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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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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로베스피에르와 마르크스를 낳은 혁명의 아버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운 인민 주권론의 창안자,
신랄한 자기 분석으로 내면을 파헤친 프로이트의 선구자,
나르시시즘, 마조히즘, 박해 망상에 시달린 기괴한 천재,
시대와 불화한 고독한 예언자 루소를 만난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고, 서른 살까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을 하던 청년이 어떻게 자기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친자식을 모두 고아원에 버린 무책임한 남자가 어떻게 아동 교육을 다룬 최고의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고결한 천재, 성자와 같은 인물, 혁명의 아버지”와 “불안한 정신병자, 비열한 인격의 소유자, 파시즘의 선조”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 장 자크 루소를 만난다!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누구도 루소의 사유를 평가할 수 없었다.”
18세기 최고의 독창적 천재로 불리는 장 자크 루소는 이성과 진보의 논리에 반기를 든 문명 비판자였으며, 최초로 불평등의 기원을 탐색하고 인민 주권을 주창한 혁명적 사상가였다. 오로지 독학으로 음악학, 식물학, 정치학, 교육학 등 분야를 넘나들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된 진정한 천재였다. 사회의 모든 습속과 집단 정체성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개성과 주관성을 중시한 진정한 개별자, 신을 믿되 강압적 교리와 원죄설을 거부한 기독교 세계의 반역자였다.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며 광기 어린, 규정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로서 대중성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명성을 두려워한 현대적인 의미의 고독한 스타였다. 자기 삶의 체험을 작품에 담아 대중에게 직접 말을 건 최초의 작가, 자신의 실패와 불안의 원인을 추적하여 자아의 근본적 핵심을 탐구한 정신 분석의 시조였다.
문명과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계몽 사상가들의 분노를 부른 [인간 불평등 기원론], 반(反) 권위주의적 교육론으로 출간 즉시 육아의 바이블이 된 교육학의 고전 [에밀], 절대왕정의 시대에 ‘인민’의 의지에 따르는 정부를 주창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회계약론], 자기 성찰적 자서전이라는 장르를 창안한 [고백록]에 이르기까지 루소는 언제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고 현실의 모순과 부도덕, 불공정에 도전했다.

심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새롭고 흥미진진한 루소 전기!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는 근대 최고의 독창적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심리적 전기이다. 저자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학문 예술론][사회계약론][에밀][고백록] 같은 주요 저작은 물론이고 루소가 남긴 편지와 사소한 기록들까지 모든 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의 삶과 긴밀히 연결함으로써 루소 사상의 숨은 내적 동기를 규명한다.
위트 넘치고 신랄하며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이 책은 루소라는 복잡한 인간과 그의 논쟁적인 사상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안내자가 될 것이다. 저자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능에 깊이 있는 연구를 더해 루소와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데이비드 흄이 활약했던 18세기 유럽의 정치적?사상적 지형을 더할 수 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루소가 태어난 지 300년이 지난 21세기 현재에도 우리를 여전히 혼란에 빠뜨리고 난처하게 만들며 한편으로 놀라움과 기쁨을 주는 자유롭고 대담한 통제 불능의 정신을 만난다.

“편견을 지닌 인간이기보다 역설의 인간이고 싶다.”
모순과 갈등에서 탄생한 독창적 사상

장 자크 루소만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상가도 드물다. 루소의 책들은 사람들이 꼼짝도 못할 정도로 매력적일 때조차, 당시나 그 후의 많은 사람들이 모순으로 생각했던 역설로 가득 차 있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개인 하나하나가 ‘일반의지’에 만족스럽게 통합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을 했는데, 이 주장은 근대의 전체주의를 불길하게 예언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 루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아나키즘의 옹호자인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국가사회주의 또는 파시즘의 선구자이다. 또 어린아이는 타고난 본성에 따라 자라고 배우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면서 [에밀]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가정교사가 학생의 반응을 교묘하게 조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보이는 역설은 그의 삶을 검토할 때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루소는 출세작인 [학문 예술론]에서 문학을 비난하면서 등단했지만 낭만적인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사회적 평등을 지지하는 탁월한 주장을 펼쳤으나 귀족들과 밀접한 친분을 맺었으며 그의 시대에서조차 구식이었던 남존여비의 관점을 지지했다. 가장 심각한 모순은 일종의 교육론인 [에밀]의 저자가 친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들을 양육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교육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루소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의 이념을 비롯한 그의 철학 모두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지적 사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귀족들의 후원을 거부하고 가난과 고독을 선택했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은 루소는 많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으며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볼테르와 더불어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기도 했다.

루소는 볼테르와 그림 같은 동시대인들에게 이미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꼬리표는 지금까지도 루소를 따라다닌다. 루소의 아름다운 문장이 역설로 가득 찬 공허한 내용을 은폐하고 있다는 신랄한 평가를 루소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담로시는 사회적?심리학적 분석으로 루소의 사유와 삶에서 나타나는 역설을 하나씩 해명하고, 나아가 루소의 삶과 사상에서 보이는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루소 사유의 독창성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루소의 모든 작품을 지탱하는 추진력은 인간의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들을 직시하려는 결단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루소는[에밀]에서 자기 사유의 독창성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나는 편견을 지닌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역설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편견이란 어려움 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과 잘 지내고 세상살이를 편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정이다. 루소는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그렇게 힘든지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가정들의 이면을 살펴보기를 원했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삶이 결코 독자들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루소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삶의 체험의 직접적인 산물로 생각했다. 거꾸로 말하면 성격과 동기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페이지마다 정열이 불타오르는 그의 위대한 이론적 작품들을 빛나게 한다.
(/ p.19)

담로시는 루소가 평생 동안 자기 내면의 감정과 외부의 사회적 압력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불화를 경험했으며, 거기서 비롯된 숱한 실망과 좌절과 심리적 갈등이 ‘인민의 의지에 따르는 사회 계약’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탐구’ 등 루소의 가장 깊은 통찰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채 귀족 집안의 하인, 비서, 가정교사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루소는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에 깊이 분노했으며 스스로 그 원인을 밝히려 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의 루소는 그렇게 태어났다. [고백록]에서는 친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일을 비롯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행적까지 모두 철저히 되짚어 보면서, 자신의 모순되고 분열된 모습 속에서 자아의 진정한 핵심을 찾고자 했다.

