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첩 <서양미술 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의 그림들

예술 감상을 위한 교양(敎養)

우리들은 흔히 예술작품(특히 그림)을 감상하는 이유로 미 혹은 미적 감수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많은 우리들은 그림 앞에서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당혹감과 낭패감에 당황하고 허둥댔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적 감수성은커녕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흔합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구상 작품마저도 그런 지경이니 난해한 추상의 경우에는 감흥과 감명은커녕 골머리만 아파옵니다.

창피한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상을 보고 바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자연미가 아닌 예술미를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미를 받아들이는 훈련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예술미가 자연미의 모방(mimesis)이라는 고전적 미 개념에서조차 예술미와 자연미의 유사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미적 감수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연미와 예술미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미란 무엇인가? 하는 보다 기초적인 개념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말해 자연미는 느낌, 정서의 차원만으로 접촉할 수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쉽게 향유할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예술작품은 느낌만으로 안 되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1. 따라서 예술작품의 콘텍스트(context문맥), 즉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또 어느 지역에서 제작되었는지, 그것을 그린 화가의 생애는 어떠했는지, 그는 누구와 어울렸으며 어떤 성향을 가졌었는지, 그 예술작품의 일차적인 감상자 주문자는 누구였는지, 상징은 무엇인지 등등 알아야 할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술애호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소리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에게 교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때의 교양이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해 필요한 사전 지식이나 기능을 의미할 뿐이지, 어떤 것과 비교우위에 있는 문화적 경험이나 지적 수준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제 우리는 예술적 미를 감상하고 감흥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라도 예술 감상을 위한 교양을 쌓아야합니다.

그림 속에 있는 것들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인 그림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안에는 시대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인물이 있으며 신화와 문학, 심지어는 정치적 선동과 도덕적 금기, 윤리와 교육까지, 그 모든 것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예술가의 영감과 결합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그것들 중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관람객의 몫입니다.

한가지로 말하면, 필자는 그것을 그림의 이야기성이라 하고 싶습니다. 필자는 그림 속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문화적 양태와 그 변화를 보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한 예술가의 고민을 똑 같이 느낄 때도 있고 그가 살았던 시간의 흔적을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릿한 느낌에 소름이 돋기도 하고 어떤 쾌감에 휩싸여 정신이 어지럽기도 합니다. 바로 제가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과 비슷한 정신적 충격*2을 경험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술 에세이스트 이주헌은 “눈이 흐르는 마음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그림은 그 흐름의 한 순간을 영원한 추억으로 고정시켜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림 속에 이야기가 살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화가의 시간은 멈추어 있고 그것이 관객과 만나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고 미술관을 찾는 것이지요.

그림을 만나러 가는 길-17세기 유럽의 한복판으로

그림 안에 무엇이 있고 그림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교양)가 필요함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교양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책을 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지면에, 그나마 일부분으로 인쇄된 책 속의 그림을 통해 예술적 감흥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저 지식의 습득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 아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화첩을 통한 간접 관람일 것입니다.

보통의 책들보다 큰 판형으로 제작된 화첩의 그림들은 그런대로 예술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오늘 소개할 <서양미술거장전>화첩처럼 그림 중 중심이 되는 부분을 다시 확대하여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경우에는 그 감동의 크기는 작은 책 속의 그것이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전시회의 주제에 맞는 개괄적인 설명과 그림 한 점, 화가 한 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주석은 그림에 대한 개안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화첩이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그 안에는 그림과 함께 거장들의 생애와 시대 역사적 배경, 화풍의 변화와 흐름 등은 물론 그 작품을 그릴 당시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들어있습니다. 해당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의 역사와 작품 한 점 한 점의 소장 경로, 연관된 다른 그림과 화가들, 예술 작품의 분류를 뜻하는 ‘장르’가 어떻게 한 분야의 작품들을 총칭하는 ‘장르화’라 불리게 되었는지 하는 소소한 보충 설명까지 그야말로 그림에 관한 지식의 보고입니다.

한가람미술관의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는 러시아 국립 푸쉬킨미술관의 소장품 중 17세기 유럽의 그림들과 램브란트의 에칭*3 작품 26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1주제 <플랑드르화파:바로크의 장엄한 색채>, 제2주제 <네덜란드화파:시민의 취향>, 제3주제 <이탈리아화파:전통과 스타일의 변주>, 제4주제 <프랑스화파:서정과 로코코의 조화>, 제5주제 <스페인화파:감성과 열정>, 그리고 특별 기획으로 <렘브란트의 에칭 컬렉션>을 볼 수 있습니다.

제1주제를 대표하는 화가는 플랑드르 바로크의 거장 파울 루벤스입니다. 플랑드르는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에 해당됩니다. 17세기 플랑드르는 스페인령으로 오래된 종교전쟁 등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루벤스를 비롯한 거장들이 눈부신 작품을 쏟아내며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채색실력은 회화사에서도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또한 피터르 브뤼헐에서 비롯한 풍속화의 발생지이기도 합니다. 바로 장르화란 풍속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특히 다음으로 보게 되는 네덜란드화파의 풍속화를 지칭합니다.

