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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권하는 사회 : 신용 불량자 문제를 통해서 본 신용의 상품화와 사회적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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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잘사는 사람만 돈을 벌고 돈 없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해준 게 뭐가 있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 내일도 없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자식 낳지 말라고 말한다”
- 신용 불량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2005년 4월, 공식적으로 신용 불량자는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출 권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 신용불량자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 과다 채무자 혹은 금융 채무 불이행자로 불리는 신용 불량자들은 누구인가?
* 이들은 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대출을 받은 것일까?
* 이들은 남의 돈으로 사치와 과소비를 하고도 이를 갚지 않으려는 부도덕한 사람들인가?
*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김대중 정부에서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신용카드 정책이 만들어진이유는 무엇인가?
* 왜 신용 불량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가?
* 신용카드 정책을 통해 나타난 민주화 이후 정부의 경제정책 결정 구조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출 권하는 사회’의 기원과 구조를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을 중심으로정부, 기업, 개인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다룬 본격적인 연구서

2002년 1억487만 장, 그리고 다시 2010년 1억1,187만 장

최근 공식 통계(한국은행 2010/8)로 신용카드 발급 장수는 전년보다 11.6% 늘었다. 총 발급 장수가 다시 1억 장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중순으로 7년 만이었다. 신용카드 발급률을 높이려는 신용카드사의 과당경쟁이 여전하고, 신용카드를 통한 대출로 가계 부담을 돌파해 보려는 양상은 카드대란이 일어났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처음 문제가 만들어진 때로 돌아가 그 기원과 구조를 살핀다.

1. 2010년, 아직 끝나지 않은 ‘대출 권하는 사회’의 문제

2000년 대 초, 정부가 전 사회적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하면서 신용카드 광고가 TV를 도배한 적이 있다. 유명 배우들이 모델로 등장했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부자 되세요”와 같은 광고 문구가 유행어가 되었다. 하지만 신용카드는 능력이 없는, 열심히 일해도 떠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 무분별하게 발급되었고, 부자가 되겠다는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났다. 신용 불량자로 불리는 4백만 명가량의 과다 채무자들이 발생했고, 신용카드 연체가 누적되면서 업계 수위를 달리던 신용카드사가 유동성 위기로 쓰러질 위험에 처했다.
2010년 현재, 무이자와 이자 할인을 강조하며 손쉬운 대출을 권하는 대부 업체 광고들이 케이블 방송을 도배하고 있다. 휴대전화와 이메일은 매일같이 들어오는 대출 상담 홍보 문구로 넘쳐 나고 있으며 당장 대출이 가능하다는 광고 역시 공해 수준에 이르렀다. 2010년 6월 말 현재 정부에 등록된 대부 업체만 1만5,380개, 거래자는 189만3,535명에 이른다. 이런 수치는 공식적인 대부 업체 이용 실태일 뿐 불법 사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2~3배 이상 되는 것으로 예측된다. 사채 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2. 신용 불량자 문제의 기원