한마디로 루소의 삶은 자신이 이룬 성공을 비롯해 자신을 얽매는 사회의 모든 쇠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저자는 루소가 저지른 모든 잘못된 결정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삶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삶의 본보기로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상가로서 루소의 유산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그가 삶에서 보였던 본보기였다. 무엇보다도 루소는 의문을 제기하는 성격이었고, 삶이 그에게 준 것처럼 보이는 운명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단순한 성공보다도?그는 성공을 이룬 다음 그것을 거부했다.?더 깊고 넓은 어떤 것을 동경했다. 루소는 쉰 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할,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알지는 못했지만 필요성을 느꼈던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향한 마음의 어떤 동경입니다.” 루소는 자신이 보이는 본보기가 그가 자신의 ‘동류(semblables)’라고 부르는 동료 인간들에게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나는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새로운 시도가 그러한 믿음을 입증하기를 희망한다.
(/ pp.19~10)

루소는 어떻게 루소가 되었나?
루소의 삶은 일탈의 연속이었다. 루소는 이미 십대에 지긋지긋한 도제 생활에서 도망친 이탈자였다. 이후 20년의 세월을 겉으로 보기에는 빈둥거리면서 가끔 기회가 되면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지냈고 서른 살이 훨씬 넘을 때까지 아무런 미래가 없어 보였다. 루소는 악한 소설에 등장할 법한 좀도둑이나 사기꾼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무위도식하는 청년으로서 여자들(특히 귀부인들)의 애정을 갈구했다. 하인, 가정교사, 악보 필경사, 통역사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누군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기다렸으나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고 차가웠다. 서른 살에 파리로 가서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친분을 맺고 마흔 살에 비로소 작가로서 유명해지기 전까지 루소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불행한 출생, 버림받은 아이
장 자크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제네바에서 시계공인 아버지 이자크 루소와 어머니 쉬잔 베르나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9일 만에 산욕열로 어머니가 죽고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자크는 제네바 시민 계급의 하층에 속했으며, 그의 집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루소의 아버지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도시 공화국인 조국 제네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루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네바의 시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고 자라서도 애국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자크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걸핏하면 싸움을 일으키는 다혈질에다 가족을 버리는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특히 둘째아들 장 자크에게는 죽은 아내의 그림자를 씌워 죄의식을 안겨주었다.

훨씬 더 괴로웠던 것은 이자크 루소가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를 정서적으로 공갈 협박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마다 당신의 깊은 탄식과 발작적인 포옹에서 애정의 표시에 뒤섞인 사무치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 그리고 한탄하며 말하곤 했다. ‘아, 그녀를 돌려 다오. 나를 위로해 다오. 그녀가 내 영혼에 남겨놓고 간 이 빈자리를 채워 다오.’” 뿐만 아니라 이자크는 놀랍게도 아이의 중요한 장점이 죽은 쉬잔과 닮았다는 암시를 하면서 “네가 단지 내 아들이기만 하다면 이렇게 너를 사랑하겠느냐?” 하고 외치곤 했다.
(/ p.42)

루소는 차라리 자신이 죽은 채 태어났기를 바랄 정도로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신이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자식이라는 죄책감, 모친 살해의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아에 대한 불안은 루소가 평생 동안 씨름하는 문제가 된다. 1722년에 아버지가 퇴역 장교와 다투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자 제네바를 떠나버리면서 루소의 어린 시절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으로 끝이 났다. 루소는 열 살에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아버지로 인해 훗날 루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에밀]에서 부모가 아닌 이상적인 가정교사가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의 집에서 겁이 많아지고 불량스러워졌다”
아버지가 떠난 후 약 2년간 한 시골 마을의 목사 집에서 살았던 루소는 1725년 4월 조각공 아벨 뒤코묑의 견습공이 되어 도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열세 살의 루소는 프랑스어를 읽고 쓸 줄 알았고 목사의 집에서 간단한 라틴어를 배웠지만 정규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뒤코묑은 거칠고 폭력적이었으며, 루소는 뒤코묑의 집에서 사과나 연장 같은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이나 게으름으로 저항했다.

루소는 비교적 응석받이로 어린 시절을 보낸 터라 도제 생활은 충격 자체였다. 부모들은 아들을 장인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돈을 지불하면서 아들이 생업만이 아니라 규율과 복종을 배울 것이라 기대했지만, 자기 삶에서 이러한 가혹한 변화를 환영하는 젊은이는 거의 없었다. 루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쾌활하고 외향적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보스턴에 있는 친형 밑에서 지긋지긋한 도제 생활을 하다가 도망쳤다. 프랭클린이 나중에 썼듯이 “나는 그가 나를 무자비하고 압제적으로 대한 것이 전 생애에 걸쳐 내게서 떠나지 않는 독단적 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각인하는 방법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루소도 마찬가지로 압제를 몹시 싫어했는데, 그는 프랭클린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부과한 노동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혐오감을 품었다. 루소는 오직 스스로 결정한 일에서만 열성을 다해 일할 수 있었다.
(/ p.67)

견습공 생활은 루소에게 좀도둑질 버릇과 게으름, 압제에 대한 분노, 강요된 노동에 대한 혐오감만 남겼다. 1728년 봄이 되었을 때 루소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일요일, 루소는 제네바에서 도망쳤다.

