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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 이승우 장편소설[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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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이승우
  • 출판사 : 민음사
  • 발행 : 2012년 08월 24일
  • 쪽수 : 36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3748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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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작가
한국 소설에 역사적 넓이와 형이상학적 깊이를 더해 온
이승우 문학의 새로운 도전


“탈역사적 추상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 속의 형이상학을 탐구”하며 “우리 문학으로서는 드물게 형이상학적 탐구의 길을 걸어온 작가”(문학평론가 박철화)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가 출간되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 이승우가 2011년 봄부터 2012년 봄까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미적 추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랑과 죄가 얽히며 작용하는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전개되며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겹쳐진 다층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지상의 노래]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승우가 십수 년 전부터 구상해 온 모티프를 가지고, 인간 존재와 내면세계에 대한 다층적 사유와 철학으로 욕망과 죄의식의 근원을 파헤친 또 하나의 문제작이다. 천산 수도원 72개의 지하 방에서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벽서. 사치스러울 만큼 장식적 서체로 필사된 [켈스의 책]에 비견될 만한 화려한 장식과 신비로운 그림들. 천산 벽서에 숨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깊이 파헤칠수록 역사와 사건은 미궁으로만 빠져드는데…….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개인들의 굴절된 욕망과 왜곡된 역사의 정치권력, 그리고 비극의 희생양이 마침내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투병 끝에 죽은 형이 남긴 미완성 유고, 천산 수도원의 비밀은 무엇인가?
―개인의 삶에 끼어들어 작동하는 욕망과 정치, 초월이라는 기제들


[지상의 노래]에는 다섯 가지의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있다. 형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그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관한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차동연이 쓴 글을 읽고 차동연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 ‘장’의 이야기. 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촌 누나 연희를 사랑한 ‘후’의 이야기. 그리고 그 중심에 천산 수도원이 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여행 작가인 강영호와 동생 강상호다. 강상호는 형의 투병을 외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형의 원고를 정리하여 유고집을 만든다. 교회사 전공자인 차동연의 관심을 끈 것은 천산 수도원의 3평 남짓한 수십 개의 지하 방 벽에 쓰인 성경 구절들. 그는 수도원의 폐허를 발굴하고 그곳 공동체의 성격을 조사하는 데 착수한다. 장은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 절반을 내쫓은 다음, 군사정권의 독재자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한정효를 그곳에 유폐하고 수도원 길목에 초소를 세워 감시한 인물이다. 후는 연희를 겁탈하고 버린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였다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천산 수도원을 찾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왜곡된 정치권력이 불러일으킨 비극의 현장이 후를 기다리고 있다. 구원과 초월, 욕망과 죄의식 등 신성과 세속이 뒤엉키며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졌던 천산 수도원의 거대한 실체를 목도하게 된 차동연. 그는 이제 엄청난 고민에 휩싸인다.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가. 역사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죄의식에 사로잡혀 유업을 이어 가는 자

[지상의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죽은 자가 유업을 남기고 살아 있는 자가 이를 마무리하는 장면을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산 수도원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강영호와 이를 마무리하여 유고집에 실은 강상호. 역사의 추문을 마음속에 묻어 둔 채 길고 긴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생을 마감한 장과 그의 고백을 듣고 내용을 옮겨 적은 차동연. 그리고 죽어 가던 한정효가 최후까지 하던 일을 대신 마무리하고 숨을 거둔 후. 주요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관계 속에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 구조는 소설 전체를 떠받드는 핵심 원리라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다

[지상의 노래]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후의 이야기다. 소설은 후의 이야기와 함께 강상호, 차동연, 장, 한정효의 이야기들을 차례로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 덩어리들은 대위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서는 차동연과 후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각각의 절을 끝맺는 몇 개의 문장들과 차동연과 후가 천산 수도원을 찾아가는 장면, 그리고 두 사람이 수도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목격하게 되는 장면도 매우 유사하다.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30년 전 후가 했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하고, 30년 전 후가 보았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보는 형식이다. 문학평론가 정영훈은 후의 이야기를 차동연이 쓴 소설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신학자 차동연은 천산 수도원의 실체와 정황을 밝힐 수 없었으나, 딜레마에 빠진 역사학자 차동연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소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후의 이야기는 차동연이 신문 기사를 통해 미처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그의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던 것들을 대리 보충해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 역사의 굴곡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과 개인적 관계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이 만나고, 둘이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깊은 죄의식, 역사의 추문, 자신들의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수도원 공동체의 정결한 신앙과 함께 이 이야기는 역사보다 보편적이고 신문 기사보다 풍성해진다. 그것은 차동연과 작가 이승우가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체제의 비극이 야기한 72개의 지하 방은 카타콤인가, 아니면 ‘쉬는 곳’을 뜻하는 체메테리움(Coemeterium)인가. 결국 그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줄거리

