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해리스의 전작들을 모두 읽어본 나로선 폼페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전작들에서 현대사를 배경으로 역사+팩션+스릴러+추리소설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로버트 해리스는 이번엔 아득한 고대로 눈을 돌렸다(전작들의 현대사 해석도 장난아니게 치밀한 수준이었는데, 고대까지 파헤치고 들다니 이 정도는 되어야 정통 역사 소설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 소설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로버트 해리스의 전작들이 좋았던 것은 역사를 기반으로 했지만 당최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상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폼페이는 어떻게 해석하려해도 결말을 알 수밖에 없는 작품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뭔가 다르다. 본격적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치밀한 배경설명과 인물묘사를 장시간 곁들이는 로버트 해리스이지만(전작들이 그랬다.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 초반 부분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어느새 이 배경들이 실존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나 할까) 폼페이에서는 속도감을 의식한 탓인지 그 서두가 한결 간결하고 쉬워졌다. 덕분에 어려운 로마인의 이름이나, 고대 문명 용어나 로마사에 대한 사전 압박감도 훨씬 줄었고 초반부터 책 속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것은 로마의 위대한 문명이라는 것, 어릴 때부터 항상 배워오던 바지만, 정말 새삼스레 실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주인공 아틸리우스의 직장이며, 모든 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한 수도교에 대한 묘사는 정말 놀랍다. 항상 가까이 있기에 수도시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위대한 문명의 산물인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사소하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조금은 생뚱맞을지도 모르지만, 이 정교한 수도시설의 내부를 모두 머릿속에 꿰고 있는 아틸리우스를 보다보면 '프리즌 브레이크'가 떠오르기도 한다. ㅎㅎ
화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그 결정적 클라이막스에 이르면, 정말 나도 모르게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화산의 잔해가 도시로 날아오고, 화염 속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이 묘사된 부분에선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흥분되고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솔직히, 정말 사실이다. 책 속에서 이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거기에 현재와 다르지 않은 2천년 전의 사람들. 의도치 않게 '악역(?)'을 맡어버린 암플리아투스는 현재에 태어났어도 아마 큰 부호가 되었을 정도로 현대적인 인물이다. 주인공보다도 더 인상적인 이 캐릭터는 진화하는 역사와 그 속의 인물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을 정도로 개성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플리니우스나 다른 캐릭터들도 배경만 다를뿐, 현재에 그대로 가지고 와도 전혀 손색이 없는 하나의 인간 전형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역사 속에서 찾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역사 속 인물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견디어 왔는지, 여러가지 가능한 답안들을 제시해주니 말이다.
약간은 바쁘게 끝나버린 결말이 조금 아쉽지만, 역시 로버트 해리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작가다. 근래에 읽은 작품 중 가장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화가 된다는 띠지의 문구를 보고 책을 읽으니, 주인공 아틸리우스가 올랜도 블룸으로, 코렐리아가 스칼렛 요한슨으로 그대로 대입되서 읽힌다. 우직할 정도로 성실하지만 젊은 나이인 탓에 자신의 판단력을 여러모로 의심하며 배워나가는 아틸리우스, 꽤 적절한 캐스팅이고 매력적이고 강한 의지력을 지녔지만 시대의 제약 때문에 힘들어하는 코렐리아는 뭐랄까. 스칼렛 요한슨, 좋은 캐스팅이지만 아마도 그녀의 이미지에 맞추어 시나리오는 적절히 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