‘바랑 부인’과의 만남
제네바에서 도망친 열여섯 살의 루소는 변변한 기술도 돈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 가톨릭 사제의 추천으로 자기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한 여인을 만난다. 1728년 2월 21일, 루소는 스물아홉 살의 매력적인 바랑 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바랑 부인의 권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소는 약 1년간 토리노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다가 다시 부인을 찾아간다. 그때부터 바랑 부인은 10여 년간 루소를 먹여 살렸고 그를 교육시켰다. 평생 지속될 음악에 대한 열정과 기초적인 음악 교육도 바랑 부인 덕분에 얻은 것이었다. 바랑 부인은 루소에게 후원자였고, 엄마를 대신하는 사람이자 친구, 연인이 된다. 그녀의 영향 아래 루소는 마침내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랑 부인은 루소가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직업을 찾기를 바랐지만 루소는 ‘엄마’ 옆에서 머무는 데 만족했다. 때때로 직업을 찾아 부인 옆을 떠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루소의 끝없는 의존은 바랑 부인을 실망시켰고, 루소가 꿈꾸었던 서로에 대한 헌신적 애정도 사라졌다. 1737년 바랑 부인 옆에 새로운 젊은이가 애인이자 아들로서 자리를 잡았고, 실망한 루소는 시골 별장에서 홀로 지내며 자연과 책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비로소 루소의 지적인 발전이 마침내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루소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공부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루소는 2년간 베르길리우스, 플라톤, 데카르트, 로크, 라이프니츠 등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고전들을 두루 소화했다. 또 기하학, 대수학, 미적분까지도 독학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정규교육에서는 다른 것들보다 더 선호되는 시스템이나 이론이 있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승의 인정을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루소는 저자들의 지적인 주장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후에 그가 그들을 비평하게 되었을 때는 그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확실히 이 방법은 그가 맨 먼저 시인한 것처럼 가장 효율적인 학습 방법은 아니었다. “혼자 공부하는 데는 유리한 점도 있지만 커다란 단점도 있고, 특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고초도 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점을 잘 알고 있다.”
(/ p.212)

루소는 대부분의 개성 없는 학생들과는 달리 배움에 대한 진실한 갈망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 다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모든 것을 다 배우려면 시간을 잘 활용할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학은 루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발견하는 단연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훗날 그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나 [에밀] 같은 책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인 사유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떤 학문적 선입견도 지니지 않은 채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가 독학한 천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성과 진보의 논리에 도전한 문명 비판자
[학문 예술론], 계몽주의 내부의 자기 비판

1739년 바랑 부인을 떠난 루소는 1740년 음악가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파리에 도착한다. 비록 그 꿈은 당장 이루기 힘들었지만 루소는 디드로, 콩디야크, 달랑베르 등 젊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작가와 사상가로서 새로운 수업 시대를 맞는다. 디드로의 권유로 [백과전서] 편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가난과 좌절의 시간을 견딘 끝에 마침내 루소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디종 아카데미가 1749년에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습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논문을 현상 공모했을 때, 루소는 문명이 많은 이점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파괴적이라는 정반대 결론을 담은 논문을 제출해 1등상을 탔다. 1년 뒤 논문은 [학문 예술론]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고 단숨에 루소를 유명 인사로 만들며 논란을 불러왔다. 여기서 루소는 학문, 예술, 문학, 과학을 포함한 문명의 발전이 인간성의 타락을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루소에 따르면, 문명화된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 타고난 자유를 억누르고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인데, 학문과 예술은 이러한 노예 상태를 은폐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사회의 타락에 대한 비판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루소의 접근법은 이성과 학문, 문명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라는 계몽주의의 기본 가설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즉 계몽주의의 자기 비판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백과전서]가 막 출현하려는 바로 그 무렵, 루소는 이렇게 계몽주의의 잠재적 배신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프랑스어로 계몽주의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빛’을 뜻하는 ‘les lumi?res’였는데 디드로는 그 ‘빛’이 사방에 퍼지는 가운데 거인의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앞서 가며 열정적으로 철학에 대해 썼다. 그러나 루소는 그 빛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 어떤 파괴적 불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 p.319)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지만 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만든다는 생각, 문명과 진보에 대한 비판은 이후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이전까지 루소는 재능은 있지만 낮은 신분 출신의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귀족 집안의 하인, 가정교사, 악보 필경사, 서기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는데, 이런 경험이 그에게 불평등과 압제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주었다.