폐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다 죽은 형 강영호의 유품을 챙기던 강상호는 형의 유고를 발견한다. 숨은 여행지를 소개하는 형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강상호는 출판사 직원과 함께 인적이 닿지 않는 천산 정상에 세워진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을 찾는다. 헤브론 성의 돌집을 둘러보던 그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 만한 크기의 일흔 개가 넘는 지하방 벽을 가득 채운, 아름답게 장식된 글씨체로 쓰인 성경 구절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강영호의 책을 읽은 교회사 강사 차동연은 천산의 벽서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장식적인 서체로 필사된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글을 발표한다. 3개월 후 차동연은 교회사 연구 재단의 지원으로 천산 벽서를 연구하러 나선다.
후는 사촌 누이 연희를 겁탈하고 버린 박 중위를 용서할 수 없다. 비 내리는 오후, 후는 칼을 들고 숨어서 박 중위를 기다린다. 후는 누이를 범하고 버린 데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데 모멸감을 느껴 충동적으로 그를 찌른다. 후의 아버지(연희의 삼촌)는 공포에 질린 후를 두 재를 넘어야 갈 수 있는 헤브론 성에 맡긴다. 이름도 버린 채 서로를 오로지 ‘형제’라고 칭하며 끝없는 기도와 성경 필사로 자신의 영혼을 닦는 이들이 모여 있는 헤브론 성에서 후는 차츰 평온을 찾아 간다.

차동연은 천산 수도원에 대해 제보할 게 있다는 연락을 받고 요양원으로 향한다. 퇴역 군인 장은 상부의 명령으로 천산 수도원의 수도사 절반을 강제로 내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가장 나이 든 형제를 겁박해서 명령을 수행한 장은 초소를 만들어 수도원 출입을 원천 봉쇄한다. 이때 수도원에서 쫓겨난 후는 연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연희가 어느 도시의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에 의지해, 후는 여러 도시의 미용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후는 차라리 미용 기술을 배워 보라는 권유를 받고 미용사가 된다. 상류층만 출입하는 미용실에서 일하게 된 후는 원장의 소개로 어느 ‘사모님’을 모시게 되는데, 일탈과 방종의 대가로 연희의 주소를 알게 된다. 연희를 만난 후는 자신의 아버지가 술빚을 갚아 주는 대가로 박 중위에게 연희를 넘겼음을 알게 되고, 연희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 누이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여인에 대한 욕망이었음을 깨닫고 무작정 길을 나선다. 빈사 상태의 그를 구해 준 아버지뻘의 남자, 한정효는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길을 밟다 보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준다. 한정효와 헤어지고 나서 낯선 사내들로부터 사모님과의 일로 린치를 당하고 인간 이하의 굴욕을 겪은 후는, 자신의 유일한 쉼터 헤브론 성으로 가리라 마음먹는다.

군사정권의 핵심으로, 선글라스 안에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권력을 향해 질주하던 한정효는 신실한 기독교도인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장군’에게도 무리한 권력 창출 시도를 더 이상 그만두라고 권한다. 장군은 자신의 오른팔에서 가장 위험한 적으로 돌변한 한정효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그를 헤브론 성에 유폐한다. 장은 한정효를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이다. 감옥이 되어 버린 수도원에서 한정효는 그곳의 어느 누구보다 더 ‘형제’다운 모습으로 자연스레 섞여 들어간다. 한편, 권력 재창출에 실패한 장군이 물러난 뒤 또 다른 ‘장군’이 권력을 잡는다. 그는 문제의 씨앗을 없애기로 작정하고 헤브론 성 자체의 파괴를 명령한다. 장은 파멸을 막기 위해 천산 공동체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조언하지만 누구도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으로 한정효에게 모든 계획을 알려 주고 그만 사라지면 모두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형제들의 안위를 위해 한정효는 모습을 감추지만 권력자의 칼은 멈추지 않는다. 헤브론 성에 밀어닥친 군인들은 한 명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영원한 잠을 준비하는 좁다란 지하 방에 모든 형제들을 몰아넣고 산 채로 매장한다.

