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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양장]

원제 :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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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출간 즉시 엄청난 찬반 격론을 일으킨 문제작
지구상 거의 모든 문서고를 뒤져 완성한
트로츠키 전기의 결정판

10월혁명을 이끈 불세출의 혁명가,
공산주의 성인전에 갇혀 있던 트로츠키가
마침내 인간의 얼굴로 우리 앞에 걸어 나온다!


트로츠키는 혁명과 정치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반짝이는 혜성 같은 삶을 살았다.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혁명의 주역이었던 트로츠키는 혁명의 대의에 무한한 열정을 품고 헌신한 바위처럼 단단한 신념의 행동가였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 운동 사상 가장 탁월한 선동가이자 연설가였으며, 적군(赤軍)의 창설자로서 10월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연속 혁명론과 세계 혁명론을 세운 독창적 이론가였고, 문학적 감수성과 뛰어난 필력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트로츠키란 이름 뒤에는 수많은 찬사와 함께 그칠 줄 모르는 논쟁이 따라붙는다. 공산주의 이상사회에 대한 신념을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은 순결한 혁명가란 평가와 폭압적 국가 테러의 토대를 만든 편협하고 경직된 이념가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트로츠키는 포기를 모르는 혁명적 낙관주의자인가, 비현실적 이념 세계를 질주한 독단주의자인가

레닌이 쓰러진 뒤 트로츠키는 서기장 스탈린과 혁명 권력을 두고 치열한 대결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1929년 추방당했다. 비범한 능력을 지녔던 혁명 주역 트로츠키가 그 자신의 말대로 ‘무식하고 평범한 사회주의 관료’ 스탈린에게 진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관료 체제’ 때문이었을까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아닌 자신이 권력을 잡았더라면 반혁명적 탈선, 지배자의 자의적 통치, 정치적 폭력과 공포가 없는 인간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의 권력을 트로츠키가 이어받았다면 소련의 미래는 어떠했을까

권력에 희생당한 혁명의 순교자인가, 모순에 찬 독단적 신념가인가

레닌, 스탈린 전기에 이어 러시아 혁명가 3부작의 마지막 인물로 트로츠키를 선택한 로버트 서비스는 방대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삼아,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대가의 통찰력을 발휘해 인간 트로츠키의 전체 모습을 되살려냈다. 이 책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트로츠키 관련 자료를 샅샅이 조사해 완성한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트로츠키 전기의 결정판이다.

서비스는 수많은 논쟁점으로 가득한 트로츠키의 복잡한 인격을 낱낱이 해부하여, 드러난 면과 감춰진 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장점과 약점을 가감 없이 냉정하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야만적 폭력에 희생당한 혁명의 순교자이자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한 헌신적 휴머니스트로 통해 온 트로츠키의 이상화된 이미지와 정면 대결해 복잡하고 모순에 찬 인간으로 트로츠키의 얼굴을 다시 그려낸다. 혁명의 제단에 높이 모셔져 있던 ‘공산주의 성인’ 트로츠키는 서비스의 지적 노동을 통해 유리관 속에서 일어나 현실의 무대로 걸어 나온다.

레닌과 스탈린 전기의 뒤를 잇는 혁명가 3부작의 완결판 [트로츠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서비스는 러시아 혁명과 소련 역사 연구의 대가이다. 그가 레닌, 스탈린 전기에 이어 2009년에 완성한 트로츠키 전기는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전위’는 1879년 10월 26일 우크라이나 남부 야노프카에서 성공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트로츠키의 원래 이름)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명민한 학생이 제정 러시아의 암울한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눈을 뜨고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뒤 체포와 유배와 망명을 경험하는 청년기, 1902년 레닌을 만난 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이야기가 숨 돌릴 틈 없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제2부 지도자’에서는 레닌과 함께 10월혁명을 이끈 트로츠키의 활약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고 임시정부 전복과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이끌어낸다. 또한 그는 적군을 창설하고 군사 지도자로서 반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내전에서 승리한다.
‘제3부 반대자’에서는 레닌의 죽음을 전후로 볼셰비키 당내에서 펼쳐진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대결을 중심으로 하여 트로츠키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뒤 알마아타로 추방당하기까지 과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1910년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을 비판하고 끊임없이 당 통합을 요구했던 트로츠키가 1920년대 당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히며 권력에서 추락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1927년 12월에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하고 알마아타로 추방했으며, 1929년 초에는 아예 소련에서 추방했다. ‘제4부 세계 혁명가’에서는 소련에서 추방당한 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거쳐 멕시코에 이르는 망명 생활과 제4인터내셔널 창립,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비밀 요원에 의해 암살당하는 최후의 순간을 담아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쓴 가장 균형 잡힌 트로츠키 전기

지금까지 트로츠키의 삶을 다룬 책으로는 트로츠키 자신이 암살당하기 10년 전인 1930년에 쓴 자서전 [나의 생애]와 폴란드 망명자 출신 영국 역사가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1954~1963)이 가장 유명하다. 아이작 도이처의 3부작은 트로츠키의 삶과 사상을 다룬 고전적 저작으로 작품성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이후 이 두 책이 서구 사회의 트로츠키 연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쳐 왔다. 로버트 서비스 역시 러시아혁명과 20세기 세계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트로츠키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앞선 두 책과는 다른 시각에서 트로츠키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트로츠키가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고 조직가였으며 지도자였다. ...... 그는 지도적 위치에 있던 어떤 볼셰비키보다 더 분명하게, 모든 남성과 여성이 자기 실현의 기회를 누리고 공동의 선(善)에 봉사할 수 있는 미래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간직했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트로츠키는 이런 미래상을 열정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시대에 대한 트로츠키의 묘사에는 왜곡이 많다. 이런 왜곡 때문에 우리가 소련공산당 역사를 이해하는 데 부분적으로 오류가 생겼다. ...... 트로츠키는 대단히 매력적인 자질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이었다. 억지로 그를 평범한 수준으로
낮춰서 우리 대부분과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애써 주장해봐야 소용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를 정확하게

