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주얼 베이컨시1에서도 적은 내용인데, 작가는 역시 천재같다. 해리포터같은 소설은 단지 운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을 쓸 때 작가는 흥행성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고 썼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말하자면 잘 썼지만 잘 나가기 힘든 내용이다. 초보 소설가라면 택하지 않았을 그런 내용과 결말 말이다.

등장인물이 꽤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 두루뭉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개성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사정을 가지고 있으며 고뇌와 많은 생각들을, 하지만 가치관의 차이나 살아온 환경에 의해 미묘하게나마 차이나는 생각들을 하고 살아간다. 개인이 딱딱 정립이 된다는 것이다. 이면적이고 위선적이나 때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마치 진짜 사람 속마음을 비춰보는 듯한 복합적인 서술에 주인공이 따로 정해지지 않고 각자의 인생을 들여 보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선호도도 심하게 차이가 난다. 나 같은 경우 가이아에게는 연민이, 팻츠가 순수하게 못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마치 실존 인물처럼 아니꼬았다. 막판엔 크리스탈에게도 애정이 생기는 걸 느꼈다.  

자치구의원인 배리가 죽으면서 공석을 놓고 싸우지만, 이 자리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오히려 작은 수준이다. 어른과 아이의, 아이와 아이의, 부모와 자식간의, 남편과 아내의 온갖 갈등 속에서 오히려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돼 결국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너무 나쁜 놈도 너무 착한 놈도 없다는 것을 심지어 최대 피해자이고 가장 순수하게 다뤄지는 메리 페어브라더의 마지막 장례식에서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쩜 인간사를 이렇게 잘 표현했지? 모르긴 몰라도 조앤 롤링의 삶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그 경험을 자신의 문장력과 표현력으로 흡수시킨 모양이다.

결말 부분도 인상적이고 여운이 남는다. 워낙 심리적인 책이라 반전같은 건 예상해보지도 못했고 그냥 물 흐르듯 결말로 갔다. 그리고 해결된 듯 보이지만 실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성장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그냥 마음 속에 누군가의 죽음을 더했을 뿐이며, 앞으로 그것을 발전 시킬지 말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급하게 철이 든다거나, 극적인 화해를 한다거나, 골치 아팠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기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여전히 사이는 안 좋고 위태위태 하며, 삶은 가난하고 고뇌가 넘쳐난다. 이 모습 또한 과장되지 않은 우리 인간사의 모습과 흡사해서 오히려 더 마음 속을 찔렀다.   

조앤 롤링의 이런 새로운 시도에 실망한 사람도 많았다지만, 나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고 존경스러웠다. 대단한 건 해리포터 때와 마찬가지다. 차이점은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나 안했나의 차이일 뿐이지.

이 책을 읽을 사람들한테 정말로 충고하고 싶은 말은(1권 리뷰때도 적었다) 등장 인물을 꼼꼼히 살펴서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건지 흐름을 파악하라는 거다. 초반에 이게 이뤄지지 않으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나 싶다. 그렇지만 인물 관계도를 보고 잘 파악한다면 어느새 그들이 뚜렷한 자아상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정말 재밌다. 조앤 롤링이 소설을 많이 쓰고, 또 많이 번역됐으면 좋겠다. 번역이 안되면 스스로라도 읽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정확하게 4점.

합본은 무려 천 이백장이 넘는다. 그런고로 2주 안에 반납을 해야되는 고시생이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언제부턴가 이야기의 흐름을 잃어버렸는데 그대로 죽죽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틀을 잡고 있다해도 퍽이나 이 이야기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생각하건대,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약간의 정신을 놓고 그냥 즐기는 것이다. 작가도 그렇게 썼던 것 같으니까.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고 또 돌다가도 어느 시점에선 우주 한 복판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작가가 구사하는 특유의 농담들이 너무 귀여워서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책장을 계속 넘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은,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 말 좀 들을 걸 그랬어!" "엄마가 뭐라 그랬는데?" "몰라, 안들어서." 였다.

그런 와중에(나는 몰랐는데 옮긴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더글러스 애덤스는 사회에 대한 은근한 질타를 하고 있는 듯하다. 순식간에 지구를 잃은 아서는 소시민을, 생각없고 포악한 보고인들은 권력을 휘두르는 못된 윗놈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인생에 대한 철학들이 관통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아직 은하수를 여행하기엔 모자라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별을 헤아리려 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도 조금 심적으로 와닿았던 문구를 적자면, "난 자기를 먹어달라고 하는 짐승을 먹고 싶진 않다고. 냉혹한 짓이야."아서가 말했다. "먹히고 싶어 하지 않는 짐승을 먹는 것보단 낫지." 자포드가 말했다, 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나기 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나버려서 아쉽다. 하지만 작가가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는 것(아니면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런 성격이라면 오십 년을 더 살았어도 이야기의 끝을 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상상력이 넘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혀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두 발을 떼고 땅에서 벗어나면 날 수 있다]같은 이해할 수 있지만 또 이해할 수 없는 원리를 발표하는 작가의 모습에 반했다. [그러던 중 어느 목요일, 그러니까 한 남자가 기분 전환도 할 겸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지 약 이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목요일] 이 부분도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의 말 중 하나이다.

제목의 뜻은 "(의회의) 공석" 이정도일 듯 싶다. 지방 의원이었던 배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공석의 차기 후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가 거미줄처럼 얽혀서 전개돼나간다. 작가의 위대한 전작인 해리포터처럼 급진적인 전개는 없고, 마치 비오는 날 쿰쿰한 생각을 하듯 느리고 무겁게 흘러간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재밌다. 각각의 다른 성격, 각각의 다른 특징과 상황을 가진 캐릭터의 심리만상을 어쩜 저렇게 세세하게 펼쳐나갈 수 있을까 싶어하며 읽는 내내 왠지 모르게 작가가 천재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하철에서 짬짬이 읽다보니 등장인물들의 갈피가 안잡히고 책장만 넘기는 식으로 지루하게 나가다가, 맘 잡고 집에서 등장인물 전개도도 왕왕 훑어가며 꼼꼼이 읽다보니 그제야 속에 담긴 재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내용보단 해리포터 작가의 차기작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불호가 상당히 갈린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처음 잡고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아도 느끼게 될 것이다. 해리포터의 문체와 이 책의 문체, 그 쪽의 분위기와 이쪽의 분위기,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정서까지 모든 게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해리포터가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오히려 꿍꿍이가 있고 저마다 뒤틀린 속을 가져댄 사람들의 뒤엉킴이다. 문체도 어찌나 다른지(번역자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같은 책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나는 이런 현상을 보고 기분이 매우 좋았는데, 이유는 왠지 '해리포터는 실화를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거며, 이제 캐주얼 베이컨시는 작가 머릿속에서 나온 얘기만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전혀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다'는 상상 때문이었다. 해리포터를 쭉 봐온 사람들이 으레 믿듯이, 나도 어딘가에선 호그와트가 있을 거라고 정말로 믿으니까!

조금 어렵지만 굉장한 소설이다. 당장 하 권을 읽고 싶을 정도다.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있다면, 흐린 날 소파나 침대에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앉아서 꼼꼼하게 읽기를 추천한다. 해리포터처럼 휙휙 지나쳐도 즐길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