장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차동연은 비극의 현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헤브론 성에서는 스러진 시멘트 조각으로 장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막힌 복도나 서로 뒤엉킨 채 죽음을 맞이한 형제들의 유골 등 집단 살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하나의 방에 한 구의 시신, 아름다운 서체로 장식된 벽은 누군가가 형제들의 안식을 준비했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 방에 머리를 내놓은 채 묻혀 있는 유골을 보며 차동연은 그가 한정효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헤브론 성을 찾은 후는 죽어 가는 한정효를 발견한다. 그의 안식을 도운 후는 한정효가 마지막까지 했던 일들을 이어받아 완성한 후, 자신도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목차

1장 천산 벽서
2장 사랑, 또는 죄
3장 압살롬
4장 도피성, 혹은 감옥
5장 역사, 어쩌면 사소한
6장 카타콤
7장 순례
8장 체메테리움

작가의 말
작품 해설
욕망의 변증법, 소설을 읽는 세 가지 방법_ 정영훈(문학평론가, 경상대 국문과 교수)

본문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믿음만큼 중요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대개는 믿음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모든 경우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거꾸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러내려고 한 것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 작업이 믿음만 아니라 미적 감각 또한 고양시키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한 작업이 아름다움만 아니라 믿음 또한 고양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도드라지는 일도 일어난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숭배를 위해 즐기고 즐기기 위해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켈스의 책]과 천산의 벽서를 탄생시킨 것은 믿음만도 아니고 아름다움만도 아니라는 것.
(/ pp.26~27)

성인이 된 후 후는 오랫동안 라면을 먹지 못했다. 라면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자리를 피해야 했다. 라면은 그의 내부에서 털어 낼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료로 작용했다. 자기가 라면에 환장하지 않았다면, 박 중위가 주는 라면을 받아먹지 않았다면, 아예 라면 맛을 몰랐다면 연희 누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관련은 서울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과 뉴욕을 덮친 태풍 사이의 관련만큼 비정형적이고 무의식적이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태풍은 일어날 것이다. 혹은 나비가 수만 번 날갯짓을 해도 태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태풍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과가 무작위로 원인들을 소환하는 이 시스템은 심리학적 요인에 의해 지원받고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인간 심리의 무규칙성과 돌발성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과 인과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 pp.40~41)

비가 갠 아침에 대문 역할을 하는 통나무 기둥에 기대 잠든 후를 발견한 사람은 헤브론 성의 한 형제였다. 헤브론 성에서는 모두 형제로 불리었다. 예외는 없었다. 나중에 후가 그 사실을 궁금해했을 때 한 형제는, 모든 개미들은 개미로 불리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개미들에게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모든 개미들을 그냥 개미라고만 부른다. 사람들의 차별 없는 호명 속에서 개미들은 평등하다고 형제는 설명했다. 신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차별 없이 평등하고 차별 없이 하찮은 존재다. 개인마다 개인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특성은 신의 시선으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닌 것을 내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이 모든 형제들을 형제로 호칭하는 이유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하찮은 존재이고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생기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이 세상의 욕망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라고 형제는 설명했다.
(/ p.93)

