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선배를 만난 건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그때 나는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나쁜 공기, 너무 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물론 교정의 초목과 잘 식은 봄밤 공기는 가슴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자기방어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의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다.
번식기의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 싱싱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맘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리고픈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안 들어가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내고 있단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숨은 그림을 찾아낸 듯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거기, 어두운 인문학관 통로에 선배가 있었다. 복도 끝 굽이진 곳에, 길고 흐린 실루엣으로. 화장실에 들른 건지,
잠깐 사물함에 뭘 확인하러 온건지는 몰랐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너, 미영이지? 일학년 서미영."
"예? 예."
나는 선배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단 사실에 놀라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근거가 내심 불안했다. 혹 내가 뚱뚱해서 눈에 띄었나 싶기도 하고,
또 조금 전 진실게임에서 아주 지저분한 농담하나를 실패하고 온 참이기도 해서였다.
"운산에서 왔다며. 우리 아버지 고향이랑 같아서 기억했어."
"아, 네."
"왜 혼자 있니?"
"아, 저, 그냥, 뭣 좀 생각하느라고요."
형편없는 핑계 때문인지, 내가 눈을 심하게 깜박여서 그랬는지 선배가 가만 웃었다.
"없어서 찾았어. 그럼 이따 보자."
나는 엉거주춤 목례한 뒤 그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잔디밭으로 돌아가다 몇 발짝 안 가,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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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아, 이 녀석아…… 친근한 표현인지, 성(性)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이었는지는 모른다. 선배는 나를 곧잘 '녀석'이라
불렀다. 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어쨌든 일 분도 안 되는 시시한 만남이었지만, 준이 선배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내 머리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