2000년대 초 신용카드는 물건을 사고 대금을 나중에 지불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신용판매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용카드사들은 주업무인 신용판매에서 전체 매출의 30퍼센트를, 이른바 부대 업무라 불리는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에서 매출의 70퍼센트 이상을 올리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대출이 필요한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매겨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고비를 써가며 경쟁적으로 신용카드 발급을 확대하려 했던 것은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을 이용하는 저소득층 고객들의 대출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출을 권하는 사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용 불량자 문제는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금융에 대한 규제완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용의 상품화와 더불어 약탈적 대출시장이 만들어진 결과로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으로 신용카드가 쉽게 발급되었다는 문제는 인정하지만,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사용한 끝에 신용 불량자로 전락한 것은 결국 개인의 탓이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여론과 보수 언론도 정부의 신용 회복 정책이나 개인 파산 문제에 대해서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이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용 불량자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넘어 대출을 받고 그렇게 대출받은 돈으로 사치와 과소비를 했던,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이득을 얻었던 주체는 따로 있었다. 신용카드를 손에 쥐어 주며 소비가 미덕이고 국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신용카드 사용을 독려했던 것은 정부, 더 정확히는 김대중 정부였다. 그런 정부 정책으로 신용카드를 통한 대출에 30퍼센트에 이르는 고금리를 적용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긴 것은 신용카드 업체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재벌 대기업들이었다.
민주 정부가 경제 위기로 끝없이 추락하는 내수 소비를 활성화하고자 신용카드 규제들을 풀자 새로운 재벌 대기업들이 신용카드 업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신용카드사들 간의 과당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정부, 기업, 개인이 모두 신용카드 대출 광풍에 휩쓸려 들어간 결과, 불과 몇 년 만에 경제활동인구의 16퍼센트에 육박하는 4백만 명의 신용 불량자가 양산되었다. 신용카드사들 역시 무분별한 대출을 제공한 결과 부실 채권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이른바 카드 대란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진 신용 불량자 문제가 노무현 정부에서 폭발했고, 노무현 정부는 2004년 말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2005년 4월 신용 불량자 등록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신용 불량자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3. ‘대출 권하는 사회’의 문제와 한국 사회

지난 16일 서울 상계동에 미소금융 100호 지점 개소식이 열렸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친서민 행보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2009년 12월에는 미소금융, 2010년 7월에는 정부와 서민 금융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한 햇살론을 출시한 바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저신용, 저소득 서민에게 10퍼센트대의 저금리로 대출을 해준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작 저신용, 저소득 서민에게는 대출의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정부 정책의 모델이자 대표적인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인 그라민 은행과 관련해 최근 고위층의 횡령, 고금리, 강제 상환 등의 문제가 불거진 것도 이런 대응 방식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이미 수천만 원의 빚을 진 신용 불량자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방식’은 빚을 늘릴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대출 서비스만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무분별하게 전개되는 대부 업체들의 공격으로부터 저소득 서민층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통해 거액의 현금 대출을 받는 것은 물론 신용카드를 발급받기도 쉽지 않았다. 대출 시장 나아가 금융시장의 조건을 크게 변화시켰던 신용카드 관련 정부 정책과 과당 경쟁에 뛰어들었던 신용카드사의 정책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거액의 대출도, 대출에 따른 연체도, 따라서 신용 불량자 문제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경제 위기 이후 대량 실업과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면서 실질소득 감소를 경험하고 낙후한 사회복지 체계로 고통 받던 저소득층에게 신용카드를 통한 손쉬운 현금 대출이 가능해졌다. 경제 위기로 생활비, 병원비, 교육비가 필요했던 서민들에게 신용카드를 쥐어 주며 소비가 미덕이고 그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부추기면서, 소득이 낮을수록 고금리를 적용해 연체가 되면 강박적인 채권 추심을 자행해 자살과 범죄를 양산한 신용카드 대출 시장이 허용되었다.
한국의 과다 채무 문제, 특히 김대중 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신용 불량자 문제는 민주 정부와 신용카드사들의 공모에 의한 구조적인 문제, 즉 약탈적 대출 시장의 등장이 아니고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은 민주화 이후 정부의 경제정책이 왜 경제 관료 중심적 정책 결정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 어떻게 정부와 기업 간 지배 연합이 형성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신용 불량자들은 민주 정부의 경제정책과 그에 대응한 신용카드사들의 과당 경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이다. 당시 재벌 대기업 신용카드사들이 이들의 미래 소득으로 연 1조 원에 가까운 초과이윤을 챙기는 동안 신용 불량자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빚으로 자살과 장기 매매, 범죄 사이에서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온종일 일하고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이자를 갚아도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나는 빚 앞에서, 희망 없는 미래 앞에서 절망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때 만들어진 문제로 지금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고 있다. 세계 몇 대 경제 대국이라는 발전된 국가도, 민주적인 정부도 지금까지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했다. 그때 만들어진 대출 권하는 사회가 지금처럼 지속되는 한 이들의 고통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본문 요약

