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수평파에 관한 연구서. 수평파는 17세기까지 영국 정치에서 완전히 소외된 중층, 하층 계급의 정치적 견해를 최초로 대변한 정치집단이었고, 200년에서 250년을 앞선 사상을 지닌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 사상의 기원과 종교적 연관성을 찾아보고, 이들이 내세우는 평등사상과 경제 개혁에 관한 구상 등을 설명했다. 또 수평파에 영향을 끼친 영국의 종교개혁사에 관한 저자의 논문 4편을 보론 형식으로 수록했다.

'수평파', 반란자인가 선구자인가?
세상이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압도적인 힘의 남용이 사그러들고, 체념하듯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던 권위주의에 대한 용인과 영향력이 뚜렷하게 빛을 잃어가자 마자, 봉두난발처럼 솟구치는 각계, 각 부문의 요구와 주장이 팽팽히 부딪치면서 소란스러워진다.

많은 이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방에 신경을 혹사하면서 피로와 지루함을 느낀다고 한다. 오죽하면 왕년의 철권 전두환씨조차 "이게 민주주의냐?"는 비아냥을 던지는 데 망설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만큼 다수의 거부감이 한도를 넘어 확산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다"라는 금언이 있듯이,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현실에서 실현되는 데는 각종 지엽적인 부작용과 소란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국론'은 통일될 수 없는 것이다. 흘러간 과거는 늘 아련하게 느껴진다지만 그것은 기억의 특수한 작용일 뿐이고, '일사불란한 목소리와 움직임'은 전근대적 독재체제에서나 떠올릴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다시 민주주의가 문제일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듯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단계로 평가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다시금 민주주의가 문제란 말일까? 그러면 새삼스레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인가?

우리나라에선 청나라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을 맞아 국왕이 무릎꿇고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겪어 온나라가 뒤숭숭할 무렵의, 유럽 귀퉁이 한 섬나라로 역사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현대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평파가 꿈꾸었던 민주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어떤 우여곡절과 파란과 절망이 숨어 있을까? 이 한 권의 책으로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곰곰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한참 앞서간 현대 민주주의의 선구자들
'수평파(levellers)'란 흔히 청교도혁명으로 불리는 영국내란이 벌어진 뒤부터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들어선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통치하는 공화국 시기에 소시민, 직공, 자영농민, 소작농민, 군대의 사병 등 그때까지 봉건적 농노제의 잔재가 온존하는 조건에서 모든 면에서 소외받아온 사회 기층계급을 기반으로 그들의 이해를 공개적으로 대변하는 근본적인 공화주의·민주주의 운동을 벌인 집단이다.

14세기 위클리프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도도한 흐름은 그를 추종하는 롤라드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내용을 지금 들여다보아도 그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에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 이 운동은 점차 활성화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사회에 미치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형벌을 앞세운 집중적인 탄압도 인민의 마음 속에 형성한 거대한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종교문제에 대해서 유연한 정책을 써온 것으로 알려진 찰스 1세의 즉위 또한 '계승과 축적'이란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 공화국'의 지속적인 추진과 혁신만이 시대적 구실이었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수평파, 디거파 등이 주장하고 추진한 '근본적 개혁'을 두려워했으며, 따라서 이른바 '기득권 세력'인 종교 지도자들, 의원들, 군 지휘관들과 어정쩡한 타협으로 불안정한 생명을 이어간 것이다.

따라서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뒤 공화국이 급격히 무너져 왕정이 부활하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은 인민에 기반한 개혁을 주장한 수평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탄압한 대가로 받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수평파는 역설적으로 시대착오적인 꿈을 꾼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수평파의 정체성을 정리한다.

수평파는 17세기까지 영국 정치에서 완전히 소외된 중층·하층 계급의 정치적 견해를 최초로 대변한 정치집단이었고, 그들이 정강(政綱)으로 내세운 사상은 200년에서 250년 뒤에야 겨우 정책으로 구현될 정도로 시대를 한참 앞서간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이었다.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기원을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수평파라는 이름은 이 운동이 "사람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만들려 한다는, 즉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평등을 주장하며 공산주의적 정책을 편다는 인상을 주도록 하기 위해 적대진영의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수평파운동은 전통적인 자연법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수평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릴번의 다음 발언은 지금 음미해도 감동적일 만큼 인문적인 품격을 담고 있다.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은 창세기 이래… 모든 구체적이고 독창적인 남녀의… 지구상의 원초적인 원천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과거와 현재에 모두가 날 때부터 권력·품위·권위가 평등하고 동일하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떠한 권위·지배 혹은 통치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수평파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사라져갔나?
수평파 운동은 1645∼1646년 영국의 서울 런던과 그 주변지역에서 국왕과 왕당파에 맞서 의회를 지지한 급진세력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내란은 의회와 인민의 이름을 걸고 진행되고 있었는데, 수평파는 실질적인 주권이 국왕과 귀족들을 배제하고 인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는 하원으로 이양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합리적인 재분배, 1∼2년마다 의회를 열어 입법기관이 진정한 대의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 정부의 권한을 지방공동체로 분산할 것 등을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정책방안이었으니, 지금부터 무려 350년 전에 이러한 내용이 주장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수평파는 또 경제개혁도 강력히 주장했다. 그것은 주로 소시민의 편에 선 개혁정책이었다. 즉 완전한 법률적 평등, 소수에 손에 좌우되는 상거래 독점 폐지, 인클로저 운동으로 집중된 토지를 경작민들에게 다시 개방할 것, 등기 소작농에 대한 기한의 법적 보증 등을 주장한 것이다.