이 책에서 서비스는 트로츠키 자신과 트로츠키 추종자들이 빚어낸, 흠결 없는 순결한 혁명가라는 신화화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트로츠키의 맨얼굴 그대로를 보려고 한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트로츠키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 트로츠키의 삶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에서 깊숙이 들여다본다. 트로츠키가 혁명 투사이자 혁명 사상가로서 일군 놀라운 업적과 그가 저지른 과오와 모순까지 낱낱이 살펴봄으로써, 마침내 트로츠키라는 한 인간의 삶을 ‘가장 객관적으로’ 조명한 ‘균형 잡힌’ 전기가 완성되었다.
그 결과,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쓴 트로츠키 전기의 결정판으로서 출간 즉시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 되었다. 트로츠키라는 인물을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매력적인 인간으로 되살려낸 가장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전기’라는 호평과 함께 트로츠키가 이룬 업적과 그의 사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반(反)사실적인 전기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러한 엇갈리는 평가에는 본질적으로 트로츠키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깔려 있다. 첫 번째 관점은 트로츠키가 1923년부터 당내 관료화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일을 근거로 삼아 트로츠키가 권력을 장악했다면 소련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는 긍정적 시각이다. 두 번째 관점은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1923년 3월에 볼셰비키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자, 혁명의 이름으로 테러를 정당화했으며 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던 트로츠키야말로 스탈린주의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번역자 양현수는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는 물론이고 이 책의 독일어 판, 프랑스어 판, 에스파냐어 판을 참고했으며, 2010년에 저자가 페이퍼백을 출간하면서 수정한 부분을 확인하는 등 정확한 번역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트로츠키는 누구인가

의식을 깨친 이래 나는 43년을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면 이런 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내 삶의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이다. 따라서 나는 타협을 모르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나의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
담장 아래로 밝은 녹색의 풀들, 담장 위로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도처에 반짝이는 햇빛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 세대는 모든 악과 억압, 폭력을 씻어내고 이 아름다운 인생을 마음껏 누리게 하자.
- 트로츠키의 유언 중에서

1940년 2월 27일, 트로츠키는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자필로 유언을 작성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투사, 타협을 몰랐던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 어둠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혁명적 낙관주의자, 자신이 일군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로 불린다. 이러한 트로츠키의 삶을 정의하는 데 그 자신이 쓴 유언보다 적절한 말은 없는 듯하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La vita bella)](1997)의 제목과 모티프가 바로 트로츠키의 유언에 나오는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10대 후반에 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트로츠키는 평생 동안 체포, 유배, 탈출, 망명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미국,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를 오가며 자신이 꿈꾸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살았다. 그는 23세에 처음으로 ‘트로츠키(Trotsky)’라는 가명을 썼고, 그 뒤로 ‘올드맨’ ‘레온 아저씨’ ‘비달’ ‘룬트’ 같은 수많은 가명을 만들어 썼다. 흔히 알려진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라는 이름에서 ‘레온’은 그의 러시아 이름 ‘레프(Lev)’의 영어식 이름이다.

스탈린 시대부터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하기 전까지, 트로츠키라는 이름은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최악의 욕설이자 금기어였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방한 뒤에도 끝까지 그를 ‘반(反)레닌주의자’, ‘국제적 스파이’로 몰았으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공산권에서 ‘반동주의자’ ‘수정주의자’를 뜻하는 욕설이자 정치적 숙청의 빌미가 되곤 했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추방된 뒤 스탈린의 감시와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스탈린 정권과 타락한 소비에트 국가를 비판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공공연한 적이 되었고, 공산권에서 그에게 씌운 오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시행하면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던 고참 볼셰비키들을 사후 복권시키던 때에도 오직 트로츠키만은 완전히 복권이 되지 못했다. 1988년부터 1991년 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 트로츠키가 쓴 저작들이 소련에서 출간되었고 트로츠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사법적 복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과연 트로츠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레닌과 트로츠키, 경쟁자에서 혁명 동지로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레닌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마음을 표시했다. 스탈린이 레닌을 혁명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아버지로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레닌을 대하는 방식은 스탈린과 전혀 달랐다. 스탈린에게 레닌이 이상화된 아버지였다면, 트로츠키에게 레닌은 한동안 맞수이자 동지일 뿐이었다. 트로츠키가 레닌을 달리 보기 시작한 것은 1917년 혁명 후의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1903년 7월 30일에서 8월 23일까지(러시아력으로는 7월 17일에서 8월 10일까지)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처음에는 레닌을 지지했지만, 레닌과 볼셰비키로 인해 당이 분열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실망해 멘셰비키의 편에 섰다. 그 뒤로 1917년 볼셰비키에 가담하기 전까지 트로츠키는 당 지도자였지만 어느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신의 노선을 일관되게 지켰다. 1917년에 볼셰비키에 가담한 뒤에도 당 정책과 혁명 노선을 놓고 레닌과 당내 주류 의견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위한 단독 강화 협상(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에서 레닌과 대립하여 외무인민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이 점은 1917년 이전과 이후가 같았다.

