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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팝과 책들의 정원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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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박주현
  • 출판사 : 중앙북스
  • 발행 : 2011년 11월 18일
  • 쪽수 : 288
  • ISBN : 978892780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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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나는 엄마에게 나의 거대한 애인을 들키고 싶지 않다.
    동시에 들키고 싶다.


    2010년 겨울부터 2011년 가을까지 계간 '문예중앙'에 일 년간 연재된 박주현의 장편소설 [롤리팝과 책들의 정원]이 출간되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스물아홉의 내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 소설은, 모든 딸들이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는 길목에서 겪는, 그 딸의 엄마 역시 똑같이 겪어낸 통과의례의 역사이다.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달팽이]가 당선되어 등단한 소설가 박주현이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이다.
    여자들은 서로의 아픔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그리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내 애인의 애인을…….[롤리팝과 책들의 정원]에는 스물아홉 살의 불협화음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현’을 비롯해 현의 엄마, 현의 애인의 죽은 아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정체가 밝혀지는 꼬마 소녀가 등장한다. 그들은 만나서는 안 되는 남자를 만나고,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을 읽고, 폭식을 하거나 먹지 않고, 알약의 힘을 빌리고, 한 줄도 쓸 수 없는 소설을 계속해서 쓴다. 하지만 슬퍼서 아무것도 멈출 수 없다. “안 돼, 하지 마.”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던 여자들, 그녀들의 선택 뒤에 감추어진 욕망과 슬픔을 작가는 솔직하고 섬세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싶다.
    나는 그를 열고, 열고, 또 열었다.
    Help me……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소설 한 편을 써서 등단하기는 했지만 소설가라고 내세우기도 애매한 보습학원 강사 현. 현은 선배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아버지뻘 나이의 유명 사진작가와 은밀하게 만나고 있다. 그에게 끌린 것은, 그의 아내가 자살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잠자리를 할 때 현은 그 죽은 아내의 그림자와, 그녀의 슬픔을 동시에 본다.

    나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죽은 여자를 통해 나의 거대한 애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죽은 여자들을 잘 알았다. 또 좋아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유, 다른 상황에서 죽어가지만 나는 죽은 여자들, 특히 욕망의 미아였던 여자들을 좋아했다. 길 잃고 죽은 여자들, 못되고도 착한 여자들, 비겁한 여자들. 내가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다.
    (/ p.245)

    현이 외출을 하거나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현의 엄마는 현의 옷가지며 책들을 모조리 뒤져 실마리를 찾아내려 한다. 현의 엄마는 현이 미쳤다고 단정 짓고 그녀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간다. 현이 읽는 불온한 책들이 그녀를 망쳤다고 생각하여 책들을 불태우고, 그런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현은 섭식장애 치료를 받으며 처방받은 알약들을 몰래 모은다. 엄마에게 금지당한 책들과 그 책들 뒤에 숨긴 알약, 그리고 몰래 쓰고 있는 포르노그래피 소설. 현은 엄마가 바라는 모습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안 돼? 안 돼. 안 되고말고. 안 된다고 답하는 목소리는 엄마의 것이다. 내 안에는 항상 엄마의 목소리가 상주한다. 나는 목소리를 잘 듣는다. 잘 듣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가운데 안 되는 것을 고른다. 안 되는 공부, 안 되는 직업, 안 되는 남자, 안 되는 연애. 엄마는 나의 거대한 애인을 보면 뭐라고 할까. 나는 엄마에게 내 애인을 들키고 싶지 않다. 동시에 들키고 싶다.
    (/ p.22)

    거대한 애인은 지방 촬영을 갈 때 현과 동행하거나 해외 촬영에서 돌아와 현을 찾지만 그들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떳떳하게 연인으로 소개되지 못하는 채 상처받는 현에게 거대한 애인과는 전혀 다른 타입인 대학동기 지호가 다가온다. 한편 현은 ‘말하는 성기’를 가진 여자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성심리치료사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룰루의 다리를 열어. 나는 거기 있으니까.”목소리는 확실히 룰루가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오므리고 있는 다리 사이, 아주 깊은 곳에서 울려왔다. 클레망조는 조심스럽게 룰루의 다리를 벌렸다. 룰루는 순순히 클레망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가볍게 뒤로 몸을 기대며 다리를 활짝 벌렸다. 룰루의 머리카락과 같이 붉은색 털로 뒤덮인 그것도 벌어졌다. “오, 맙소사.”클레망조도 룰루도 그것에
    손대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스스로 벌어져 반짝이는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나에게 키스해, 그럼 네가 원하는 걸 들려주고 보여줄게. 자, 어서.”
    (/ p.250)