경제 위기 직후 IMF의 정책 권고안에 따른 경제정책은 긴축재정과 고금리로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켰고 그 결과로 대량 실업 사태를 낳았다. 1998년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 머물렀고, 국내 소비의 하락은 심각했다. 1998년 한 해 동안 지속된 경기 침체는 김대중 정부로 하여금 구조조정에서 경기부양으로 정책을 선회하도록 만들었다. 1998년 9월 28일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경제 관련 기자회견을 통해 경제 위기 재연 가능성은 없으며 지속적으로 구조 개혁을 추진할 것임을 표명했지만, 실물경제의 붕괴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경기 진작 의지를 나타내 사실상 내수 진작을 통한 경기 부양 의지를 밝혔다. 이에 재정경제부(재경부)는 소비자 금융을 확대한다는 목표 아래 신용카드 사용을 활성화하는 정책들을 제안하고 추진하게 된다.

신용 불량자 문제를 양산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이었다. 특히 신용카드 업계의 판도 변화를 가져온 것은 신용카드 시장 개방 조치였다. 1988년 이후 금지된, 재벌과 외국자본에 대한 카드 시장 개방 조치가 발표되면서 백화점 카드만 발행할 수 있었던 현대와 롯데가 2001년 이후 신용카드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재경부의 신용카드 시장 개방 조치로 신용카드 업계에 새로운 재벌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신용카드 업계는 시장 선점을 위한 과당경쟁 체제로 돌입하는 계기를 맞았다.

신용 불량자 증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규제완화 조치는, 1999년 4월 카드사 부대 업무 비율 규제(40퍼센트) 폐지와 1999년 5월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한도(월 70만 원) 폐지였다. 신용카드사들은 현금 서비스 한도를 월 1천만 원까지 경쟁적으로 올리며 신용카드 대출영업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신용카드업은 급격히 성장했다. 카드 발급 조건을 대폭 완화하고 무이자 할부, 다양한 서비스 제공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해 2000년부터 카드 발급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현금 서비스 사용액은 1997년 전체 카드 사용액의 47.1퍼센트였으나 1999년 53퍼센트, 2000년 64.6퍼센트로 크게 늘어났다. 여기에 카드론까지 포함할 경우 카드사의 현금 대출 서비스는 전체 이용의 70퍼센트를 훨씬 넘어선다. 신용카드사들이 이렇게 신용카드 본래 업무인 물품 구매보다 현금 서비스 및 카드론과 같은 대출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만큼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사들이 무자격자에 대한 카드 발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현금 서비스 영업에 치중했던 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일차적으로 기업들 간 경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의 결정이 기업의 단기적 이익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가 지속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업들이 이런 영업 방식을 고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부대 업무라고 할 수 있는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을 포함한 대출 업무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대출 업무 중심의 영업을 통해 높은 수수료와 연체료를 부과할 수 있는 구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둘째, 채권자에게 유리한 채권 추심 제도가 불법적인 채권 추심을 가능하게 하여 신용카드사들은 채무를 진 개인에게 끝까지 부채를 상환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4년 국정감사에서 제시된 ‘적정 신용카드 수수료 산출을 위한 원가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을 기준으로 삼성카드 등 3개 카드 회사의 초과이윤은 평균 8,403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용판매에 의한 초과이윤은 328억 원에 불과한 반면 현금 서비스 및 카드론 서비스 등이 각각 4,642억 원, 3,433억 원에 이르러 삼성카드 1조8백억 원, LG카드 9,362억 원, 국민카드 5,047억 원의 초과이윤이 발생했다. 3개사 모두 대출 부분의 초과이윤 규모는 카드사업부 전체의 초과이윤 규모와 거의 일치했다. 따라서 현금 서비스와 카드론 서비스가 카드사업부 전체의 초과이윤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용 불량자들은 왜 신용카드를 통해 대출을 받았으며 이를 갚지 못해 신용 불량자로 전락한 것일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신용 불량자 개인에 대한 심층 면접 조사를 활용한 경험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용 불량자들 개인에 대한 인터뷰 결과(116-123쪽)를 보면, 연체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이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연체를 하게 되면서 이후 동일한 경로를 걷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신용 불량자들은 대부분 신용카드 연체에 대해 카드 돌려막기를 1년 이상 하다가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실직, 사업 실패로 소득 감소를 경험하면서 생활비나 창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쉽게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를 받았고 이를 갚기 어렵게 되자 카드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카드 돌려막기라는 행위는 채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채를 갚고 신용 불량자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게다가 1~2년 이상 돌려막기를 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신용카드사에 지급한 이자가 이미 원금을 상회했음을 의미한다.
돌려막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신용카드사들은 연체금을 대환 대출로 전환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당장 신용카드 빚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서민들은 일단 부채를 대출로 돌려 분할상환할 수 있다는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대환 대출은 신용카드사들이 연체율을 낮추기 위해 이용한 방법일 뿐, 높은 폭리를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는 특히 처음에는 원금은 적게 갚고 이자를 많이 갚는 방식이기에 몇 년간 빚을 갚아도 이자만 계속 갚게 되는 부채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대환 대출로도 빚은 감소하지 않고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극심한 채권 추심에 내몰린 사람들은 마지막 탈출구로 카드깡이나 사채를 선택한다. 신용카드 불법행위인 이른바 카드깡을 통해 돌려막기를 했을 경우에는 1년 만에 원금의 최대 5배로 빚이 불어난다. 금감원 분석 결과 총 이용 한도가 5백만 원인 신용카드 4장을 소지한 사람이 사채업자한테서 카드깡을 통해 선이자 격인 15퍼센트의 수수료를 물고 현금 4백만 원을 일시불로 빌린 뒤, 다른 소득 없이 돌려막기로 빌린 돈을 갚는 행위를 1년간 반복했을 경우 빚은 원금의 5.23배인 2,140만 원이 되었다.