"중단 없는 혁명이 필요하다" - 혁명 이론가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1905년 이래 ‘연속 혁명론’을 발전시켰다. (연속 혁명permanent revolution은 영구 혁명이라고도 번역된다.) 간단히 말하면, 연속 혁명론은 러시아혁명이 영구적으로 성공하려면 서유럽 국가들의 혁명에 의지해야 하므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단 없는 혁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산업 국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사회주의 건설이 방해를 받게 될 것이고,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의 직접적 지원이 없으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결국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에는 공산당이 정책적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나타나는 트로츠키의 국제주의적 면모와 세계 혁명에 대한 꿈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한편, 트로츠키의 연속 혁명 이론은 1920년대 중반에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에게 비판받았다. 스탈린은 소련의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면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없이도 한 나라, 즉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 최고의 연설가, 대중 선동가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론가이자 연설가, 대중 선동가였다. 1890년대 말 니콜라예프에서 ‘남러시아노동자연맹’이라는 노동운동 조직을 세우고 활동할 때부터 그는 연설가로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1917년 10월혁명 전 몇 달 동안의 상황을 실감 나게 묘사하면서, 당시 트로츠키가 보여준 탁월한 연설 능력과 열정을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한다. "여기에 위대한 혁명가가 와 있다. 레닌이 아무리 영리한 사람이라 해도 트로츠키라는 천재 곁에 서게 되면 그 빛이 희미해져버린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306쪽)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항일 운동가 중에도 트로츠키의 연설을 들은 사람이 있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동방민족노동자대회에 참석했던 몽양 여운형은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2인자였던 트로츠키의 연설을 듣고 오랫동안 그 감동을 잊지 못했다고 전한다.

짧은 훈화를 마치자 트로츠키는 그대로 정면의 대중을 향하여 약 세 시간이나 되는 웅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그 너무나 열렬하고 고조된 어조로 보아 나는 처음에 그것이 역시 5분이나 10분의 촌철적 선동 연설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그대로 똑같은 힘과 열과 고조된 흥분이 조금도 식어짐 없이 30분, 한 시간, 두 시간 계속되어 가는 것을 눈앞에 보았을 때에 나는 마치 무슨 기적이나 보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렇게 훌륭한 웅변을 처음 들었다. 대중들은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면서 그야말로 사자처럼 포효하는 이 거인 앞에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것이었다.
거의 6척이나 될 듯한 거대한 체구와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털, 커다란 눈과 높은 코, 깊게 새겨진 입이 모두 한곳에 모여들어서 만들어진 강렬하고 급격한 표정은 누구에게 비할 수 없으리만치 우렁차고 날카롭고 굳센 성음의 좋은 특색과 함께 보기 드문 위대한 웅변가의 소질을 보증한 것을 나는 관찰할 수 있었다.
- 여운형의 [나의 회상기]([중앙], 1936년 7월호)

뛰어난 작가이자 폭넓은 교양을 지닌 지식인
트로츠키는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저술가이자 폭넓은 교양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동시대 대부분의 혁명가 · 정치인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트로츠키는 자기 자신이 러시아와 유럽의 예술 세계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책과 연극과 전시회 비평을 썼다. 그는 뛰어난 작가였다." 저술가로서 트로츠키는 1900~1902년 사이에 첫 번째 시베리아 유형에서 이미 정치 평론을 써서 이름을 알렸으며, 소련에서 추방당한 뒤에 쓴 [나의 생애] [러시아 혁명사] [배반당한 혁명] 같은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생계 유지와 혁명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해주었다. 트로츠키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했는데, 독일어는 베를린 독일어와 빈 독일어의 섬세한 차이까지 살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트로츠키가 지닌 교양과 품위 있는 태도는 혁명 직후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서구 사회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특히 글쓰기는 트로츠키에게 필수적인 일이었으며,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그는 몹시 불안해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의 동료들은 트로츠키가 글을 쓰는 데 쏟는 시간을 중요한 실천적 토론이나 정치 업무에 쓰기를 바랐고,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트로츠키를 비판했다.

서비스는 "글쓰기에 대한 그의 집착은 스탈린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을 출세와 정책 추진에 바치는 인물과 대결하는 데는 단점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가장 용감한 볼셰비키, 유능한 군사 지도자
트로츠키는 10대 후반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이후로 위험한 일을 피하거나 몸을 사린 적이 없었다. 1905년에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 국내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1917년 10월혁명에서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끈 사람도, 내전에서 군사 지도자로서 전선을 누빈 사람도 트로츠키였다. 혁명의 결정적 순간마다 트로츠키는 언제나 선두에 서 있었다.

뛰어난 판단력과 실행 능력을 지닌 혁명가로서 트로츠키가 보여준 또 다른 놀라운 모습은 군사 지도자의 면모였다. 군대 경험이 전혀 없었던 트로츠키가 1918년 3월부터 적군(赤軍) 창설 작업을 맡아 성공적으로 해내고, 러시아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승리로 이끈 일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트로츠키는 다른 볼셰비키들이 위험한 반동 세력이라고 의심의 눈으로 보던 제국군 출신 장교들을 지휘관으로 받아들여 오합지졸인 적군의 지휘 계통을 강화했다. 또 정치위원 제도를 통해 군대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전략은 적중했다. 트로츠키는 완벽하게 군사 지도자로 변신했다.

파시즘이 몰고 올 파국과 소련의 미래를 예견한 혁명 예언자
아이작 도이처는 자신이 쓴 트로츠키 전기 3부작에 각각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의 예언자] [추방된 예언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도이처에 따르면, ‘예언자’라는 말은 "무장한 모든 예언자들은 승리했고 비무장의 예언자들은 파멸했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실제로 트로츠키는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혁명과 소비에트의 미래에 관해 많은 예측을 내놓았고, 상당수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일찍이 1904년에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이 인민을 저버리고 당 독재로 돌아설 위험성을 경고했다. 또 히틀러가 1933년에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기 훨씬 전부터 파시즘이 몰고 올 파국을 경고하면서 이에 맞서 공산주의 진영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나 자유주의 세력과 반(反)파시즘 연합 전선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상황 판단 중에는 틀린 것도 많았는데, 트로츠키 자신과 추종자들은 잘못된 판단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선 함구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10월혁명의 기수였던 트로츠키가 왜 스탈린에게 패했을까
- 위험한 트로츠키 대 독재적 스탈린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당의 동료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 면에서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 몇 년 동안 레닌과 함께 국가 건설의 지도자였다.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의 이름은 1917년부터 러시아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에 비해 스탈린은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1917년 혁명 직후에 레닌은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스탈린은 재능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으며 무식쟁이였고 단지 평범한 관료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트로츠키가 아니라 스탈린이 레닌의 후계자가 되었을까