    거대한 애인의 서재에서 투명한 여자의 사진을 발견한 현은 엄마의 오래된 책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에 끼워져 있던 빛바랜 사진을 떠올린다. 사진의 주인공은 엄마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갓난아기. 이제 자신과 너무도 다른 동시에 너무도 닮은 엄마의 비밀, 그리고 자신이 쓰고 있는 포르노그래피 소설 [푸시 토크(Pussy talk)]의 결말과 정면으로 마주할 시간이다.

    멈추고 싶지만, 슬퍼서 아무것도 멈출 수 없다

    [롤리팝과 책들의 정원]은 자발적으로 순수의 포기를 선언한 소녀의 마음,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늪을 닮은 소설이다. 발을 담그는 순간 욕망과 온갖 감정이 뒤섞인 늪으로 빨려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망설임 없이 이야기 속으로 온몸을 던진다. 그리고 깊숙이 몸을 담그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욕망과 감정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끄집어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이야기들이 펼쳐진 자리에서 사실 그것이 태어난 곳은 어두운 늪이 아니라 투명한 눈물의 강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박주현의 문장이 지닌,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솔직함과 돌려 말하는 법 없는 과감함, 그로 인해 가능한 투명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로 더욱 빛을 발한다. 박주현은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누구보다 과감하게 한 걸음 더 들어갈 줄 아는 작가이고, 숨김없는 문장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아는 작가다.
    어떤 여자들은 금지된 문을 결코 열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현’과 같은 여자들은 그 문을 열지 않고는 못 견뎌한다. 그녀들은 원하는 남자를 가지고, 범죄와 섹스, 공포가 들어 있는 책들을 먹어치우듯 읽고, 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글을 쓴다. 이 책은 여자들의 무의식에 줄곧 대물림되어온 그러한 금지된 욕망의 계보다. 그녀들이 그토록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것들의 다른 이름, ‘욕망’이라고 명명된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기도 하고 때로는 연인을 향한 ‘섹슈얼한 판타지’이기도 하며, 덧칠되거나 포장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그 자체로서 ‘사랑과 이해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사랑받지 못해서, 이해받지 못해서,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남몰래 울고 또 울어야 했던 당신의 이야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욕망이 바로 이 소설로 태어난 것이다.

    추천사

    여기, 책 속을 달려가는 고아 여자가 있다. 태어난 이후로 그녀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허기와 갈증에 늘 시달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제 입속으로 밀어 넣어 삼킨다. 여자의 주식은 욕망이다. 부식은 책과 남자와 공포와 아픔이다. 여자의 연약한 위장에서 이 모든 것은 뒤범벅되어 울렁거린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삼킬수록 점점 더 가벼워지고 말라간다. 사라진다. 그녀는 폭식의 끝에 이르러 세상의 딸들을 원고지에 토해놓았다. 홀쭉한 뺨으로 비틀거리며 친정어미도 없이 자신의 산구완을 하러 나선다. 완연한 병색을 언어의 분장으로 가리려 한다. 백색 사막에서 허기와 갈증을 해소해줄 유일한 단 한 권의 책을 찾을 때까지, 그 참젖을 물고 쉴 때까지, 여자가 지은 사랑스러운 빈칸들에는 뺨을 맞고 우는 딸들이 희디흰 나신을 빛내며 잠에 빠져 있으리라.
    - 허윤진 / 문학평론가

    여자로서, 소설가로서 내겐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어떤 경우라도 맨 얼굴을 드러내지 말 것. 그 얼굴이 드러나면, 게임은 끝이다. 그런데 여기, 화장을 진하게 한 여배우의 얼굴이 불에 녹아 일그러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나는 흠칫 놀라며 작가가 일으킨 화형식을 바라본다. 그곳에 줄줄 녹아 끓어오르는 것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켜본 적 없는 나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롤리팝과 책들의 정원]에는 수많은 여자들의 맨 얼굴이 드러난다. 그들은 어떤 화장도, 가면도 없이 이쪽의 독자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이 당신과 너무나 닮아서, 당신은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토록 솔직하게, 이토록 직선으로 게임해도 되는 건가. 책장을 넘기면서 몇 번이나 질문하게 된다.
    - 정한아 / 소설가