“아,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년 디종 아카데미는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되는가?”라는 주제로 논문을 공모했다. 루소는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과 확립에 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100쪽에 이르는 논문을 제출했고, 이 논문은 1년 뒤 [인간 불평등 기원론]으로 출판되어 또 한 번 파란을 일으킨다. 이 책으로 루소는 근대 문명의 강력한 비평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계몽 철학자들은 인간은 본래 자연에 의해 협동하는 집단을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졌으며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이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사회가 인간을 이기적이고 사악하게 만든다고 판단했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량했던 것이 틀림없으며, 이 상태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난다는 루소의 견해는 기독교의 원죄설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루소가 볼 때 인간의 죄는 순전히 자신이 사회에서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평등이 인간의 능력과 정신이 발달하면서 나타났고 문명이 진보할수록 불평등과 사회적 악이 커진다고 보았다. 심지어 루소는 “성찰의 상태는 자연에 반대되는 상태이고, 생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다.”라고 선언했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이 여전히 추측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소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농업과 야금술이 그 필요에 따라 발달했다고 추측했다. 일단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자 노동을 조직화하고 강화해야 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해졌고, 그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수립되었고, 다수가 소수에게 종속되기 시작했다. 이행의 순간은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토지를 울타리로 둘러싸고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구체화되었다.
(/ p.348)

루소는 인간의 진보가 사유재산 제도를 낳았고, 사유재산 제도가 모든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라는 통찰을 내놓았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살게 된 인간에게 모든 불행이 연쇄적으로 뒤따랐다. “평등은 사라졌고, 사유재산이 도입되었으며, 노동이 필요해졌고, 광활한 숲은 인간의 땀으로 물을 대야 하는 보기 좋은 밭으로 바뀌었는데 거기서 노예제도와 빈곤이 곧 싹을 틔우고 수확과 더불어 증대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내는 문명의 진보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루소의 비평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평등한 특정 사례들을 비판하고 개혁을 요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불평등이 용납하기 힘든 동시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창적이었다. 노동이 가혹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 본성에 근본적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독창적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보는 법을 배우며 사회에 통합되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을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배반하는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독창적이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출간 당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쏟아진 비판 가운데 지금까지도 널리 퍼진 오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루소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볼테르는 그 책을 읽으면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어진다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루소는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간 집단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소가 제시한 자연 상태란 일종의 사고 실험이었다. 그가 볼 때 경쟁과 불평등은 모든 사회에 내재해 있으며, 우리와 비슷한 존재에게 자연 상태와 같은 황금 시대는 있을 수 없었다.

자연 상태는 일종의 관점을 제공해준다. 사회는 사회 자체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관념과 가치, 감정에까지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 왔는데, 우리는 자연 상태라는 관점으로부터 만약 그러한 사회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정할 수 있다. 이제부터 루소가 쓰는 글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그가 영위하는 삶의 목적은 사회 내에서의 역할 연기라는 표층 밑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 진정한 자아가 밖으로 드러나도록 도울 수 있는 교육적이고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생각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 p.353)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대해 루소는 그것이야말로 인류에게 재앙을 몰고 온 잘못된 방향 전환의 증거라고 진단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파격이고 독창적인 견해였다.

볼테르와 맞서다
계몽주의와의 결별

루소는 계몽주의와 함께 출발했지만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학문 예술론]을 통해 이성과 진보를 비판하면서 루소는 계몽주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간하면서 그 균열은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계몽주의는 타인 지향적이었고 최고의 가치를 사회적 상호작용에 두었다. 루소는 내면 지향적이었고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존중했다. 계몽주의는 풍족한 삶의 기초로서 경쟁적 개인주의를 장려했다. 루소는 개인을 존중하지만 각 개인이 공동체의 일부로서 자신을 느끼도록 촉진하는 집단 정신을 추구했다. 계몽주의의 전문 분야는 정보 수집과 이론적 성찰이었다. 루소는 고대 철학자들처럼 지혜를 추구했다. 계몽주의는 진보의 기초로서 기술을 옹호했지만, 루소는 단순한 삶을 선택했고 진보가 가져다주는 의심스러운 선물들을 거절했다. 계몽주의는 회의주의적이고 심지어 무신론적이기까지 했지만, 루소는 신과 영혼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계속 미덕을 말했지만, 루소는 겉으로는 윤리적이지만 속으로는 냉소적인 그들이 겉과 속이 다른 이중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이러한 도덕이 있다. …… 혹은 끔찍하고 은밀한 또 다른 도덕이 있는데 그것은 입문자 모두가 신봉하는 내밀한 교리로서 앞서 말한 도덕은 가면일 뿐이다.”
(/ pp.424~425)

계몽주의와의 결별은 계몽주의 운동의 대부 볼테르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루소는 스무 살 무렵 볼테르의 저서를 읽고 그를 흠모했지만, 볼테르는 [학문 예술론]에서 루소가 진보를 비판하자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다. 볼테르는 루소가 계몽주의를 내부에서 전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이해했다. 급기야 루소는 1758년에 쓴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로 인해 볼테르의 사적인 원한을 사게 된다. 여기서 루소는 제네바에 극장을 세우겠다는 볼테르의 계획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볼테르는 죽을 때까지 루소를 증오했다.
볼테르는 경멸적인 혹평을 퍼부으며 루소의 저작들을 조롱했고, 은밀히 숨어서 루소를 비방했다. 1764년에는 루소가 파리를 떠나 망명 중일 때 <시민들의 견해>라는 소책자를 익명으로 발간해 루소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8쪽짜리 소책자는 루소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논평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었지만 자식들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루소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견해]가 나왔을 때, 볼테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기의 감정과 상반되는 야비한 비방문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자신이 루소를 좋아하고 유사시에는 그를 도우려 한다고 공언하면서도 동시에 뒤에서는 그를 해치우려고 끈질기게 공모를 꾸며 왔다. 그리고 이제 볼테르는 비장의 무기,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던 고아원 이야기를 써먹었다.
(/ p.557)

루소는 1745년 3월 파리의 하숙집에서 만난 세탁부 테레즈 르바쇠르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의 동반자로 지낸 테레즈는 시계도 볼 줄 몰랐고 철자법도 잘 모르고, 교양이 부족해서 루소의 친구들에게 종종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루소가 테레즈와 관계에서 저지른 가장 끔찍한 일은 테레즈가 낳은 다섯 명의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버린 것이었다. 훗날 루소는 이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고, “자신이 설교한 대로 실천하는 현자”라는 이미지를 쌓은 작가로서 이 일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했다. 볼테르는 루소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그에게 타격을 입히려 했다.