레닌을 승계하는 투쟁에서 트로츠키가 패배한 까닭은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소련의 사회 세력 균형이 관료 집단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소련의 관료 체제가 트로츠키를 거부하고 스탈린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로버트 서비스는 패배의 원인을 트로츠키 자신에게서 찾는다. "트로츠키는 ‘관료 체제’라는 것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한 인간과 그 인간을 중심으로 한 계파에게 패했다."
트로츠키는 몇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고,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 탓에 당내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으며, 권력 투쟁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마다 몸이 아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기회를 놓쳤다. 또한 레닌의 의견에 곧잘 맞섰고 완고한 태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힐 줄 몰랐기에 그는 당을 분열시키는 위험한 인물로 비쳤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자 복수의 화신인 스탈린을 얕보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트로츠키의 적은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었다."

동지를 적으로 돌려세우는 ‘반대자’
트로츠키는 존경의 대상이었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당내에서 동지와 적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비판했고,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하고자 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내에서 이론가이자 조직가로서 가장 뛰어났고, 외무인민위원과 군사인민위원 등 행정적인 일을 할 때는 어느 누구보다 유능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을 품어야 하는 정치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트로츠키의 미국인 추종자였던 맥스 이스트먼은 트로츠키에게서 ‘겸손한 사람’의 내면을 보았다. "그는 절대로 잘난 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할 때 발언권을 독점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화 중 어떤 주제가 나와도 그것에 기꺼이 관심을 기울였으며 전적으로 경청했다."(584쪽) 하지만 트로츠키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오만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10월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트로츠키는 대중의 찬사를 받았으나 당내에서는 적개심과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트로츠키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모든 문제에서 옳다고 생각했으며 당을 자신의 견해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친구와 동지들이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릴 때에도 그들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에서 군사 지도자로서 활약할 때 다른 동지들이 트로츠키가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붉은 보나파르트(나폴레옹)’가 되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또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한 뒤 이어진 분파 투쟁에서 트로츠키는 동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스탈린과 하나로 묶어 ‘트로이카’라 부르며 비난함으로써 두 사람을 스탈린의 품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조롱과 풍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놀라운 글 솜씨는 종종 적에게 더 큰 원한을 품게 만들곤 했다. 결국 이 모든 순간이 모여서 그를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트로츠키가 놓친 기회
서비스는 트로츠키에게 "권력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기 위해 필요한 결단력이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지원을 받아 권력의 정점에 설 수도 있었다. 1917년 권력 장악 직후에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맡으라고 제안했으나 트로츠키는 거절했다. 분명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뒤이어 레닌이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아 달라고 하자 이번에도 거절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같이 반유대 감정이 강한 나라에서 유대인이 경찰 업무를 책임지는 직책을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회는 몇 번 더 있었다. 1922년 겨울, 병으로 쇠약해진 레닌이 자신이 사망한 다음을 생각해서 트로츠키에게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트로츠키는 훗날 이 제안이 자신에게 의장직을 승계하라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요청도 거절했다. 레닌은 1922년 12월 이른바 ‘정치적 유언’을 작성했는데, 그 유언에는 당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6명(트로츠키,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퍄타코프)에 대한 의견을 적었다. 이 유언이 공개될 경우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을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레닌은 스탈린이 소수민족 문제에서 보이는 무자비함과 폭력성과 권력욕을 우려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계획은 레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스탈린을 저지하는 일을 부탁했으나 트로츠키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만약 레닌이 죽은 직후에 유언장을 공개했다면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결정적인 시기에 병 때문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것도 문제였다.

트로츠키 대 스탈린 - 문제는 권력을 향한 의지였다!
권력 투쟁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약점과 스탈린의 강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스탈린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웅으로 유명해지는 동안, 조용히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가혹한 평가와 달리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과시했으며 단호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스탈린은 하부 당원들을 설득하고 세력을 조직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더러운 술수를 쓰는 것을 싫어했고 음모가의 자질도 별로 없었지만, 스탈린은 정치적 술수와 흑색 선전의 달인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레닌의 노선에 반대한 ‘반역자’라고 끈질기게 공격했다. 또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해 트로츠키란 가장 강력한 적수의 힘을 제거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물리쳤다.

트로츠키가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면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혁명 이론가 트로츠키와 정치 지도자 트로츠키


트로츠키와 그의 삶을 말할 때, "트로츠키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소비에트의 미래는 달라졌을까"라는 물음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트로츠키는 자신과 자신의 계파가 당권 경쟁에서 승리했더라면 소련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라는 논지를 폈다." "자신의 계파는 최소한 소련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반혁명적 경향, 자의적 통치, 정치적 폭력을 막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로버트 서비스는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민주주의와 테러, 독재에 대한 트로츠키의 사상과, 그가 혁명 과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실제로 행한 일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권좌에 있던 시간은 불과 6, 7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 기간에 한 일을 통해 그가 국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어떠했을지 가늠해볼 수 있다.

노동자 정부와 노동조합 논쟁
트로츠키는 1904년 뮌헨에서 만난 러시아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겔판트(‘파르부스’)의 ‘노동자 정부’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파르부스는 오직 노동자 계급만이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혁명 투쟁을 이끌 수 있다고 보았고, 부르주아 계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트로츠키 역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서 러시아의 미래를 보았고 노동자가 혁명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10월혁명 이후 트로츠키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한다고 비난받았다. 농민들은 도시의 시장에서 철수했고 식품 공급이 끊겼다. 공장 노동자와 광부들은 산업 생산이 붕괴된 데 분노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다. 이에 트로츠키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트로츠키가 승리했다면 전체주의는 없었을까
트로츠키는 1923년 10월 8일 정치국에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당내 관료화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1932년에는 소책자 [다음은 무엇인가]에서 각국의 모든 공산당에 ‘당내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관료 독재에 맞서는 투쟁’과 ‘선거의 자유’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서비스는 이러한 주장이 그 자신의 행동 때문에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트로츠키는 10월혁명 후 종종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을 옹호했으며,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923년 3월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할 때 크게 도움을 준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동안 소비에트 정부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가혹한 억압 조치를 취하면서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볼셰비키 독재가 강화되는 것을 보며 분노했다. 그들은 빵과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는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트로츠키가 있었다.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테러, 독재, 전체주의로 이루어진 스탈린 체제의 초석을 발견한다.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레닌은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보다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다.