    목차

    프롤로그-불타는 책들

    1
    때리기
    2
    달리기
    3
    투명한 여자의 가방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4
    밥 먹기
    5
    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7
    8
    열부터 하나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투명한 여자의 엄마
    9
    10
    색칠공부
    11
    알약의 전문가
    12
    뭐라고요?
    13
    너무 걱정하지 마
    14
    가죽가방 속의 투명한 여자
    15
    16
    검은 입술
    17
    푸시 토크(Pussy talk)
    18
    Pussy talk: 룰루가 한 것
    19
    Pussy talk: 환상의 치료방식
    20
    21
    Pussy talk: 보지의 말
    22
    엄마의 모든 것
    빈칸의 서른 살

    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나는 책을 통해 욕망과 악몽을 배웠다. 욕망과 악몽은 쾌락과 즐거움이 없는 곳에서 자란다. 쾌락, 그 만족을 모르는 즐거움. 책들은 여기 말고 다른 곳, 지금 말고 다른 순간을 생각하게 하는 족속이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에 없는 즐거움에 대해 은밀하게 묻고, 공모했다. 너와 내가 모르는 즐거움을 책들은 알고 있었다. 책들은 욕망과 악몽의 가이드북인 동시에 쾌락의 지침서였다. 나는 애인을 고르듯 책을 골랐다. 때로는 하드보일드풍의 거칠고 위험한 책들을, 또 다른 날은 아나이스 닌이나 콜레트의 관능적인 책들을 펼쳤다. 루카치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지적이고 똑똑한 책들을 고를 수도 있었고, 임꺽정이나 장길산처럼 단순하고 힘센 남자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책이 선물하는 (금지된) 수많은 즐거움들. 죽음, 난교, 근친상간, 마약, 살인, 간통, 기타 등등.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판타지로 남았고, 또 어떤 것들은 현실이 되었다. 애인 같은 책들이었다. 나는 여러 책들과 함께 즐거웠다. 책 읽는 쾌락에 골몰했다. 나는 그들에게 매혹되었다. 엄마가 태우고 싶었던 것도 사실은 그것이었다.
    (/ pp.13~14)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지금까지 늘 안 된다는 말을 들어왔다. 안 된다, 안 돼. 그래서 안 된다는 일들만 골라서 여기까지 왔다. 나의 현재와 과거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의 총체적인 목록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거대한 애인을 목록에 올렸다.
    “왜 안 되는데요?”
    “왜 안 되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니?”
    박 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애인 이야기에 정말로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야, 아버지뻘이잖아!
    (/ p.20)

    누구나 연애를 한다. 나도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나와 거대한 애인은 함께 걷고, 먹고, 이야기하고, 손잡고, 입을 맞춘다. 다른 모든 연인들이 하는 평범한 행동들. 반대로 우리는 그들처럼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는 내일 볼지, 모레 볼지, 한 달 후에 만날지조차 약속하지 않는다. 거대한 애인은 너무도 바쁜 남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가장 바쁜 부분이 아니었다. 결혼이나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런 단어는 금기에 가까웠다.
    (/ pp.22~23)

    모든 책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시선이, 고개를 돌려도 소용없었다. 어느 )으로 고개를 돌려도 책과 마주치게 되어 있으니까. 술로 마비된 온몸이 뭉근하게 부서졌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묵직한 팔다리를 그가 들었다 놓고, 벌리고, 끌어안았다. 끔찍한 기분과 괜찮다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고, 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책들의 노골적인 시선과 그를 받아들였다. 숨죽인 책들이 우리의 소리를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책들만이 벌어지는 일을 고스란히 알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엄마의 목소리. 안 돼, 안 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수치심. 갑자기 그가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열에 들뜬 헐떡이는 목소리가 말했다.
    “침대로 가자.”
    (/ pp.91~92)

    우리는 같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밥을 먹었던 친한 동기답게, 그러면서 그때가 지난 사람들답게. 스물이었을 때 서른은 너무 멀어서 결코 다가오지 않을 미래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막상 미래는 만나고 보니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연 때문이었다. 우리가 스물에 꿈꿨던 것들은 바야흐로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늙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을 것이다.
    (/ p.125)

