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17년 전 내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한다. 그 말인즉,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내는 것이다.”인데, 무슨 계기였는지는 역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당시 시간 대 인간의 주체와 객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분명, 있었다고 본다. 그 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 이후 내가 시간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 열여덟, 그 즈음의 나이가 시간에 대하여 가장 진지하고 깊이 생각해보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확신이 생겼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시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엔 많이 늦었다. 아마, 어른들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김선영의 ‘시간을 파는 상점’은 우리가 기존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여해준 학교, 친구, 폭력 등에 대한 범주를 벗어나 철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응해야 하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특별한 책이다. 사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학교, 친구, 폭력 등과 같은 범주는 인간과 세계라는 큰 범주 안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겐 너무나 제한적이고 편협한 범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온조는 알바비를 계산하다 시간이 돈으로 환급될 수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돈이라는 실재적 개념으로 전환되는 순간, 온조는 크로노스가 되고 ‘시간을 파는 상점’이 개업한다. 크로노스로서 시간을 파는 행위를 하는 온조도 처음엔 그저 시간이 돈이 되는 수단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했을 것이다. 얼핏 보면 도난 사건이나 강토 사건을 통해 온조가 시간을 물리적 수단이 아니라 의미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보겠지만 사실 무심히 나눈 ‘아이린’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초등학생과의 대화에서 이미 온조는 시나브로 개념의 전환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로노스 : 네, 맞아요. 시간은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몸에 켜켜이 쌓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린 님이 말한 건 기억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열세 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시간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어떤 이야기 속에는 단지 하룻밤 꿈을 꾸었을 뿐인데 60년, 100년이 흘러 젊은이를 노인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미래의 시간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일테면 내가 스무 살이 된다면 난 반드시 무얼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행동하면 미래의 시간도 현재로 가져오는 것 아닐까요

 

  미래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그 말은 결코 물리적 수단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이후 강토 할아버지와의 식사 시간을 통해 온조는 카이로스의 존재를 느끼게 되며, 불곰이 말한 ‘절대 불변이라고 믿는 것들의 반란’에 대하여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작은 선생님의 편지를 전하면서 시간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음을 알게 되며 이 순간은 온조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시점이다. 단순히 양적 의미로 시간을 팔기 시작한 온조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질적 의미로 시간을 규정짓는 시점. 온조에겐 바로 그 ‘지금’을 잘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온조에겐 ‘지금’을 현명하게 보내고 또한 더 이상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성장은 대견하고 아름답다.

 

 

  작가는 매우 세심한 사람이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읽어도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 이 이야기를 역시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읽어도 아름다운 말들로 문장을 꾸렸다. 작가가 택한 낱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열여덟 즈음의 삶이 어른들이 만든 작은 세계에서만 살아가기엔 역시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가 택한 ‘시간’이라는 주제가 또 얼마나 의미 있는지, 다시 그가 택한 낱말들이 역시 얼마나 의미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열여덟이었던 그 때보다 더 어리석게 시간을 보내는 지금의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나에게 ‘지금’ 이 시간은 마구잡이로 흘러만 가고 있다. 시간을 운용하기는커녕, 시간의 의미를 찾기는커녕,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주말만 찾으며 많은 시간을 급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전혀 아름답지도 생명력이 있지도 않다. 펄떡이던 열여덟의 나는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온조의 마지막 마음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다시 읽어보면 지금의 나도 조금은 살아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야할지 고민하는 마음으로.

 

 

 

온조는 지금 맞이할 이 순간을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맡겨두려 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궁금하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 거짓말 학교

세 아이의 눈빛과 몸짓에 뭔가 속고 있다는, 그러하기에 흥미롭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느껴져 읽을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읽기로 마음을 먹고 보니 표지의 질감이나 그림부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특히 조각난 말을 맞추는 듯한 표지 제목은 그야말로 거짓말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거짓말을 육성하는 특성화학교라는 소재가 어른인 내게도 흥미로웠다. 학교라는 곳은 윤리적인 느낌이 강한 공간인데 역으로 거짓말을 잘 하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발상은 쉽지 않지만 무척 유혹적이다. 마치 거짓말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이 책을 읽고서 자신의 거짓말을 되새김질해보고 최소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학교는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정부 설립의 특성화 중학교이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거짓말을 하는 방법과 소양을 쌓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거짓말을 하는 일 또는 거짓말을 밝히는 일을 하게 되지만 교장은 선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저마다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어 학교에 다니고는 있지만 우리가 그렇듯 이들 역시 거짓말에 대해 당당한 인물은 없다. 집안 형편만 좋다면 굳이 이런 학교가 아니라 일류 학교에 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애와 부모님의 사랑만 있다면 어떤 학교라도 상관없는 나영, 공부를 못하는 자신을 받아주었기에 다니게 된 도윤과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준우 모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학교에 다닐 뿐, 반드시 거짓말을 의욕적으로 배울 의도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 학교'는  우리가 거짓말을 대하는 태도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이 아이들이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된 계기처럼  정말 피치 못할 경우이지 정말로 거짓말이 너무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니할 수 없는 말, 그 말이 바로 거짓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짓말이란 말을 하다보면 생기는 말의 다른 형태일 뿐 옳다 그르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거짓말'이라는 것에 윤리적인 의미를 강하게 부여하지 않는다. 추리나 상상력을 통해 거짓말의 배경이나 거짓말에 뒤따르는 것들을 드러내어 흥미로우면서도 여운을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작가는 불신이 팽배한 사회를 풍자하기도 한다. 교장은 미래 사회를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서로를 속여야 하는 사회로 규정지음으로써 거짓말학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정당성은 증명되지 못한 채 도리어 인물들로 하여금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단박에 읽어내려갈 만큼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기법이 화려한 작품이다. 하지만 많은 인물이 등장하다 보니 간혹 캐릭터의 특성이 모호하여 굳이 인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거짓말헌장과 같은 부분은 세심하다기 보다는 조악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윤리적이지 않다는 특징과 마지막까지 긴장과 몰입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장점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역발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날 실망시키지 않은 진실학 선생님, 날 믿지 않는 나영이, 나영이를 믿지 않는 나, 거짓말 수술 그리고 퇴학, 아빠 엄마, 교장, 비웃음, 진실과 거짓 그리고 내 미래....... 이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화면처럼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며칠 전까지 선명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강인애, 이제 어떡할래?'

