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O N J A ; 읽 고 쓰 다

 한글로 쓰여 있어서 어찌어찌 발음 내어 읽을 수는 있지만, '-스' 까지 소리를 낸 뒤의 그 옆으로 쫙 벌어진 나의 입모양엔 공허한 숨소리만 '스으으으---' 하며 남게 되는 제목 '암보스 문도-스--으으으---'. 강렬한 주황색 표지에 판화를 이용해 그려진 메인은, 도무지 내용을 종잡을 수 없는 제목의 미궁을 더 깊게만 만든다. 대체 이게 뭔데? 이거 무슨 책인데? 하는 마음으로 펼치면 나오는 간단한 한 마디.

   어어, 아니 근데 이 책은 여행기가 맞아.

  여행기라고 부른다 해서 뭔가 딱히 불만을 가질 순 없을 게다. 아직 사고의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들이나 저지를 법한 소소한 반항이 아니라, 정말로 이 책은 여행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발로 유럽을, 남아메리카를, 그 모든 것이 생소한 땅들 위에 발자국을 눌러새기며 떠올린 생각들을 담은 책인데 '여행기'라는 단어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랴. 사진 한 장 없고,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 한 줄 나와있질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책은 여행기 세 글자로 분류되지 않으면 갈 곳이 없다.

  그래 그런 뜻이었구나. 그래서 암보스 문도스에는 권리 작가가 양쪽의 세계를 오가며 남긴 분주한 발자취들이 담겨있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막무가내 식으로 거칠게 떠난 여행길.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광경들을 통해 떠올리는 저쪽의 영감. 그 상상의 나래에서 돌아온 이쪽의 현실. 그리고 묵묵히 펜을 밀어 써나가는 과정. 자리를 털고 다시 떠나는 여행길... 그리고 또 영감과 현실과 펜과 또 다른 여행과... 이런 흐름의 반복이 가득하다. 그야말로 양쪽의 세계네. 암보스 문도스 만세!

  거창해 보이지만 우리는 모두가 암보스 문도스를 오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카페에서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며 페이지를 후룩후룩 넘기다가 나는 문득 내 책상 서랍 어딘가에 납죽하니 숨 죽이고 있을 갈색 노트를 떠올렸다. 2년 전 혼자 떠났던 인도와 네팔을 향한 여행에서 한 시도 내 몸에서 떼 놓은 적이 없던 그 노트를. 카페라는 이쪽의 세계에 있는 몸뚱아리를 놔둔 채, 이미 저쪽의 세계로 흘러간 내 마음은 책상을 열어젖히고 급하게 노트를 찾아 꺼내어들었다.

  노트를 굳게 묶고 있는 고무줄을 푸르고 펼치면 그 누런 종이 위에 스며있는 타국의 향기가 피어나겠지. 골목골목을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그 흰 소들이, 그들의 꼬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묻어있는 소똥들이, 달릴 때면 언제나 객실 안을 가득 채우는 기차 안의 누런 모래가, 세계를 떠받드는 히말라야 지붕의 청명한 공기가 피어나겠지. 그러한 것들을 보며 떠올렸던 나의 수많은 생각들도 몽글몽글 피어나지 않고서는 배기질 못하겠지.

  나는 작가는 커녕 글을 쓰는 데에 취미를 가지질 못한 (지금과 꼭 같은) 철 없는 학생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떠올렸던 것 같다. 영감이라고 하자니 쑥스럽고 어쩐지 거창해 보이니 그냥 '촉' 정도로 표현하면 딱 좋을 수준이었지만. 누구나 여행을 떠나면 그럴 때가 있잖아. '촉'이 떠오를 때. 그런 것들이 결국 암보스 문도스를 오고 간 흔적이 아닐까. 암보스 문도스 만세!

   최근 서점이나 블로그에 가득한 무수한 여행기들을 보자면 너무 '이쪽'의 세계만 조명한 것들이 많다. 여기 가서 먹고, 저기 가서 카메라로 찍고. 이런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정말로 조금쯤은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저쪽'의 세계를 담아주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준수한 평가를 줄 만 했다.

  아아. 여행 가고 싶다.

  여담이지만 읽고 나서 느낀 저자의 색채에 대해서. 권리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중간중간에 담겨있는 담화들을 보면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차가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움베르트 에코의 '세.바.웃.'이 떠오른달까. 유럽적인 고상한 풍자가 돋보여서, 기회가 닿으면 이 작가의 소설을 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W O N J A ; 읽 고 쓰 다

 초등학교 시절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장래희망이나 취미, 특기를 적어서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야 했었다. 취미도 특별한 게 없었고 그러다보니 특기에는 특기할 만한 내용을 적어넣기가 더욱 어려웠다. 내가 그 때 무슨 취미와 특기를 적어서 제출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매년 다른 내용을 적었는지 어쨌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데, 아마 끽해야 게임정도를 적지 않았을까. 컴퓨터를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취미와 특기를 자신있게 적을 수 없으니 장래희망은 더욱 어려웠다. 아니 대체 내가 뭐 특별히 ‘이것만큼은 미친 듯이 재미있어!’ 싶은 감정을 갖고 파고드는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다보니 그냥 평소에 재밌어하는 활동에서 장래희망을 따왔던 것 같다. 세 글자 끄적끄적. 만, 화, 가. 음, 뱉은 말과 써 제낀 글이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그 뒤로 나는 만화가가 내 장래희망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다녔고 실제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집 창고 속엔 꼬꼬마 때 그렸던 만화 7~8권이 잠을 자고 있다.