스타가 된 고독한 작가
18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신 엘로이즈]

1756년 루소는 후원자인 데피네 부인이 마련해준 파리 근처의 별장 레르미타주로 이사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이후로 엄청난 비난과 관심을 한몸에 받은 루소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후 자연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그러나 자연에 머물며 자유롭게 산책하고 사색하는 행복한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레르미타주에 머무는 동안 복잡한 연애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데피네 부인의 사촌인 두드토 부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이 관계는 결국 심각한 상호 비난과 오해만을 남기고 끝나고 말았다. 이 소동으로 루소는 많은 친구를 잃었지만, 한 가지 소득은 이 시기에 한껏 고조된 감정을 바탕으로 낭만적인 연애 소설 [쥘리 혹은 신 엘로이즈]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1756년에 집필을 시작해 1761년에 완성된 [신 엘로이즈]는 전체 6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 소설은 루소가 쓴 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는데, 18세기 말까지 무려 70판이 출판되었다. 18세기를 통틀어 유럽 최고 기록이었다. 더욱이 연애 소설을 하찮은 오락이나 질 낮은 것으로 여기던 때에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계급과 남녀를 초월해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는 루소가 사랑의 완성에서 열정보다 존경심과 덕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루소의 독자들은 [신 엘로이즈]가 열정을 미덕과 양립시킨다고 칭찬하면서 소설의 성공을 당시에 유행하던 도덕적인 어휘들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을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능할 것이다.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사랑, 그것에 빠졌다가 극복한다는 주제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여전히 강력했던 시대에 상당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만약 루소가 열정을 궁극적인 선으로 찬양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 p.469)

그 시대 대부분의 작가들이 익명으로 책을 냈던 것과 달리 루소는 언제나 작품에 자기 이름을 밝혔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곧 소설에 감동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루소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고귀한 영혼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는 자신의 저술만큼이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신 엘로이즈]의 출판과 더불어 루소는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대량 출판의 초창기에 자신이 새로운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늘 고독을 원했던 루소에게 폭발적인 인기는 큰 부담이 되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인생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썼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이러한 관심은 어느 정도까지 그의 활기를 북돋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방해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고독의 이상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성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한 역사가가 말하듯이, 그는 이제 특별히 현대적인 유형의 은둔자, “정신적으로는 대중적이고 신체적으로는 개인적이기를 원하는 사람, 수줍어하는 스타”였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에 대한 불안감은 앞으로 그를 강박적으로 사로잡을 것이다.
(/ pp.472~473)

무책임한 아버지의 속죄, [에밀]
[신 엘로이즈] 출판과 함께 루소는 [에밀]과 [사회계약론]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다. 1761년부터 1762년까지 불과 16개월 사이에 세 권의 책이 나왔다. 그중 근대 교육론의 기원 또는 ‘최초로 어린이를 발견한 책’이라고 불리는 [에밀]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루소의 개인적 체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젊은 시절에 가정교사로 일했던 경험과 가혹한 훈육과 방치로 얼룩진 자신의 어린 시절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친자식들을 버린 기억이야말로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루소는 서신을 교환하는 한 사람에게 “아직 나에게는 책을 써서 속죄를 해야 하는 오래된 죄가 있습니다. 대중은 그 후에 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사를 아직은 극비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간접적으로 그 사실을 언급했다. “아버지로서 의무를 완수할 수 없는 사람은 아버지가 될 권리가 없다. 가난도 일도 체면도 자식을 양육하고 직접 교육시키는 일에서 면제받을 수 없다. 독자들이여, 이 점에서는 나를 믿어도 좋다. 예언하건대, 누구든 인정이 있으면서 그토록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자는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에 통한의 눈물을 쏟을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결코 위로받지 못하리라.” [에밀]에서 가상으로 남자아이를 창조하고 어린아이를 어떻게 이상적으로 양육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루소에게 참회와 속죄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 p.476)

이 책에 담긴 루소의 교육론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것은 각 개인에게 독특한 기질이 있으며, 그 기질이 잘 발달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인위적인 것에서 멀리 떨어져 오직 자연 속에서 자랄 때에만 자신의 본성에 맞게 성장할 수 있다. 심지어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 또 루소는 교육에 관한 당시 통념과 달리, 아이들을 엄하게 훈육하여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키우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처럼 진정한 지식은 암기가 아니라 질문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에밀]은 출간되고 수십 년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가 삶의 첫 단계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야 하며 유모가 아니라 엄마가 젖을 먹여야 한다는 루소의 조언에 따랐다. 루소의 조언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하려는 시도는 몇몇 역사적 인물과도 관련이 있다.

몇몇 저명인사들이 이 진보적 실험의 결과로 생겨났는데, 전류의 단위에 암페어(ampere)라고 자기 이름을 붙인 프랑스 물리학자 앙페르와 볼리비아에 자기 이름을 남긴 해방자 볼리바르를 예로 들 수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아이가 언젠가 높은 신분에서 추락할 경우를 대비해서 기술을 가르치라는 루소의 충고가 매우 널리 받아들여져서 다름 아닌 프랑스 왕세자도 아들을 열쇠공으로 훈련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은 열쇠공으로 살 만한지 능력을 시험해보지도 못했는데, 단두대에서 목을 잃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단두대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루소의 제자로 생각했다).
(/ pp.495~496)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매여 있다”
[사회계약론]

1762년에 출간된 [사회계약론]은 최초로 ‘인민 주권’을 창안함으로써 훗날 프랑스 혁명을 낳은 문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라는 도전적인 말로 시작한다. 루소는 이어서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지만 그들보다 더 노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것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민 주권과 사회 계약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가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든 불평등과 착취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삶의 진실이지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쇠사슬을 외부에서 부과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 루소의 목적이었다.