신용 불량자들은 경제 위기 이후 실질소득 감소와 비정규직의 증가 등 불안정한 고용 환경과 허약한 복지 체계 아래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이들이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물건 대금을 결제하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현금 서비스 등 대출을 받았다는 것은, 남의 돈으로 과소비와 사치를 일삼다가 돈을 갚지 않았다는 일방적인 비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여전히 신용 불량자들이 개인 회생이나 개인 파산을 신청한다고 할 때 ‘도덕적 해이 담론’이 언론을 도배한다. 신용 불량자에 대한 따가운 사회적 시선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998년 4월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는 특정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정부가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을 검토할 권한을 갖는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위원회였다. 신용카드 정책과 관련해 규개위는 길거리 모집 금지를 주장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의 요구를 반대하면서 신용카드 발급 자격 심사가 별도로 이뤄지므로 길거리 회원 모집이 바로 발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보험, 이동 통신, 화장품 등은 길거리 판매가 가능한데 신용카드만 제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재벌계 카드사들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고려한 규개위의 조치는 같은 신용카드사라 하더라도 은행계 카드사냐 전업계, 즉 재벌계 카드사냐에 따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규개위에서 재벌계 카드사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은 재벌계 카드사들의 관계자가 규개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2001년 7월 4일 규개위 경제1분과 회의장에서 길거리 카드 회원 모집을 금지하는 안을 금감위가 도입하려 하자 LG카드 사외 이사 김일섭 규개위원과 당시 LG경제연구원장인 이윤호 규개위원이 나서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높은 공정성을 담보해야 할 규개위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의 참여를 확대해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 아래 정책 결정에 민간 전문가의 참여 폭을 확대했지만 그 결과 정책 당사자의 직접적인 이익을 반영하는 비민주적 정책 결정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금융 감독 기구인 금감위 역시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피감독 기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당시 금감위는 공무원 70명과 파견 직원 45명을 포함해 총 115명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직원 가운데 40퍼센트가 민간 기관에서 파견된 직원인 셈이다.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감독 기관이 그 감독 대상인 금융기관의 직원을 파견받아 근무를 시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위원회 제도를 통한 관료 기술적 결정은 경제 위기 이후 사외 이사 제도의 확대와 결합하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위해 1998년부터 도입된 사외 이사 제도는 민간 전문가를 특정 기업과의 네트워크에 연계했고, 다시 이 사외 이사들은 중립적인 민간 전문가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금감원 관료들의 사외 이사 진출 문제도 심각했다. 2003년 6대 그룹(삼성, 현대, SK, LG,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54개 계열사 164명의 사외 이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무직 공무원, 정부 각 부처의 위원회 위원(자문, 고문 포함), 전직 공무원 등이 76명으로 전체의 46.6퍼센트에 달해 사외 이사의 절반이 정부 관련 인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금감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재경부, 한국은행 등 각종 금융 감독 기구의 전, 현직 인사가 사외 이사를 맡은 경우는 33명에 이르렀다.