 그 어린 맘에 생각하기를, 장래희망이란 건 항상 품고 다니기만 하면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쨘!’하고 이뤄지는 걸로 여겼던 듯싶다. 마치 애벌레가 어느 순간 번데기가 되고, 그 다음 어느 때 나비로 날아오르듯, 나라는 꼬맹이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날 밤 잠든 뒤 깨어나면 손에 펜대와 잉크를 쥐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게지.

 하지만 지금은 만화가라는 장래희망은 온데도 간데도 없이 그저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를 따라왔고 대학에 입학을 했고, 다시 대학에서 시키는 공부를 따라오다가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가 그렇듯 군복무를 하고 있다. 그렇게 되었다. 지금 내 마음은 누가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만한 한 단어를 품고 있지 못하다. 어느 순간 장래희망을 이루게 될거야 라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어느 순간 이루어진 것은 장래희망이라는 빛나는 개념의 증발 뿐이었다.

 ‘그들의 생각을 훔치다’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다루었다. 일반적인 주간지에 2페이지 차지할 분량의 인터뷰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거나 이렇게 해야만 성공한다는 식의 인터뷰가 아닌, 자유롭게 그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풀어쓴 조금은 정겹고 가벼운 분위기의 인터뷰를 컨셉으로 삼았다.

 시골의사 박경철, 배우 안성기, 가수 김창완, 만화가 김수정 등 18명은 그들의 타이틀만 들어도 ‘아, 나도 저 사람처럼 확고한 목표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는 시샘과 부러움의 감정이 솟게 된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너무나 능력이 출중해서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고 응애응애 울음을 질렀을 것만 같다! 박경철씨는 청진기를 달고 태어났고, 김창완씨는 마이크를 쥐고 태어났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허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들과 함께 한 인터뷰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방황이 있었고 고난이 있었다. 꿈이 없는 때도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직업을 어려서부터 갈구해왔던 사람은 없다. 장래희망의 증발만은 겪은 나 같은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다. 18명의 그들은, 인생의 가락을 잡은 시기가 빨라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급할 것 없어. 장래희망이 증발했다고? 그게 뭐 어때. 살다보면 이거다 싶은 순간이 오는 거란다. 다만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가락을 잡았다면 그 방향에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W O N J A ; 읽 고 쓰 다

 2009년의 10월 3일, 나는 배낭 하나와 내 몸뚱아리만 믿고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4일, 나는 여전히 배낭 하나와 내 몸뚱아리만 챙겨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42일간 집을 떠올린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홀홀 단신 배낭여행을 40일 넘게 떠난 적은 일전에 역사가 없었으므로. 그것도 인도라는 하이 텐션의 환경으로 떠났으니까, 그 외로움과 고난이 오죽했겠어.

 그 때 인도에서, 집을 떠올리면. 우선 항상 따스하게 맞아주시는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 뱃속을 따스하게 채워주는 흰 쌀밥과 고깃국이 떠올랐고. 옆에서 장난스레 나와 수다를 떠는 누나가, 꼬리를 치면서 쓰다듬어 주길 갈구하는 모양새로 앞발을 흔드는 네 마리의 강아지가, 언제든 뜨끈한 물이 펑펑 나오는 샤워기가, 폭신한 이불이, 항상 깨끗하게 빨아져 있는 나의 옷가지들이… 그러한 것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길 떠나기 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왜? 왜 하필이면 이런 평범한 것들만 떠올랐던 걸까? 집에서 가족들과 싸운 적도 있잖아. 13년을 기르던 강아지가 죽었던 일도 있잖아. 부모님이 이혼을 한 일도 있잖아. 어린 맘에 어머니 지갑에서 지폐 한 장 꺼내다 들켜서 혼난 적도 있잖아. 지금 떠올려도 숨이 덜컥덜컥 떨어지는 그런 일들, 많잖아. 그런데 왜 이런 건 생각도 나지 않고 따스한 집, 스윗 홈의 기억만 그렇게 줄줄창창히 연달아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냥. 집이란 건 그런 거니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극적인 집안 내력이란 건 오히려 거짓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큰 사건이 닥쳐도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 집이란 건 그런 거니까. 마치 바다처럼. 가까이서 보면 파도가 끝도 없이 일렁이고 있다고 해도 멀리서 보면 결국 망망한 푸르름으로 남아있는 거다. 집이란 건, 그런 거라구.

 에쿠니 가오리의 최신작, 음, 그러니까 2011년 봄 기준으로 최신작 ‘소란한 보통날’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집’이라는 단위가 갖고 있는 이런 어찌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혼을 결심하고 짐을 꾸리는 첫째 소요 언니. 언제나 사랑에 시달리다가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는 둘째 시마코 언니.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진학도 취업도 하지 않은 채 남자친구와 첫 경험을 가진 셋째 고토코. 취미로 하는 인형 만들기 때문에 학교에서 징계를 받은 막내 리쓰. 4남매가 각자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그 어떤 것도 그들의 따스한 집을 망가뜨리진 못한다. 아무리 그네를 흔들어본들 그네는 밀려진 상태 그대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하하, 이 책.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책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에쿠니 가오리의 필치 또한 담박하기 그지 없는 데다가 번뜩이는 사건의 전개도 없는 터라 흐아암, 따분한 하품을 뿜는 것 마냥 책장이 넘어간다. 근데 다 읽고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보니, 책장이 따분하게 넘어갔다는 건 내가 정상적인 따스한 집에서 몸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게 되었다. 타지에 외떨어진 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소란한 보통날’을 집어들었다면 나 아마 울지 않았을까? 자잘한 소란이 보통의 나날을 이어나가는 나의 집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