이전 저술가들이 계약을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했던 반면 루소는 계약을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보는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계약을 암묵적 협약으로 이해했는데, 그 협약은 사람들이 공유한 약속으로서 지속적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협약이 없다면 어떤 종류의 체제도 합법적일 수 없다. 이전 저술가들이 왕을 주권자, 즉 자신의 신민들(subjects)을 글자 그대로 자신에게 ‘종속시키는(subjected)’ 통치자라고 불렀지만, 루소는 전체로서 인민이 주권자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어떤 통치자든지 통치자는 단지 인민의 공복이며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어떤 개념적 차이도 없음을 의미한다.
(/ pp.497~499)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해도 정부는 필요하다. 인민이 매일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결정도 주권자의 승낙과 승인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루소는 진정한 사회 계약은 고대 그리스 같은 작은 규모의 도시 국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소가 보기에 프랑스 군주정이나 영국의 대의 정치 체제나 모두 인민은 실질적으로 노예일 뿐이었다.

혁명의 아버지인가? 전체주의의 선구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 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사익을 위한 경쟁과 차별과 폭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민 주권을 실현할 것인가? 루소는 개별적인 사익을 극복할 수 있는 ‘일반의지’를 만들어 이기심을 상쇄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루소는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회 계약을 요구했다. 즉 “구성원 각자가 전체 공동체에 모든 권리와 함께 자신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각자가 자신의 신체와 모든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일반의지의 최고 감독 아래 두는 것”을 말한다. 일반의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의 개별 의지 안에 있는 ‘공통의 의지’이므로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 된다.
‘일반의지’ 때문에 루소는 근대의 전체주의에 기여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 혐의는 시대착오적이다.

루소가 전체주의만큼 혐오스러워한 것은 없을 것이다. …… 루소가 의도한 것은 근대의 경찰국가가 자행하는 감독과 사상 통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의 선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상상했다. 인민들의 분리된 자아를 일종의 집단적 자아로 승화시키면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 논의의 핵심은 자연인이 일찍이 누리던 자유는 사회적 삶과 전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은 시민에게 적합한 제한적인 자유다. 그는 ‘공동의 자아(moi commun)’와 융합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자아(moi)’의 자율성을 포기한다.
(/ pp.502~503)

한편, 루소가 살아 있었을 때 비평가들은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의 반대 방향, 즉 아나키즘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괴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후대의 혁명가들은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모든 국가에서 주권자이며 그들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다.”는 주장에 주목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는 평생 동안 루소를 정신의 스승으로 섬겼다.

망상에 사로잡힌 천재
1762년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출간되면서 루소는 작품에 담긴 급진적 사상 때문에 절대왕정과 기독교를 위협하는 인물로 낙인찍힌다. [에밀] 4부에 실린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은 강압적인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루소의 종교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글이었다. 루소는 신을 믿었으나 그가 믿은 신은 교회에서 말하는 신과는 달랐다. 결국 1762년 6월 9일 파리 고등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루소는 스위스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도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치적 급진주의와 무신론을 퍼뜨리는 위험한 인물이 편히 있을 곳은 없었다. 1766년 루소는 데이비드 흄의 도움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우턴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1762년부터 1767년까지 이어진 망명 기간에 루소는 심각한 박해 망상에 시달렸다.

원래 루소는 사귀기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언제나 감정에 충실했던 데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타인을 배려하는 일은 하지 못했다. 감동을 받으면 늘 눈물을 흘렸는데 상대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우정을 의심하거나 서운해했다. 남을 의심하는 성향도 갈수록 짙어졌다. 이 모든 것이 더해지면서 루소는 여러 친구를 적으로 만들었다. 15년간 우정을 지킨 디드로도 결국에는 루소에게 질려 멀어지고 말았다. 여기에 연이은 추방과 박해가 루소의 정신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추적당한다고 믿었고, 어디에나 감시의 눈이 있다고 두려워했다. 특히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루소는 있지도 않은 음모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흄 같은 동료와 후원자들, 교회, 프랑스 정부까지 연루된 거대한 음모가 상상 속에서 완벽하게 다듬어졌다.

친구들, 심지어 프랑스어를 하는 지인들과도 단절된 상태에서 춥고 외로운 그는 망상성 강박관념에 심하게 시달렸다. 루소가 박해를 두려워한 것은 사실 불합리한 반응은 아니었다. 루소는 유럽에서 중요한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차례로 추방당했으며 정부와 교회뿐 아니라 옛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공공연히 비난받았다. …… 지금 루소는 이국땅에서 음모가 다시 한 번 시작되고 있다고 의심했다. 유감스럽게도 루소가 의심한 사람은 데이비드 흄이었다.
(/ pp.592~593)

루소는 흄의 행동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오해했으면서도 그것을 결정적 증거로 확신했는데, 사실 정황상 증거일 뿐이었다. 루소는 흄이 자신을 해치려고 영국으로 불러들였으며, 자신이 흄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루소가 흄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고 흄이 공개적으로 맞서면서 이 일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프랑스의 지인들은 이번에 정말로 루소를 단념했다. 그들 모두 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루소의 주장을 믿을 수 없었는데, 루소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급기야 루소는 가상의 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밀리에 안전한 영국을 탈출해 구속영장이 유효한 프랑스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늘의 기준에서 루소는 정신병 환자였을까? 루소는 나르시시즘과 마조히즘 성향을 일찍부터 드러냈다. 나르시시즘은 그가 자신을 평범한 대중과 구분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 젊은 시절에는 창조적 사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힘의 방향이 역전되어, 대중이 반대하는 자신을 더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성에게 매를 맞고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즘 성향에다 한번은 여성들 앞에서 스스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보여주는 노출증도 보였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모든 일을 아주 자세히 털어놓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후대 사람들은 다양한 진단을 내렸다.