    의사는 막 세탁해 다려놓은 리넨 침대보를 닮았다. 하얗고 깨끗할 뿐 아니라 구김 하나 없다. 풀 먹인 이불보 같은 팽팽한 긴장감. 나는 그가 한 번이라도 구겨진 경험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구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김투성이의 사람들을 치료하고 위로할 수 있지?
    “저도 어머니와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군요. 뭐가 문제였지요?”
    이것 봐, 이것 봐. 구김 없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구김 없는 사람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전이나 역전이와는 상관없이 의사가 좋았다. 착한 환자가 되고 싶었다. 착한 딸은 못 되었지만.
    (/ pp.158~159)

    나는 엄마가 속속들이 읽어 아는 책이다. 이번에는 어디를 펼칠까. 또 어디를 다시 쓰고, 어디를 삭제할까. 그러나 나는 가장 고집 센 딸이다. 엄마가 다시 쓰고 삭제한 곳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려놓았다. 아니, 다시 쓸 때는 나는 원하고 엄마는 용서하지 않을 내용으로만 골라 적는다. 엄마가 모르는 페이지도 몰래 새로 자꾸자꾸 만든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 상처 입히는 방식은 거짓말이 아니라 누락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실도 비밀이 되는 순간 비밀답게, 어딘가 수상쩍고 의심스러워진다. 그런 사소한 비밀들을 나는 수백, 수만 가지나 가지고 있다. 그걸 다 어떻게 고백하겠어요. 또 어떻게 다 찾아 읽겠어요.
    (/ p.189)

    사랑은 그동안 너무 과대평가받아왔다. 인간은 사랑 때문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진다. 어리석어진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더 사랑하는 )이 손해고 실패다. 증오나 실망, 미움이 어디서 비롯하는 감정인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그것들은 전부 사랑의 이면이다. 무용하기 짝이 없는 사랑, 혹은 연애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스스로가 얼마나 무력한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미워하고 실망하게 된다. 마침내 인간이 인간으로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런데 나는 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부서지고 흩어져 있었다. 이러니 거대한 애인을 원하면 원할수록 나는 점점 더 형편없어진다. 더 작은 파편, 더 보잘것없는 존재.
    (/ p.201)

    “너는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니?”아니오, 나는 예쁘지 않다. 그건 나도 안다. “그래, 네가 예쁘지는 않지.”거대한 애인은 응당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런 일들은 전부 내가 예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건 아닐까.
    갑자기 울고 싶어져서 욕실로 도망쳤다. 가족들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면 곤란했다. 헤픈 눈물은 헤픈 웃음만큼이나 위험하다. 미친 여자들은 잘 웃고 잘 운다. 엄마는 내가 울고 웃는 것도 엿들었다. 문을 잠그자마자 눈물이 펑펑 솟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이나 아무도 없을 때나 흐르던 눈물은 출근길 버스에서도, 수업 중에도 터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었다. 밥을 먹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다가, 신문을 읽다가 울었다. 지하철 행상인이 구겨 신은 구두 뒤축 때문에,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여고생 때문에도 슬펐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슬픔들이 안으로, 안으로 마구 쳐들어왔다.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것인데. 나는 눈물을 막으려고 애쓰지만 겨우 틀어막을 뿐 반드시 터지고야 말았다. 왜 울까. 운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질질 짜는 건 정말 질색인데. 수년에 걸친 긴 치료 끝에 먹는 법과 먹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눈물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낯선 슬픔 때문에 터지는 눈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으니 통제할 수도 없었다. 이것도 큰일이었다. 계속 이러면 어쩌면 좋지?
    (/ pp.211~212)

    나의 거대한 애인은 무수한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오로지 죽은 여자뿐이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우리는 사랑이 불가능한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가 죽은 다음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딸 같은 여자와 연애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죽은 여자가 아니면.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너를 원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너도 죽은 여자를 죽은 다음부터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나는 그 늙고 지친 얼굴에 입 맞췄다. 외롭고 쓸쓸한 얼굴, 화가 난 얼굴,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 나는 죽은 사람들만 떠올리느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갖는지 전혀 몰랐다.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 어떻게 늙는지 미처 모르고 지내다가 거대한 애인을 통해 그 얼굴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너를 원하지. 안고 싶지, 만지고 싶지, 입 맞추고 싶지. 거대한 애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원했다. 갖고 싶어. 만지고 싶어. 그가 나를 고른 게 아니고 내가 골랐다. 내가 유혹했다.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든 거대한 애인의 품에 기꺼이 안겼다. 하지만 내 기억은 미약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 pp.245~246)

    저자소개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5종
    판매수 316권

    서울에서 출생하여 덕성여대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달팽이]가 당선되며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롤리팝과 책들의 정원]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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