게다가 무원칙하고 법률에 기반하지 않은 징병을 금지할 것,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군에 대한 숙식 제공을 금지할 것, 가혹한 법률을 개정할 것,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10분의 1세를 폐지할 것(영국국교회 십일조의 폐지), 신앙과 결사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알맹이를 거의 망라해 담고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수평파는 인민의 광범한 지지를 바탕으로, 군대의 일반병사의 지지로 얻은 실질적인 물리력으로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 결과 수평파운동의 내용적 결정판이랄 수 있는 <인민협약>을 채택하고 선포하는 데까지 이른다.

<인민협약>은 청교도혁명의 결과로 해체되다시피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협약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범한 사병의 지지를 이끌어내 군 지도부조차 장교는 물론 사병대표까지 포함된 군사평의회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 내 보수적 장로파와 독립파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수평파는 인민과 사병에게 직접 호소하며 군대를 움직이는 승부수를 던지지만, 올리버 크롬웰의 기병대가 약속과 다르게 야간기습을 감행함으로써 괴멸되고 지도부는 체포되어 투옥되고 만다. 정치적 조직체 수평파는 몰락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수평파는 왕당파에 함께 맞선 동지였던 크롬웰과 의회에게 배신당했다. 그들에게 수평파는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들이 느낀 급박한 위기의식은 크롬웰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을 때려부수는 것밖에 이자들을 다룰 길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자들을 때려부수지 않는다면 그자들이 우리를 때려부술 것입니다.

맑스주의자 모리스 돕은 청교도혁명에 따른 계급의 양극분해현상이 심화한 것으로 수평파운동을 파악했다.

이 혁명은 해방의 사명을 최후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가장 과격한 분자의 충격을 필요로 하지만, 이들 과격분자가 나타나자마자 광범한 부르주아층을 떨어져나가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평파는 한번도 전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수평파의 녹색 깃발이 런던의 시가지에 휘날리고 병사들은 수평파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으나, 교회와 토지귀족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선전활동을 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군 전체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수평파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을 민주적인 사상으로 교육시킬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과 장인들에게도 수평파의 계획이 호소력 있게 유포되었을 것이다.

수평파는 좀더 급진적인 성격으로 소박한 공산주의를 주장한 디거파들과는 다르게 소규모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지지까지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중세의 암흑기를 막 빠져나와 종교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인 그 당시 영국에서, 수평파가 당시까지의 관례와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는 물론이고 종교정책까지도 '이성'에 호소하며 대중적 정치운동을 벌인 것은 정치사상사에서 하나의 중대한 이정표로 평가되고 있다.

덧붙여 릴번, 월린 등 일부 지도자들이 대중적 선전을 위해 집필·인쇄해 배포한 팸플릿은 영국의 대중적인 산문(散文)과 활자매체의 발달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영국의 수평파운동>은 어떻게 구성·집필되었나?
이 책에는 네 편의 글이 보론으로 붙어 있다. 보론1은 수평파에게 영향을 끼친 종교사상의 원천(源泉)을 소급해 살폈다. 여기서는 재세례파―일반침례파―수평파로 연결되는 맥락에서 수평파 종교사상의 계보를 추적했다.

보론2는 영국 내란의 원인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파헤쳤다. 필자는 내란의 원인을 캘비니즘과 반(反)캘비니즘의 대결이라는 패러다임으로 해답을 구하고 있다.

보론3 '에라스무스의 영국 체류 활동과 그 영향'은 특히 주목된다. 글과 토론으로 근대의 여명을 열어젖힌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영국에서 벌인 생생한 활약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기념비적인 명문을 읽어볼 수도 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한 줌밖에 안 되는 신학자들만이 겨우 그를 이해할 만큼 가르쳤다는 듯이, 또는 마치 기독교가 장막에 싸여 알 수 없는 것이어야만 수호될 수 있다는 듯이, 그 성스러운 성경이 무식한 사람들에게 읽히거나 속어로 옮겨지지 못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을 나는 단호하게 배격한다. …

내가 바라건대, 모든 미천한 여인들도 복음서를 읽고 또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모든 언어로 옮겨져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나 아일랜드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투르크 족이나 사라센 사람들도 이것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농부는 쟁기질을 하면서 성경 구절을 흥얼거릴 수 있고, 직공도 그 구절에다 베틀을 놀리는 장단을 맞출 수 있으며, 나그네도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노독을 달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보론4에서는 영국의 종교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는가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는가, 종교개혁의 진행 속도는 '빠른 것'이었는가 아니면 '더딘 것'이었는가에 관한 쟁점을 고찰했다.

-서문 ...11

1. 수평과 사상의 기원 ...17
2. 수평파와 종교 ...31
3. 수평파 운동의 전개 ...59
4. 선거권에 관한 논의 ...85
5. 제2차 인민 협약 ...123
6. 수평파의 평등사상 ...151
7. 경제개혁에 관한 구상 ...189

보론
1. 재세례파가 일반침례파에게 끼친 영향 ...225
2. 영국 내란의 종교적 원인 ...245
3. 에라스무스의 영국체류활동과 그 영향 ...287
4. 영국의 종교개혁 논의에 관한 일고 ...343

-부록 제1차. 제3차 인민협약 원문 번역 ...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