20세기에 들어서 정신 분석학자들이 루소의 마조히즘, 노출증, 편집증에 대한 동기들을 밝히려고 무수히 시도했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루소가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루소가 실제로 어느 정도로, 얼마나 오랫동안, 무슨 이유로 불안정해서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는 분석자 각자가 선호하는 이론에 근거해서 대답하는 문제들이다. 루소를 일종의 ‘환자’로 단순화하는 것이 간단하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사람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정신병을 앓은 적이 없었다. 반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는 지식이 깊어졌으며, 삶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확장되었고, 글에서도 명확성과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루소의 작품에서 어떤 것?심지어 생애 맨 마지막 시기에 쓴 작품들을 포함해서?을 펼치더라도, 우리는 천재가 불운이나 신경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623)

프로이트로 가는 길을 열다
최초의 정신 분석, [고백록]

영국에 머물던 시기에 루소는 [고백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친구였다가 결별한 계몽주의자들과 적들이 자신의 삶을 화제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 악의적으로 왜곡해 퍼뜨리고 있음을 알았다. 루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제목을 빌린 [고백록]을 써서 오명을 씻고 자신의 본질적인 선량함을 입증하려 했다. 놀랍게도 루소는 이 책에서 자신의 모든 체험, 실수와 잘못과 실패와 부끄러운 일들을 남김없이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마조히즘 성향은 변태처럼 보였고, 아이를 버린 일은 용서할 수 없는 비정한 행동이었다. 책에는 거의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명인은 별로 없었다. 이것 역시 당시 독자들이 기대하는 명사의 자서전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루소는 자기 삶의 모든 갈피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내밀한 동기를 찾아봄으로써 오늘날 정신 분석이라고 부를 만한 지점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이 ‘자아’ 형성에 끼치는 영향을 인식하다
루소가 쓴 [고백록]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실질적 효시가 되었다. [고백록]의 영향은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오늘날에는 그 책이 실제로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 평가하기조차 어렵다. 자아를 형성하는 경험들을 추적하는 것, 특히 현대의 정신 분석학에서처럼 어린 시절의 경험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은 루소 시대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한 사람의 초기 경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루소 덕분이다.

볼테르는 오랜 삶이 끝나 갈 무렵 자서전 초안을 잡으면서, “어린 시절의 사소한 이야기들과 학교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재미없는 것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초년 시절을 빼버렸다. 디드로의 경우 그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열세 살이 되기 전 일은 “거의 의도적으로 얼버무렸으며”, 어린 시절의 무력함과 무지를 가련히 여겼다고 말한다. 디드로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언급했을 때는 자신의 조숙한 재기를 자화자찬하는 것이었지 오류와 창피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 루소는 노동자 계급의 아이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야기가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p.616~617)

최초의 자기 성찰적 자서전 -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고 자아의 핵심을 탐구하다
오래된 과거에 대한 해소되지 않는 죄책감, 특히 10대 때 귀족 집안에서 시종으로 일하면서 ‘마리옹’이라는 하녀에게 리본을 훔친 죄를 뒤집어씌웠던 일과, 친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린 일에 대한 죄책감이 [고백록]의 중심에 있었다.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원죄를 제거했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행동이 너무나 많았다. 이때 그는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면서 자아의 핵심을 탐구하는 현대적 정신 분석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시도를 했다.
루소는 자아가 삶의 경험에 따라 심층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인 독특한 경험들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자아의 핵심을 찾으려 했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독특한 경험들을 파고드는 것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방법이 되었고, 그것들 안에 있는 숨겨진 유형을 탐지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는 결국 정신 분석에 이르게 될 길로 나서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당신 자신의 깊은 곳을 바라보라. 먼저 당신 자신을 아는 것을 배워라! 그러면 당신은 왜 당신이 아플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것이며 어쩌면 미래에 아프게 되는 것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루소의 상속자로서 말한 것이다.
(/ p.620)

루소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왜 그런 일들을 했으며 그 일들이 어떻게 그가 만든 자기 이미지와 일치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심리학적으로 자기 삶을 성찰한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분석은 사회학적이기도 했다. 가혹한 견습공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일, 10대 시절에 저지른 여러 차례의 좀도둑질, 오만한 지배 계급과 핍박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그는 왜 일 자체가 억압적이고 법이 왜 그렇게 자주 불공정한지 이해하고 싶었다.