트로츠키는 왜 테러리즘을 옹호했나
1920년 초에 러시아를 이곳저곳 여행하는 동안 트로츠키는 짧은 글들을 비서에게 구술했으며 5월에 이 글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저술로 완성했다. 이 책은 신속하게 페트로그라드에서 출판되었다. 제목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였다. 이 책에서 트로츠키는 혁명을 위한 테러를 옹호했다.

테러와 독재는 트로츠키와 결코 거리가 먼 단어가 아니었다. 1918년 8월 30일, 레닌 암살 기도 사건이 일어났다. 총상을 입은 레닌은 입원해야 했고, 곧 ‘적색 테러’가 선포되었다. 1917년 12월에 레닌이 설립한 정치경찰 ‘체카’가 반소비에트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중간계급과 상류계급에서 수천 명을 체포해 수감했고, 그중 일부는 즉시 총살형에 처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적색 테러를 적극 지지했다.

결론적으로, 트로츠키가 권력을 장악했다면 스탈린식의 폭압적인 정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해 서비스는 회의적이다. 서비스는 "어느 누가 소련을 통치했더라도 공산당 권력을 유지하려면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반에 당이 관료화되고 혁명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지만, 10월혁명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의 항의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유혈 진압하던 때부터 이미 타락하고 있었다.

목차

머리말
들어가는 글

제1부 전위 1879-1913

1장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성공한 농부 브론시테인 가족

2장 농촌의 어린 시절
"나는 도제 아래서 일을 배우는 도제였다."

3장 오데사의 실업학교
책을 사랑하는 명민한 소년

4장 청년 혁명가
나로드니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5장 첫 번째 투옥
감옥 안의 결혼식

6장 시베리아 유형
‘시베리아 최고 칼럼니스트’

7장 1902년, 레닌을 만나다
"아, 드디어 펜이 도착했군."

8장 가시 돋친 논쟁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불편한 존재

9장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05년 혁명의 대중 연설가

10장 462번 감방의 수인
재판정의 정치 선동가

11장 오스트리아 빈의 망명자
"중단 없는 혁명, 연속 혁명이 필요하다."

12장 당 통합을 외치는 단독자
"당도 하나요, 노동계급도 하나요, 혁명도 하나다."

13장 발칸 전쟁 특파원
"레닌주의는 틀렸다."

제2부 지도자 1914-1919

14장 1차 대전의 반전 운동가
플레하노프와 논쟁을 벌이다

15장 유럽 혁명 구상
"전쟁의 고통이 혁명을 부를 것이다."

16장 미국에서 보낸 3개월
환영 인파 속의 혁명 예언자

17장 혁명을 이끄는 선동가
레닌과 손잡다

18장 러시아의 자코뱅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9장 10월혁명과 권력 장악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가?"

20장 혁명의 주역, 레닌과 트로츠키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습니다."

21장 유대인 아닌 유대인
"나에게 선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22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더러운 평화’보다 ‘혁명 전쟁’"

23장 러시아 내전
레닌과 트로츠키는 왜 내전을 원했나?

24장 적군 사령관
전선을 누비는 ‘트로츠키 열차’

25장 내전의 승리자
스탈린과 트로츠키, 누가 더 잔혹한가?

26장 코민테른, 세계 혁명의 꿈
헝가리와 독일의 실패한 혁명

제3부 반대자 1920-1928

27장 인간 트로츠키
대중의 찬사와 당 내부의 반감

28장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트로츠키는 왜 테러리즘을 옹호했나?

29장 소비에트 정권의 위기
"크론시타트 반란을 진압해야 합니다."

30장 레닌의 불안과 서기장 스탈린
"더 강력한 경제 통제가 필요하다."

31장 레닌의 정치적 유언
"스탈린을 서기국에서 축출해야 합니다."

32장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결
위험한 트로츠키 대 독재적 스탈린

33장 비평가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거리

34장 통합반대파 결성
일국 사회주의론과 연속 혁명론의 대결

35장 동지와 추종자
정치가로서 트로츠키에게 부족했던 것

36장 트로츠키의 사생활
치유로서의 글쓰기

37장 트로츠키가 원한 혁명
트로츠키파가 승리했다면 전체주의는 없었을까?

38장 논쟁을 사랑한 혁명가
당에서 쫓겨나다

39장 알마아타 추방
"절대로 스탈린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제4부 세계 혁명가 1929-1940

40장 망명의 시작
터키로 모여드는 트로츠키주의자들

41장 세계 혁명 구상
"레닌주의 부활이 우리의 사명"

42장 ‘글 쓰는 기계’ 트로츠키
[나의 생애]와 [러시아 혁명사]를 쓰다

43장 10월혁명의 ‘유다’
소련 시민권을 빼앗기다

44장 스탈린의 ‘사형 선고’
프랑스를 거쳐 노르웨이로

45장 마지막 망명지 멕시코
트로츠키주의자 섬멸 작전

46장 제4인터내셔널 결성
국제적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에스파냐 내전

47장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나의 아내 나탈리야에게’

48장 러시아 혁명의 해석
트로츠키주의 내부의 논쟁

49장 모의 재판
존 듀이, 트로츠키 무죄 선고

50장 제2차 세계대전
"소련을 지지할 것인가, 반대해야 할 것인가?"