민주화 이후 참여라는 이름으로 전문가들이나 시민 단체들을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 정책 산출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관료 기술적 결정이 확대되어 온 것이다. 결국 관료와 기업 간 인적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유착 구조는 자본에 대한 관료의 자율성을 약화해 신용카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기업에게 막대한 이득을 허용했다.
김대중 정부는 집권 이후 끊임없이 재벌 개혁을 주장했지만 경제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 아래 정, 재계와의 간담회를 정례화했고 이를 통해 재벌 기업과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지속했다. 사실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가 선택한 신용카드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시장 개방정책은 신용카드업의 성장과 더불어 신용카드사들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다 주었고, 이를 통해 정부와 기업 간 상호 의존적 관계는 정치 연합의 형태로 발전했다.

목차

제1장 왜 신용 불량자 문제인가?
1. 2000년과 2010년의 두 풍경
2. 신용 불량자 문제의 기원
3. ‘신용 불량자’라는 이름
4. 신용 불량자의 등장
5. 책의 구성

제2장 정부: 경제 위기와 정책 선택
1.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금융정책
2. 경제개혁의 실패와 신용카드 정책의 선택
3. 신용카드 정책: 규제 완화의 정치

제3장 기업: 신용카드사의 대응과 대출 시장의 구조 변화
1. 신용카드 시장 개방과 과당경쟁의 구조
2. 신용의 상품화와 대출 시장의 구조 변화
3. 신용카드사의 선택: 높은 이자율과 강박적 채권 추심

제4장 개인: 신용 불량자 되기
1. 누가 신용 불량자인가?
2. 신용 불량으로 가는 경로: 카드 돌려막기, 카드깡 그리고 사채의 덫
3. 신용카드와 과소비의 함수

5장 신용 불량자 문제와 사회적 재난
1. 신용 불량자 문제의 결과: 공동체 해체와 새로운 사회 계급화
2. 신용 불량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도덕적 해이
3. 문제의 해결: 다른 나라와의 비교

제6장 민주주의와 경제정책 결정 구조
1. 민주주의와 경제정책: 대표성과 책임성
2. 민주화 이후 경제정책 결정 구조
3. 정부와 기업 간 지배 연합의 구조

제7장 결론
1. 신용카드 정책 결정의 원인과 구조
2. 경제정책 그리고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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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정책과 민주주의: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과 신용 불량자 문제를 중심으로”(2005)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서강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 민주주의와 빈곤의 문제”, “민주화의 배반: 신용 불량자 문제의 구조와 특징”, “불평등과 한국의 민주주의” 등이 있으며, 공저로 [위기의 노동](2005), [새로운 시대의 공공성 연구](2008), 역서로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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