군복을 입고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군복을 벗은 후에도 한정효는 장군의 충실한 그림자였다. 그는 그림자였으므로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장군을 환한 빛 가운데 드러나게 했다. 그것이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그의 일이었다. 실체가 빛날수록 그림자는 더 어두워졌고, 그림자가 어두워질수록 실체는 더 빛났다. 그림자를 어두워지게 하기 위해 실체가 더 빛을 내지는 않았지만, 실체를 빛나게 하기 위해 그림자는 더 어두워져야 했다. 오래전에 한 신비주의자는 절대자를 한없이 높이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기 위해 그림자를 비유로 사용했다. “당신의 존재 앞에서 나는 감히 존재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환상이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경우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지우고 보이지 않게 하면서 오직 장군만 높아지고 빛나고 위대해지도록 힘썼다는 점에서 그 역시 신비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치권의 신비주의자들은, 높고 빛나고 위대한 절대 권력자의 그림자로 자처함으로써 그 영광의 휘장을 같이 두르기도 한다.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에게 이런 욕망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정치적 신비주의자들은 훨씬 현실적이고 노골적이다. 권력자가 높고 빛나고 위대해질수록 그들이 두르게 될 휘장 또한 더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권력자를 더 높고 더 빛나고 더 위대해지게 떠
받든다. 그들을 위해서도 권력자는 더 높고 더 빛나고 더 위대해져야 한다. 그 사실을 의식했든 안 했든, 장군이 높아짐에 따라, 그만큼은 아니라도, 이 신비주의자 역시 덩달아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pp.164~165)

젊은 교회사 강사 차동연이 이끄는 천산 공동체 발굴 팀은 여러 날에 걸쳐 수도원 건물 지하 방을 조사했다. 복도를 따라 양쪽에 만들어진 방은 모두 일흔두 개였다. 모양과 크기는 일정했다. 한쪽 면이 2.5미터, 다른 쪽 면이 3.9미터 내외로 세 평 정도였다. 방에는 벽면의 글씨 외에 어떤 장식도 없었다. 이미 소개된 대로 성경을 옮겨 적은 글씨들은 반듯하고 꼼꼼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쓴 표시가 또렷했다. 대개 먹을 썼지만 군데군데 채색이 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야생 식물에서 채취한 천연 염료를 이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크기와 색깔이 적절히 섞여 조화를 이룬 글씨들은 거리를 두고 보면 미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흔두 개의 방에 적힌 글들의 필적을 분석한 발굴 팀은 잠정적으로 한 사람의 필적만은 아니라고,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필사에 참여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 p.332)

이번에 [켈스의 책] 대신 그가 인용한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지하 무덤인 카타콤이었다. 미로와 같은 지하 통로, 통로 양옆의 묘혈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상징들을 형상화한 벽화들(물고기 배 속의 요나, 세례 받는 예수, 오병이어, 비둘기, 어깨에 양을 얹은 목자 같은)과 천국에서의 안식을 염원하는 기원문들로 채워진 카타콤 내부를 천산 공동체의 지하 공간과 비교하고 그 유사점을 언급했다. 그는 천산 공동체 벽서의 제작 동기가 카타콤 벽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이 세상에 대한 강한 부정과 곧 맞이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놀라울 만큼 강렬한 소망. 그들은 순수하고 철저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들이 무덤을 잠시 쉬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불렀던,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네크로폴리(Necropoli)’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있었다. 차동연은 체메테리움이라는 단어를 소개하면서, 그들은 육체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니며, 카타콤에 들어와 누움으로써 비로소 참된 쉼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점은 천산 공동체의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증언했다.
(/ p.345)

소설의 중심은 비어 있고, 이 빈 곳을 ‘후’의 이야기가 채운다. 드러난 것의 빈틈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후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시이다. 그 이야기는 누군가(who)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누구나(whoever) 쓸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러난 것에서 빈틈을 발견한 자, 이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만한 자,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펜을 들어 쓰는 자, 그가 작가다. 우리가 경험한 삶으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욕망을 가진 자,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어떤 보편적인 차원에 놓고 이리저리 굴려 보는 자, 그가 작가다. ‘차동연’의 내면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애초에 그가 품었던 것은 신학자로서의 욕망이었고, 여기에 역사학자로서의 욕망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둘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어쩐지 이는 작가 이승우가 걸어온 길과도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가장 나중에 온 것이라는 사실은, 작가로서의 이승우의 자부심을 보여 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60.02.21
출생지 전남 장흥
출간도서 8종
판매수 1,373권

195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1년 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이면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자신만의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집요하게 구축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으로는 [에리직톤의 초상], [독], [식물들의 사생활], [한낮의 시선], [그곳이 어디든], [끝없이 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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