51장 유언과 암살
"나의 혁명적 정직성에는 단 하나의 오점도 없다."

52장 트로츠키가 남긴 것
트로츠키의 가장 큰 적은 그 자신이었다

주석
참고문헌
트로츠키 연보
주요 정치 세력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트로츠키가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고 조직가였으며 지도자였다. …… 그는 지도적 위치에 있던 어떤 볼셰비키보다 더 분명하게, 모든 남성과 여성이 자기 실현의 기회를 누리고 공동의 선(善)에 봉사할 수 있는 미래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간직했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트로츠키는 이런 미래상을 열정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시대에 대한 트로츠키의 묘사에는 왜곡이 많다. 이런 왜곡 때문에 우리가 소련공산당 역사를 이해하는 데 부분적으로 오류가 생겼다. …… 트로츠키는 대단히 매력적인 자질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이었다. 억지로 그를 평범한 수준으로
낮춰서 우리 대부분과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애써 주장해봐야 소용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는 때로 듣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솔직한 태도를 보였지만, 자서전을 펴낼 때와 자신이 작성한 문건을 공개할 때는 많은 부분을 감췄다. 이 책의 목적은 그렇게 감추어져 있는 트로츠키의 삶을 캐내는 것이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p.26~28)

1918년 9월까지 영국 외교부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논쟁에서 어떻게 레닌이 트로츠키에 비해 심리적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목격했다. 두 사람 모두 당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트로츠키는) 자신이 레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의 동료였던 레닌이 이제 거의 모든 볼셰비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1902년과 1903년 이래 처음으로 레닌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레닌의 지적 능력과 실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레닌의 의지력도 실감했다. 레닌에게 사적인 허영심이 없다는 사실에도 매력을 느꼈다.
('22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중에서/ pp.384~385)

겨울 동안 건강이 나빴던 레닌은 회복하는 듯했으나 (1922년) 5월 25일 뇌졸중을 일으켜 고리키의 요양소로 다시 가야 했다. 그래서 레닌은 스탈린에게 더 의존하게 되었다. 레닌의 의견을 정치국에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 사람이 스탈린이었다. 레닌은 고리키까지 자주 자신을 찾아오는 스탈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정치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고 스탈린은 최근 정치계 소식을 레닌에게 전해주었다. 레닌은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면서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하여 곁에 준비해 두도록 하였다. 트로츠키는 한 번도 레닌을 만나러 고리키까지 간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친구라기보다는 동지였으며 트로츠키는 환자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아플 때 정치국 멤버가 자신을 방문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
('31장 레닌의 정치적 유언' 중에서/ p.513)

스탈린과 부하린은 트로츠키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긴밀하게 협조했다. 스탈린은 ‘단 하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완성하는 것, 즉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한 사회주의의 완성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레닌은 이미 트로츠키와 이 부분에서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레닌의 문장을 왜곡하여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34장 통합반대파 결성' 중에서/ p.563)

트로츠키가 군중 집회에서 연설을 많이 할수록 정치적 극좌 진영에서 떨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트로츠키의 명성은 그 자신을 앞질러 갔다.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집회에 몰려왔다. …… 그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아주 쉽게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목숨이 연설에 달려 있기라도 하듯, 그는 이 집회에서 저 집회로 뛰어다녔다. 불과 몇 분 전에 다른 집회에서 했던 연설을 다시 반복하는 경우에도 그는 마치 즉흥 연설처럼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말을 풀어 나갔다. 그가 지닌 단단한 신념과 헌신적 태도는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보였다.
('17장 대중을 이끄는 선동가' 중에서/ p.306)

도도한 자신감과 깍듯한 예의범절의 소유자인 트로츠키는 사회주의자와 전혀 친구가 될 수 없는 외국인들과도 곧잘 어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외무인민위원 책무를 맡은 그가 페트로그라드의 외교관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 볼셰비키 지도자들 가운데 트로츠키만큼 인터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10월혁명 이전에는 대부분의 외국 특파원들이 트로츠키를 알지 못했다. 트로츠키를 만나게 된 이들은 그의 성실함과 정확함과 강한 신념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20장 혁명의 주역, 레닌과 트로츠키' 중에서/ pp.349~350)

그에게 글쓰기는 종종 연설이나 조직 활동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심지어 1920년대 중반에 그는 자신의 소책자 2판, 3판을 펴낼 때 긴 서문을 새로이 쓰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손에 쥐고 글을 써 내려가면서 또 한 가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그는 너무나도 사랑했다. 머릿속에 단어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순간에 그를 감히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족과 비서들과 보좌관들이 자신의 이런 버릇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분파를 조직하는 일은 결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 마르크스주의 교의에 따라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은 자신의 경력이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33장 비평가 트로츠키' 중에서/ pp.554~555)

그는 용감했다. 몸을 숨겨 피하는 대신 그는 러시아 정부를 향해 소비에트를 폐쇄하려면 해보라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트로츠키처럼 스스로 자신을 위험 속에 던져 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인기를 좇을 뿐이라는 사람들의 비난에 트로츠키는 당연히 화가 났다. 저들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혁명을 진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9장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중에서/ p.178)

트로츠키가 내건 구호는 “우리는 페트로그라드를 포기하지 않는다!”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백군의 공격으로 어느 적군 연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트로츠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직접 그 연대를 지휘하고 나섰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말에 뛰어오른 그는 퇴각하는 병사들의 뒤를 쫓아갔다. 트로츠키의 당번병인 코즐로프도 황급히 뒤따랐다. 두 사람은 병사들을 독려하여 다시 집결시키고 부대 지휘관에게 결의를 굳히도록 독려한 다음 전선을 다시 구축하여 유데니치 군대에 맞서도록 했다. 이때 발휘한 용맹함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트로츠키는 ‘적기(赤旗) 훈장’을 받았다. 그가 내전 기간 중에 위험을 무릅쓴 것은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트로츠키는 군사 지휘관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군사 지도자로서 그가 점점 더 큰 찬사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5장 내전의 승리자' 중에서/ p.430)