제2주제인 네덜란드화파를 대표하는 화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렘브란트입니다만 유화로는 <나이 든 여인의 초상> 한 점만이 전시되어 아쉬움을 더합니다. 그러나 이름도 외우기 힘든 많은 당대의 화가들이 네덜란드 화단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러 역사상 최초의 부르주아 공화국을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해서 화가가 왕이나 귀족들의 주문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신흥자본가 계급의 주문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이는 그림 혹은 화가 역시 시장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보여줍니다.

피터르 더 호흐의 작품 <어머니의 손길>에서는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주인공 델프트의 얀 베르메르의 작품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고, 오흐테르벌트의 <생선을 사는 안주인>을 설명하고 있는 에피소드에는 당시 청교도 사회였던 네덜란드의 현모양처상에 신선한 생선을 고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실소를 자아냅니다. 또한 피터르 크로스의 <바다 위의 폭풍> 쪽에 설명된 기독교의 상징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놀라기도 합니다.

그 외 다른 주제들과 많은 전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이 지면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루벤스, 브뤼헐, 램브란트, 프랑스편의 니콜라 푸생이나 프랑스와 부셰, 그리고 수르바난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생소한 화가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화가들 역시 당대에는 커다란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우리를 17세기 유럽의 한복판으로 이끌기에 충분합니다. 화첩에 동봉되어 있는 초대권 한 장에는 미술관 가는 길이 보입니다. 우린 그 길을 따라가 와우! 놀라며 감동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주*1: 예술미와 자연미의 차이를 두는 이런 입장은 딜타이라는 철학자와 맥락이 닿아있다. 딜타이는 철학에서 해석학이라 부르는 영역을 체계화시킨 철학자로 그는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접근할 때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한다.   주*2: <스탕달 신드롬>이란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Stendhal)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성당에서 레니(Guido Reni)의 《베아트리체 첸치》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던 중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기에 적어 놓은 데서 유래한다.   주*3: <에칭>은 동판 위에 질산에 부식되지 않는 초 같은 것을 바르고 그 표면에 바늘 등으로 그림을 새긴(벗겨낸) 다음 질산을 부어 동판을 부식시켜 만드는 판화로 대량 인쇄가 어렵다.

‘한스 기벤라트’를 처음 만난 때로부터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 그것은 그가 떠난 지도 30여 년이 흘렀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깨알 같이 작은 문고판 속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옅은 금발에 찌푸린 표정, 야윈 몸집을 가진 이방인이었다. 몸은 수척해보였고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가끔씩 두통에 시달리는 듯 자주 고개를 흔들며 때로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내게 별로 관심을 끌만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린 금세 친해졌다. 무엇보다 같은 또래였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도 나처럼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불안해했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그 막막함이 주는 중압감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우린 시험과 성적, 그리고 그것들이 보장하는 미래가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어른들의 충고만을 따르도록 교육받아 왔다는 점에서도 똑 같았다. 좀 나은 성적에 우쭐해하거나 누군가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칭찬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자란 점에서도 우린 닮은꼴이었다.

닮은 점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별로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를 둔 것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으로 늘 외로움을 겪으며 자라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풍족하지 못한 가정 형편쯤은 우리 또래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우리를 운명과도 같은 사이로 맺어준 것은 이런 외적인 닮음이 아니었다. 우리의 만남이 극적이었던 것은 그도 나와 똑 같은 영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어찌할 바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장래의 불안 때문에 점차 병들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스가 내게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는 울창한 검은 숲이 있고 전원적인 풍경의 시골마을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몸집 큰 사내였으며 장사수완도 어지간하여 “황금을 숭배하는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재능 있는 아이”였다.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그 아이는 이내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자기 자신과 교사들의 자랑거리가 된 뒤로 약간 교만해져 있었다.”

마을의 많은 사람들과 목사, 그리고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그가 당시 인재들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던 주 시험에 합격하여 장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 신학교는 지금의 대학처럼 신학 철학 대수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의 높은 학문과 깊은 연구가 행해지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그 안에서 배우게 되는 금욕적인 삶의 자세는 고매한 인격수양을 보장해주는 것이라 믿어졌다. 한스는 마을 모두의 자랑이었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다.

