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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환 산문집. 엄결하고 열정적인 우리 시대의 올곧은 지성 정명환의 세상, 인간, 언어에 대한 통찰이 가득 담긴 산문 44편 수록.

▶이 책에 대하여
일본어를 통해 서구문화를 수입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프랑스어를 통해 외국문학을 직접 수용했던 초창기 1세대 불문학자로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많은 번역을 통해 우리 지성사에 풍요한 자양을 공급했으며, 실존주의의 문제틀을 우리 비평에 본격적으로 접목한 문학평론가로서, 한국문학의 철학 부재와 일천함을 질타하며 도전적인 문제 제기로 한국문학의 심화에 기여해온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정명환의 산문집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가 현대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6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사상계>, <세대>, <동서춘추>, <현대문학>, <주간조선>, <신동아>, <철학과 현실> 등에 게재되었던 시평(時評), 시사 단상, 문학적 또는 철학적 수상 등에서 40여 편을 엄선한 것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어떠한 자기기만도 없이 합리의 토대 위에서 원칙을 고수하면서, 정직하고 엄정하게 한국문학과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응해온 한 지식인의 지적 편력의 흔적인 동시에, 그대로 한국 현대 지성사의 한 풍경이다. 더구나 50여 년 간 무수한 글들을 발표하면서도 사사로운 흔적이 배어 있는 글들을 책으로 묶는 것을 스스로 경계해온 저자의 첫 산문집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으며, 저자의 인간적 면모와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저자의 지적 노정은, 문학은 주어진 삶의 여건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고, 그 여건에 대한 끝없는 이의제기이며,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분리될 수 있는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일관된 인식 하에서 출발해,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에 대한 경도, 한국의 현대문학에 대한 탐구,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에로의 침잠, 일본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 기술사회에서의 새로운 인간 조건에 대한 사색과 통찰로 이어져왔다. 이 책의 1부 ‘세상에 관한 이야기’ 에서는 그의 이러한 지적 편력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세목에 어떻게 적용되고 또 대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전차 속에서는 원칙적으로 현금을 받지 않기로 되어 있습니다”의 ‘원칙적으로’라는 말에서 언어의 가치 하락을 발견하고, ‘五里霧中’을 ‘汚吏無中’으로 잘못 쓴 수험생의 답안을 통해 불의한 사회를 비판하며, ‘손바닥 비벼대기’를 뜻하는 신조어 ‘비비올로지’에서 자아의 성실성과 사회에 대한 순응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음의 고뇌를 읽어낸다.

또한, 넘쳐나는 조화(弔花)를 보며 가진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고, ‘분수를 지키다’라는 말에서 기존 체제의 억압과 패배주의의 기미를 검침해내며, 어느 백화점의 신용카드 신청서에 씌어진 ‘서약’이라는 단어에서 우리 사회의 천박함과 비루함을 간파해내기도 한다. 다양한 제재와 계기에서 비롯된 이 글들을 통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은, ‘목표로서 설정되어야 하겠지만 아마도 끝끝내 발견할 수 없을 절대적 진리를 어떤 개인이나 제도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단(專斷)하고 횡포를 부’리지 않는 가변성과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기계문명과 산업사회의 도래에 의해 초래된 자아상실과 인간소외의 깊은 어둠을 치유해줄 공생의 원칙과 타자에 대한 배려에 입각한 새로운 윤리, 편파적이며 잡다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고 삶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창조적 지성, 감정의 분방한 유출이 아닌 차분하고 합리적인 이성의 발현이다. 2부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주로 저자의 신변에 관련된 일들과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이런저런 생각들이 토로되고 있는데, 특히 ‘비학문적인 변덕의 궤적’은 저자의 정신적 이력을 개관할 수 있는 ‘약식 지적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집필 시기가 40여 년에 걸쳐 있는 이 글들에서 새삼스러운 부분은, 서구의 문제의식이나 사유틀이 그대로 우리 현실을 재는 잣대로 사용되지 않고 반드시 우리의 특수한 현실 상황에 맞게 튜닝되고 있다는 점이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 위기나 진통 등을 오래전에 정확하게 예측, 진단한 통찰이 번득인다는 점이다. 지식인의 훼절이 잦았던 우리 지성사를 반추해볼 때, 정치 권력이나 지적 유행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합리적 이성에 입각해 우리 문학과 사회를 투시해온 저자의 이 첫 산문집에는, 그러므로 마땅히 합당한 격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 지성의 많은 출현을 고무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아주 복잡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사념(思念)이나 감정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넉넉히 분석하고 끄집어낼 수 있는 간단하고 명확한 원인이 숨어 있을 것이며, 이성에 의한 탐색과 처방은 많은 불행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효하고 귀중한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과학적 정신이며 서양적 낙관주의의 기틀이 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사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이성에 입각해서 여러 현상을 따지고 캐본다는 이 작업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단순한 진실일망정, 그것은 우리를 현혹하는 가지가지의 가상(?象)이나 편견에 의해서 겹겹이 싸여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도중에 포기함이 없이 그런 잘못된 것을 신중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벗겨나가는 괴로움을 치러야 한다. 또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이 아무리 우리에게 불리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손상하는 것일망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불안의 시대-인간으로 남기 위한 저항」중에서

프랑스의 유명한 카톨릭 작가인 폴 클로델이 그의 최대의 걸작 『비단신』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려 하고 있는 다음의 호소는 인생의 역설을 힘차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밝디밝은 길을 밟아 그대에게로 가지 않거든 침침한 길로 가게 하소서…. 악을 바라거든 선과는 아예 등을 저버린 그런 악을 바라게 하소서. 혼란을 바라거든 혼란을 베푸시옵소서. 그를 에워싸고 그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뒤흔들어 갈라놓는 그런 혼란을 베푸시옵소서.” 이렇듯 평화를 바라면서도 늘 흔들리는 것, 안정을 바라면서도 극단에 쏠리는 것, 절대를 바라면서도 상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슬퍼하기보다도 도리어 거기에 구원의 역설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줄기차게 동요하다가 죽는 그 순간이 되어 비로소 정신의 추가 한가운데서 고요히 멈추게 된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가장 짙고 알찬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시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