스탈린과 부하린이 중국 정책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들은 1927년 4월 중국공산당에 코민테른을 통해 장제스와 국민당에 타격을 줄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봉기가 일어나자마자 장제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가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 지도부를 심하게 빈정댔다. 하지만 비판자가 된 트로츠키 자신에게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가 봉기 명령을 내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탈린과 부하린이 세계 혁명을 방기했다는 반대파 측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즉각적인 공산화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것은 스탈린과 부하린뿐이 아니었다. 트로츠키 역시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
('37장 트로츠키가 원한 혁명' 중에서/ p.614)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타협할 줄 몰랐다. 1917년 이후 담배를 끊었고, 술도 특별한 경우에만 조금 마셨다.(레닌 역시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맥주를 조금 마셨을 뿐이지만 트로츠키에 비한다면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트로츠키는 지저분한 농담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누구든 여성과 어린아이 앞에서 욕설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 거의 모든 동료 볼셰비키들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욕도 잘하고 남의 이야기도 잘 했다. 스탈린 쪽 인물인 미코얀은 트로츠키가 ‘사람들이 러시아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방진 기사 역할을 한다고 불평했다. 이는 트로츠키가 저속한 말을 싫어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결코 주위 사람과 어울려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주위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잠재적 동맹자들을 멀어지게 만든 것이다.
('35장 동지와 추종자' 중에서/ p.583)

트로츠키는 동료 당 지도자들에게서 신뢰가 넘치는 따뜻한 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도 몰랐다. 스탈린은 인간의 심리를 잘 알았다.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스탈린 역시 레닌을 친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스탈린의 성격을 여러모로 싫어했으며, 스탈린이 상스럽고 예의범절도 모르고 지적 능력도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레닌은 스탈린을 정치 보좌역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스탈린 역시 레닌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31장 레닌의 정치적 유언' 중에서/ p.514)

정치국은 트로츠키가 개인적 목적을 위해 적군을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계속 우려했다. 그가 10월혁명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다는 의심이 끈질기게 존재했다. 이 의심이 1925년 1월 트로츠키가 군사인민위원 직책을 잃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군 지휘관들을 지지 세력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군사인민위원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그는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35장 동지와 추종자' 중에서/ p.587)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그루지야 사건을 맡아줄 것과 스탈린을 저지하는 일을 카메네프와 같이 해줄 것을 요청했다. 레닌의 요청에 트로츠키는 동의했지만 별다른 열의는 보이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사람에 관한 문제보다는 정책을 논하는 데 열성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트로츠키는 스탈린 같은 인물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이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트로츠키가 볼 때 스탈린은 정치적으로도 별로 대단치 않은 인물이었고 지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31장 레닌의 정치적 유언' 중에서/ p.523)

러시아 내전 이후부터 트로츠키는 건강 문제를 자주 겪었다. 하지만 건강 문제에 심리적 이유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발병 시기와 정치적 위기를 겪는 시기가 일치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았기 때문이다. 1923년 여름부터 1924년 봄까지가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 기간에 트로츠키는 정치국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였다. 그의 병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관측이 많이 떠돌았다. 그런 논평이 다시 한 번 설득력을 발휘한 시기는 레닌이 죽은 후 몇 주 동안이었다. 그때 트로츠키는 현 지도부가 벌이는 공개적인 비난 운동의 대상이 되어 <프라우다>와 소책자를 통해서, 그리고 중앙위원회와 13차 당 회의에서 철저하게 비난당하고 있었다. 좀 더 기질이 약한 사람이라면 이런 비난의 압박에 곧 신념이 무너져버릴 정도였다. …… 트로츠키의 건강 악화가 꼭 정치적 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했으며 병의 증세가 단순히 그의 상상의 산물은 아니었다.
('36장 트로츠키의 사생활' 중에서/ p.594)

트로츠키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의 힘을 한곳에 집중하려는 의지였다. 그는 언제까지나 혁명가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는 결코 전업(專業) 정치가가 아니었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집착은 스탈린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을 출세와 정책 추진에 바치는 인물과 대결하는 데는 단점으로 작용했다. 트로츠키도 스탈린도 건강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종종 휴식을 취해야 한다면서 자청하여 몇 달씩 물러나 요양을 하곤 했다. 그는 레닌처럼 사상을 제시하여 소비에트 국가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지닌 지도력 개념은 너무나 완고했다. 그는 연설 능력과 문장력을 우월함의 증표라고 과대평가했다. 그는 그렇게 깨끗한 정치인도 아니었으면서 정작 더러운 방법을 써서라도 투쟁해야 할 때가 되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노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레닌의 후계자 경쟁에서 트로츠키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장애물은 바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강력한 욕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승리자가 되려는 야망에 완전히 사로잡힌 싸움꾼이 되기보다는 얻어맞는 경쟁자로 남는 편이 트로츠키에게는 더 편하게 느껴졌다. 최고 권력을 절실하게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2장 트로츠키가 남긴 것' 중에서/ pp.859~860)

트로츠키는 제한 없는 토론과 조직과 선거를 촉구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해방의 미덕을 설교했다. 그러나 그가 위세 넘치는 위치에 있던 1917년에서 1922년 사이에 그의 실제 행동은 무척 달랐다. 그는 당과 노동조합 내에 있던 반대자들을 압살했다. 그는 신속한 행동과 복종을 원할 때면 언제든지 기존 제도에 마련된 견제 장치를 짓밟았다. 그는 토론보다는 명령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는 오만했고 고압적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자기들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간 트로츠키와 지도자 트로츠키는, 정작 실제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와 그리 유사성이 없었다.
('52장 트로츠키가 남긴 것' 중에서/ p.899)

