삼십명 정도의 관객 중 다섯명만 집중해서 듣고 있으며 여덟명은 만취되어 떠들고 있다. 가장 진부한 악기들로 가장 진보한 형태의 음악을 보여주고 있음을 몇명이나 알고 있을까. (…) 허기진 음악을 하며 나는 한때 좌초되어 몇몇 인간들을 흘려버리기도 했다. 내 뇌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며 새까맣게 타버린 뼈대만 남아 기계처럼 연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들을 연주한다.
(/ '재즈의 맛' 중에서)

푸너리 푸너리… 장구재비의 손이 쉼 없다 내 눈동자가 녹았다 얼어붙었다를 반복하더니 갈라지기 시작한다 화끈거렸다 찢어진 동공 사이로 죽은 닭들과 꽹과리 소리가 흘러나온다 짓물러진 눈썹이 같이 묻어나온다 여너리 여너리… 흔들리는 잎새 위로 거미들이 기어다닌다 태평소가 낙타처럼 울었다 나는 진흙을 토해냈다 흙으로 된 짐승들이 불타면서 춤을 추었다 나의 고장난 뼈들도 춤을 추었다 푸너리 여너리… 해일처럼 징이 울린다 사람들의 귀가 사방으로 찢어졌다 익사한 검정 장화가 널뛰며 논다 너더리 너더리… 너덜겅에 매달리다//애벌레가 꿈틀거리는 시간/변성기의 첫날,/나비 한마리/겨울밤 속으로 사라진다
(/ '샤먼의 축제 4' 전문)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에 부딪쳐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어가니 건너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 '흑판' 전문)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날/티베트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그들의 부당한 죽음 대신에/고작 잃어버린 오만원이나 아까워하고/휴지통에 지갑을 버렸을 놈만 증오하고 있는가/먼지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제주 프라하 아르헨띠나 광주 천안문 티베트…/피를 빨아먹고 자라는 봄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는데//내가 십오년 동안 지갑을 지키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인가/음악을 하겠다는 고등학교 때의 꿈도 잃어버리고/시만 쓸 수 있다면 밥벌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던 그때의 초심도 잃어버리고/안정된 직장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고
(/ '유실물' 중에서)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 간신히 1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 중인 경찰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시체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 한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자루를 펴 보였다 자루 안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나왔다
(/ '공모(共謀)' 전문)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며 200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가 있다. 2004년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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