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364일』,제시카 워먼 ☞하니의 서평 ♪
노앙에서의 스물다섯번의 이야기들
부잣집 차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아담한 롱아일랜드 해협의 동네, 노앙. 그곳에서 실력있는 기업변호사의 딸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배를 갖고 있는 열일곱살의 처녀이다. 처녀? 학생? 아가씨? 많은 수식어들이 있는 나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녀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래가 깔려 있는바닥. 달리기 좋은 흙바닥과 콘크리트 바닥이 적절히 섞여있는 그 동네에서 리즈는 나고 자랐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는 노앙을 자신의 가족과 남자친구가 사는 또한 자신과 비슷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고만 인식할 뿐 그 이상의 애착은 없어보인다. 부를 누리며 사는 도시. 부자들의 별장이 들어서 있는 도시. 아무것도 부족한 것 없는 삶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공통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리즈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살아있을 땐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취급하는 아이였다. 노앙은 분명 문제가 있는 도시였다.
그녀는 예쁘거나 얄밈거나
리즈에게 '신은 언제나 공평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말은 그녀의 삶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모든걸 가지지 못한 자들의 마지막 간절한 바램일 뿐이었다. 길고 살랑거리는 백색의 가까운 금발의 웨이브머리와 마른 몸,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패션감각 까지 그녀의 외양새는 노앙고등학교에서 제일 예쁜 아이이자 인기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아빠, 의자매인 절친, 그리고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패거리들이 모두 친구이고 그 중 자신이 우두머리이며 마약을 팔아서 항상 불만이긴 했지만 모든게 완벽한 소울메이트 남자친구까지! 그녀는 정말 누가봐도 입이 떡 벌어질만한 스펙을 갖춘 아이였다. 그녀의 옆에 서면 너무 빛나는 리즈의 모습에 누구라도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아날리사 앤 벨처, 사랑받은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그의 딸 엘리자베스 밸처
"땅콩버터는 한스푼에 100칼로리나 돼. 지방이 8그램이고." 엄마는 내게로 몸을 굽히고서 말을 잇는다. "자, 리즈. 지방 1그램에 몇 칼로리인지 아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1그램에 9칼로리요." 나는 말한다. 나는 기억나는 대로 읊고 있다. 겨우 아홉살 짜리 딸을, 엄마는 훈련시키고 있다. 엄마는 자신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신경이나 쓸까? 나는 엄마한테 소리를 지르고 싶다. 먹으라고, 살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단 몇 주 후, 엄마는 죽을 것이다.
『열일곱, 364일』,제시카 워먼 中 325쪽
나 역시 알렉스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된 이후로는 먹지도 않고 오로지 달리기에만 전념했었다. 사람들은 그냥 내가 죽은 엄마를 닮아 간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종합해서 생각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더라면 지금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쎄 모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열일곱, 364일』,제시카 워먼 中 435쪽
리사와 리즈, 이 두 모녀는 삶 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많이 닮았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말랐으며, 달리기 선수였다. 또한 남편이자 아빠인 마셜 밸처를 사랑하고 그가 죽음의 직,간접적인 원인이다. 마셜과 리즈의 남자친구인, 리치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니콜과 조시 모녀에 의해 자신의 男을 뺏긴 두 사람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죽고난 뒤 만질수도 말을 걸수도 없고 살아생전 자신에게 친구라고 다가왔던 여자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뺏기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던 그녀들의 다친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야할까.
기억, 그 조각들
기억들이 조각 조각 흩어져서 알렉스와 같이 찾는 장면이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깊었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자신이 몰랐던,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든 사건들과 행동, 그리고 관계들이 얽혀있었다. 리즈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기억해내고 맞췄지만 어딘가 갑갑하고 뭔가 불안해했다. 리즈의 불안함은 알렉스의 죽음의 원인에서 밝혀지는데, 알렉스의 삶 자체가 리즈와 정반대여서(특히 미스틱마켓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소녀와의 일화) 더욱 슬픔을 자아냈다.
달리고 달리는 것,
하지만 달리기를 했던 것은 기억난다. 달리는 동작은 내 뼛속 깊이 새겨져있다. 콘크리트 바닥과 흙바닥을 밟을 때 나던 내 발소리의 리듬이 기억난다. 아침마다 현관문을 나서서 천천히 하이스트리트 끝까지 달려갈 때 서서히 깨어나던 느낌을 기억한다. 출발할 때는 으슬으슬하고 건조하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달리기를 마칠 때는 몸이 땀에 젖고 열이 나고 상쾌한 기분이 되었던 것도 기억한다. 달리기는 마치 마법 같았다. 그것은 고독한 천국이었다. 그리고 내겐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달리기가 그립다.
『열일곱, 364일』,제시카 워먼 中 128-9쪽
리즈는 교내 달리기팀인 크로스컨츄리팀의 일원이며 달리기 대회에서 많은 상을 탈 정도로 달리기를 좋아한다. 본문에서도 리즈가 얼마나 달리기를 좋아했는지 많이 나오고 그녀의 진심 어린 달리기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달리기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애정어린 달리기가 죄책감의 탈출구로 변질된 순간 리즈는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강박 속의 달리기.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삶의 내리막길을 뛰어내려갔다. 리치도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죽음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게되면서.
리즈와의 두시간,
읽는 내내 리즈와 알렉스와 나 또한 동행하는 느낌이었다. 책을 두세번 여러번 읽고 천천히 읽는 스타일이라 아직 웜바디스는 다 읽지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동행이 느껴지는 책이다. 리즈는, 리즈의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삶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그녀의 삶은 슬프면서 기쁘고 완벽하면서 모든것이 부족했다. 무엇이 딱히 부족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리즈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다. 처음엔 얄밉고 알렉스의 말처럼 불한당같고 지배자같았던 리즈의 삶은 파헤칠 수록 충격 그자체였다. 하지만, 이제 리즈의 발은 꼼지락거리기 거추장스러운 부츠로 부터 벗어났다. 그녀는 이제, 달릴 수 있다 마음껏.
H A N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