레닌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트로츠키는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자신의 구상을 망각하지 않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다시 그 주제로 관심을 돌렸다. (1920년) 11월 8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현재 노동조합이 지닌 권한과 기능을 박탈하지 않는 한 혁명 전체가 위협받는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10월혁명으로 노동자 국가가 들어섰다는 점, 인민위원회의의 정책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일부만을 보호한다는 점, 결국 계급 전체를 보호하는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고 국가라는 점을 트로츠키는 지적했다. …… 만약 ‘국가화’를 시행하지 않으면 경제가 붕괴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계속해서 불평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할 것이고 산업 생산은 타격을 받을 터였다. 노동 현장에서는 계속 충돌이 늘어날 것이며 공장과 광산의 재건은 끝없이 미뤄질 것이다.
('29장 소비에트 정권의 위기' 중에서/ pp.485~486)

트로츠키는 적군의 최고 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에게 지시를 내려 폭동 진압을 투하체프스키에게 맡기도록 했다. 닷새가 지난 뒤 트로츠키는 여전히 우려를 표명하면서, 중앙위원회가 크론시타트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서서히 조성되고 있던 반란에 당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자신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봄이 되어 바다의 얼음이 녹으면 반란자들이 외국의 지지자들과 연대할 수도 있었다.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이 표현은 그가 내전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 그는 크론시타트 사태 때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트로츠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 지도부 전체가 이 사태에 관련된 논의와 결정 내용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트로츠키는 더 많은 것을 숨겼다. 그는 반란 진압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었고, 이 사실은 나중에 그가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할 때 그를 몹시 난처하게 했다.
('29장 소비에트 정권의 위기' 중에서/ p.491)

트로츠키 자신이 공산주의 대의의 진전을 위해 채택했던 전략을 보면 과연 폭압적 정권을 피하는 데 그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사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문화 방면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세우는 데 여러 개의 주춧돌을 놓았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레닌은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보다 동의하는 부분이 더 많았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인간이라고 비난했지만, 트로츠키 자신도 권좌에 있을 때는 기꺼이 무제한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스탈린에게 이런 비난을 퍼붓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p.24~25)

트로츠키가 당내 토론에서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을 제안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또한 당내 직위를 선거로 뽑는 원칙을 다시 도입할 것을 요구했으며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를 초청해 정책 토론에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 같은 안정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변함없이 소비에트 독재 체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이 체제가 이념적으로 불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과 법률 외적인 탄압 조치를 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37장 트로츠키가 원한 혁명' 중에서/ p.609)

“테러리즘을 원칙적으로 배격하는 사람은 ? 즉, 의지가 굳은 무장 반혁명 세력에게 압박과 위협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배격하는 사람은 ? 노동계급이 지닌 최고의 정치적 지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독재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배격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을 배격하는 것이며 사회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이다.”
만일 트로츠키가 의미한 것이, 혁명가라면 전쟁터에서 군대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와 동료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이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인질을 총살형에 처했다. 또한 러시아 사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통째로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들은 테러리즘 사상을 칭송했으며 그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노동자와 농민이라 하더라도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취하면 볼셰비키는 그들을 야만적으로 다뤘다.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해방이라는 트로츠키의 초기 이념은 오래된 동전처럼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28장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중에서/ pp.467~468)

(트로츠키는) 1920년대 초 자신의 숭배자인 미국의 맥스 이스트먼에게 볼셰비키당은 “진정한 미국 혁명 운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러시아인 수천 명이라도 불에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용의도 있다고 말하면서 전혀 도덕적인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 만일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이 트로츠키가 이런 대규모 희생을 고려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목적이 바람직하다면 수단은 어떤 것이라도 택할 용의가 트로츠키에게는 있었다. 트로츠키는 권력의 무력 탈취, 독재, 테러, 내전이 없이는 소비에트 체제를 절대로 창출할 수 없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적군은 백군과 싸워 이겨야 했으며 외국의 군사 개입을 격퇴해야 했다. 당은 경제 재건을 위해 산업자본 투자에 최우선권을 주어야 했다. 트로츠키에게는 대중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다.
('33장 비평가 트로츠키' 중에서/ p.544)

트로츠키는 특출한 인간이었으며 복잡한 인간이었다. 그의 강점은 10월혁명과 러시아 내전 시기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러시아와 외국에 있는 한 세대의 지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조직가로서, 그리고 연설가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지적인 영역은 글로 쓴 것만 해도 매우 넓었고 개인적 차원의 관심에서는 더욱 넓었다. 그는 대단한 문장가였다. 그는 자신이 원할 때면 혁명 전략에 관해서 명백하게 의견을 밝힐 수 있었다. 정부에 들어가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곧 파악했다. 그는 볼셰비키의 대의를 선전하는 데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우수했다. 적군이 규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그보다 더 효율적으로 활약했던 사람은 없었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제 관계를 폭넓게 생각하였으며 혁명의 여러 목적 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항상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두었다. 하지만 동전의 뒷면을 보면, 그가 종종 사고방식에서는 도식적이고 경직돼 있었으며, 실천에서는 극히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상식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하기보다 급작스럽게 열에 들뜬 행동을 택하곤 했다. 그는 용감하고 충동적이었으며 예측 불가능했다. 트로츠키는 남다른 자질의 소유자였다.
('52장 트로츠키가 남긴 것' 중에서/ pp.862~863)

저자소개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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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2종
판매수 452권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 러시아 근현대사 권위자이며 특히 혁명사 연구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서구 학계와 평단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야심찬 연구 성과를 끊임없이 발표해 왔다. 그의 저작은 철저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냉정한 분석을 앞세우는 연구 태도, 방대한 자료 조사,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1947년에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후 에섹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환 연구원으로 옛 소련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영국 킬 대학 교수를 지냈다. 1998년부터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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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장칭], [트로츠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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