 p 218

거짓말학교, 문학동네어린이

 

 

지울 수 없는, 떼어낼 수 없는

-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입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픈 아이를 입양하려고 용기 낸 적은 없었다. 만약 입양을 하려고 진행을 했었더라면 그것보다 더한 조건도 거르고 거르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입양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는 식의 나의 생각은 어쩌면 진실성이 결여된 교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의 해마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뗄 수 없는 일부이기도 하다. 태어난 지 100일 밖에 안 된 아기가 부모에게 버려지고 큰 병을 앓았다. 물론 당시에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공개 입양된 하늘이는 세상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점을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쭉 새기고 살아가야했다. 그런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가슴으로 낳은 아이, 주워서 온 아이, 병들었던 아이라는 자기 비하로 이어지기 쉬운 상처가 된다. 혹시라도 엄마나 아빠 또는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 감정이 느껴져도 그 원인은 곧장 ‘입양’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아빠는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렀다. 할머니 표정이 밝다. 아빠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냥 사랑은 아닌 것 같다. 가볍지 않고 무겁다. 말할 때마다 할머니 몸에서 나오는 따뜻한 무언가가 아빠를 꼭 감싸 주는 것 같다. 엄마한테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뿜어 내는 저 특별한 온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p59-60

 

   매일 매일 자궁으로 낳은 엄마와 함께 사는 나의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에는 나의 몸에 제 몸을 부비며 더욱 더 사랑받기 위해 함께 있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어젯밤 문득 내 몸에 기대어 잠든 아이를 보며 ‘그래도 넌 정말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해 버렸다. 그럼 하늘이는? 하늘이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내가 이런 생각을 가졌듯이 하늘이는 스스로에게도 행복이라는 선물을 주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가 아빠에게 주는 그런 사랑을 부러워할 뿐 제 몫은 아니라는 생각을 자라면서 쭉 해왔을 것이다. 엄마한테 사랑을 갈구하지만 정작 돌아오는 건 서운함과 외로움 뿐 이었으니 스스로에게 미처 행복이라는 말을 적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가족이건 역경을 함께 견디어 낸다면 가족애가 더욱 끈끈해지게 된다. 한강이네 가족은 한강이의 학교 문제로 인해 좀 더 가족이라는 끈이 단단해질 것이고 하늘이네 가족은 하늘이와 엄마의 한바탕 속풀이를 한 다음에 분명 더욱 행복해졌을 것이다. 내 아이와 나도 어느 순간 고비를 겪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런 후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어느 한 순간도 입양이라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입양 가족을 일반 가족과 똑같이 대하라고 강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입양 가족이어서 생기는 불편한 점, 어려운 점을 드러내 보였다. 하늘이의 해마가 만지면 만져지는 곳에 있듯이 공개 입양된 하늘이네 집의 불편한 공기는 만지고자 하면 언제나 불거져 나올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는 그러한 흐름 속에서 시나브로 입양 가족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할머니가 두 번째 입양될 손자의 태몽을 꾸듯이 하늘이네 가족은 하늘이네 가족일 뿐 공개 입양된 하늘이네 가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늘이의 가슴에 사는 해마는 지울 수도 없고 떼어낼 수도 없는 상처이기도 하지만, 굳이 지울 필요도 없고 떼어낼 필요도 없는 하늘이 몸의 일부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마치 하늘이가 입양된 아이라는 점을 분명 사실이지만 굳이 되새기며 살 필요 없는 일이듯이. 

 

"긍께 그 뭐시냐, 한 식구가 되는 건 다 하늘의 뜻이라더니, 옛말 그른 거 한나 없어. 받으야지, 내 손주로 받으야지. 안 그려도 나가 태몽을 한나 꿨는디 고것이 고것인 게 비다. 나헌티 저 온다고 꿈에서 미리 인사혔응께 고것이 내 손주지 뭣이냐."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