신학교에는 각지에서 온 출신 이력처럼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고 한스는 그들 중에서도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친구였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 많은 학문 분야에서 촉망 받는 젊은이가 분명했다. 또한 스스로 그 기대를 증명이라도 하듯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시골 마을의 우물 안 개구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질풍노도의 시기가 다 그러하듯, 그에게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하는 ‘회의’가 찾아 들었다. 이러한 의문은 곧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때마침 그의 눈에 같은 방의 친구 ‘헤르만 하일러’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완고한 신학교의 규범과 생활을 별 불만 없이 감수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언제나 자유분방한 자신의 자아를 이야기했고, 기성의 속박과 강제에 대하여 강한 거부와 저항의 몸짓을 내비쳤다. 그는 새장의 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했다. 성경이나 고전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주석 다는 일에 보내야 하는 신학교 수업은 그에게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그는 시를 썼고 신학교 생활이란 인간의 영혼을 속박하는 한낱 무가치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 방이 헬라스라니! 이건 정말이지 웃음거리라구. 어째서 <쓰레기통>이나 <노예감옥>이나 <비단 모자> 따위로 부르지 않는 거지? 고전이라고 불리는 건 모두 허튼 수작에 불과한데 말이야.”(108쪽)

처음부터 한스가 헤르만 하일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한스 역시 그가 좀 특별한 반항아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연한 그와의 산책 이후로 한스는 점차 하일러에게 빠져든다. 아니 하일러가 보여주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타나게 되는 어두운 충동과 목적 없이 넘쳐흐르는 젊음의 열기, 예감, 욕망 등에 한스 자신도 전염되고 만다. 시인 하일러의 감수성이 한스에게는 진정한 삶의 행로에 대한 불안과 의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한스에게도 신학교의 수업이나 시험 성적 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또 다른 세계로 떠나가듯이, 성적이나 시험이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의 순결이나 오욕에 의하여 인간이 평가되는 그러한 세계로” 한스의 영혼은 나아가게 된다. 소년 시절 그를 지배했던 공명심과 명예심 따위는 자신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오히려 버려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하물며 제 영혼의 지배자처럼 되어버린 하일러가 퇴학을 당해 신학교에서 사라진 후로는 한스에게도 신학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둔 감옥일 뿐이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의심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본문 72쪽)한다. 한스는 그런 학교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의 몸과 마음은 점점 말라가고 이윽고 신경쇠약에 이른다.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받았던 이 불운한 천재는 다시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기차가 고향 근처의 숲을 지날 때 그는 지금껏 잃고 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깨닫는다. 그 그리움은 단순한 정신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 앞에 놓인 삶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한스는 라틴어와 역사, 그리스어와 시험, 신학교, 그리고 두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동화책도 있었고, 도둑 이야기가 적힌 책도 있었다……. 일 년 내내 한 달에 한 번꼴로 애타게 기다려지던 일들이 있었다. 풀을 말리는 일, 토끼풀을 베는 일, 첫 낚시질에 나서는 일……. 그리고 곡식 타작을 시작하는 일 등이었다. 그 사이에도 틈틈이 즐거운 일요일과 축제일이 있었다.”(본문 185쪽)

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잃어버린 시간과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완전히 동의했다. 그로부터 그와 나는 들판을 뛰어놀았고 그의 방에 들러 은밀한 서로의 고민을 주고받았다. 나도 모르게 그동안 내 소년 시절을 짓눌러왔던 시험과 성적 같은 것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다. 침침한 스탠드 불빛에서 병들어 가던 내 영혼도 한스가 거니는 산책길의 밝은 햇살을 받으며 점차 건강해져 갔다. 그가 기계공이 되기로 결심하고 서투른 망치질에 물집이 잡혔을 때 나 또한 손이 쓰렸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집에 힘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짧았다. 우리의 행복한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일요일 한스는 견습공 생활을 마친 친구와 소풍을 갔고 거기에 따라 가지 못한 나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기계공이 되기에 아직은 힘줄이 약했던 한스는, 그렇다고 다시 신학교로 돌아 갈 수도 없었던 한스는 술을 마셨고 취한 가운데 나약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모욕을 당한 기분을 느꼈고 너무도 낙심하여 처참하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다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기에 한스는 너무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눈빛이 무서웠을 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기에 한 때 한스를 격려하고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주던 많은 눈빛들이 이제는 경멸과 실망의 눈초리로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쉬고 싶기만 했을 것이다. 그 나이의 소년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쏟아지는 관심은 때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일 때도 있는 법이다.

그는 그렇게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한스를 오래도록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를 따라 죽기에 나는 너무 용기가 없었다. 아니 그것은 한스가 내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 혹은 삶의 지혜가 아니었다. 한스는 우리 모두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진정 가치 있고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설렘으로 다가온 첫사랑 엠마가 아무 말없이 떠났을 때에도 그가 다시 새날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 남은 날들을 알려준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한스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었듯이 하일러 역시 분열된 한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나는 한스의 이야기를 통해 어쩐지 그는 헤세이기도 하고 하일러이기도 하고 그 나이 또래의 우리 모두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가 삶이라는 수레바퀴 아래 깔린 달팽이로서 창백한 젊음의 시간 속에서 신음하다 죽어갔다면,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 수레바퀴에 깔릴까 전전긍긍하는 달팽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늙어버린 옛 친구를 위해 그는 여전히 청년 한스로 남아 내 아이에게 중요한 삶의 비밀을 들려준다는 것이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 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본문 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