적응하고 성공할 것인가? ‘나’로 존재할 것인가?
루소는 사회의 요구에 맞서 자신의 개별성을 지키려 했다. 사회는 개인에게 자신의 고유한 ‘내적 존재 방식’을 파괴하고 사회적 규율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틀에 박힌 인간형을 강요한다. 루소가 자기의 내적 존재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했다면,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벤저민 프랭클린을 꼽을 수 있다. 저자가 프랭클린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루소와 거의 흡사한 성장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 또 이 두 명의 차이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대적 삶의 긴장을 대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프랭클린은 잘 적응된 인간의 이상형을 구현했다. …… (프랭클린은) 공식 교육은 얼마 받지 못하고 싫어하던 견습공 생활을 하는 등 처음부터 루소와 놀랍도록 유사한 체험을 했다.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의 [위인전]을 탐독한 것까지 똑같은데, 루소가 플루타르코스에게서 위대한 시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배웠던 반면 프랭클린은 자신이 국가의 영웅이 되지 않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 게다가 루소와 비슷하게 프랭클린은 고용주들에게 학대를 당해 평생 동안 원한을 품었고, 그는 첫 번째 주인의 가혹한 대우가 “한평생 내게서 사라지지 않았던 독단적 권력에 대한 반감을 조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루소와는 달리 노예 상태가 젊은이들을 사회화하여 자신의 진심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방식에는 흥미가 없었다. 루소는 게으름뱅이와 좀도둑이 되었고,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도 하지 않고 제네바에서 도망쳤으며, 그 뒤로 10년 동안 목적 없이 떠돌아다녔다. 프랭클린은 자기 규율과 기술을 많이 갖추고 보스턴에서 도망쳤고, 재빠르게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자로 자리를 잡았으며, 머지않아 근면과 정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 p.628)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주변부에서 출발한 루소는 글쓰기를 통해 점차 중심부로 진입했지만, 사교적 예절의 형식으로 부과되는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성공을 포기하고 고독을 선택했다. 즉 루소는 사회의 요구에 자신의 ‘내적 존재 방식’을 희생하는 대신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18세기 사회가 찬양했던 안정적 성격을 확립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을 통제해 바람직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프랭클린은 일찌감치 이것을 이해했고, 열아홉 살에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처세 계획표’를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독단적 자유사상가로서 자신의 인상을 심기 시작했고, 또한 자신이 그들을 이간시키는 분노의 외침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3가지 미덕의 도표를 만들고 일 주일에 한 가지씩 1년에 네 번 주기로 미덕을 체계적으로 실행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성향을 제거하고 올바른 성향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한 행동주의적 실험이었고, 루소와의 현저한 차이점은 그 이상 더 두드러질 수 없었다. 루소는 사회 생활에 필요한 습관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기를 원했던 반면, 프랭클린은 바로 이러한 습관을 습득하길 원했다.
(/ pp.628~629)

저자는 현대인들이 “루소의 노선을 논하면서도 프랭클린의 삶을 산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접촉하는 것과, 우리가 그렇게 되기로 예정되었던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장 자크 루소처럼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출세에 전념하거나 ‘팀의 일원’이 되려고 애쓸 때 우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사는 것이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독자들에게 공적 삶을 구축하도록 부추긴다면, 루소의 [고백록]은 자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현대적 삶의 근본적 긴장이며, 이러한 긴장을 최초로 분석한 사람이 장 자크 루소였다.

목차

옮긴이 머리말
머리말

1장 버림 받은 아이
- “나는 거의 죽어 가는 상태로 태어났다.”

2장 처벌을 갈망하는 소년
- “나는 고통 속에, 심지어 부끄러움 속에도 관능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3장 변장한 왕자
- “그 누구도 나를 소유할 수 없었다.”

4장 바랑 부인을 만나다
- “나는 오직 그녀 안에서, 그녀를 위해서만 살았다.”

5장 뿌리 없는 젊은이
- “나는 새로운 낙원을 찾아갈 생각밖에는 없었다.”

6장 쾌락의 집
- “내 자유로운 기질은 아무리 사소한 의무라도 참을 수 없습니다.”

7장 황금 시절의 종말
- “당신은 이제 나의 사랑하는 엄마가 아닌가요?”

8장 파리로 가다
- “저는 제 안에 불행의 원천을 지니고 있습니다.”

9장 베네치아 대사의 비서
- “나는 자랑스럽게 가면을 쓰고 극장에 갑니다.”

10장 비정한 아버지
-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해 통한의 눈물을 쏟으리라.”

11장 디드로, 달랑베르, 콩디야크의 친구
- “나는 나의 질투심 많은 라이벌에게 승리할 것입니다.”

12장 뱅센의 계시 체험
- “나는 다른 세상을 보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13장 [인간 불평등 기원론]
- “나는 노예 상태를 인류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증오한다.”

14장 제네바의 아들
- “허영심이 뿌리째 뽑힌 내 마음 속에서 가장 고귀한 자부심이 싹텄다.”

15장 레르미타주의 스캔들
- “나는 내가 우상처럼 숭배하는 여성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16장 볼테르와 맞서다
-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좌우명이다.”

17장 세기의 베스트셀러 [신 엘로이즈]
- “소크라테스는 사상의 산파이고, 당신은 미덕의 산파입니다.”

18장 위험한 책 [에밀]과 [사회계약론]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19장 도망 다니는 논쟁가
- “유용한 생각을 할 때마다 교수대가 내 눈앞에 보입니다.”

20장 볼테르의 음모
- “그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 문 앞에 버렸다.”

21장 흄과 함께 런던으로
- “나는 도처에서 함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22장 [고백록], 최초의 정신 분석
-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당신 자신의 깊은 곳을 바라보라.”

23장 미궁에 갇힌 남자
-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려주시오!”

24장 천재의 안식처
-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일 것인가?”

주석
루소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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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오 담로시(Leo Damrosch)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108권

하버드대학 문학 교수. 예일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를,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탁월한 교수 업적을 인정받아 왔다. 미국의 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에 참여했으며 구겐하임 연구 펠로십을 수여받았다. 10년에 걸친 조사와 집필로 완성된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는 근대 최고의 독창적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심리적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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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출생지 -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루소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상상적 자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루소의 고백록』, 『루소: 분열된 영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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