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추리소설은 처음인데 만족스럽게 쭉 읽었다. 

뤼페이, 링밍딩, 구다펑, 구판판, 천자신...  처음에 낯설었던 중국 이름이 시간이 지날수록 친근해졌다. 개인적으로 일본 이름보다 중국 이름이 더 매력있고 기억에도 남는다.

뤼페이 형사 시리즈물이고 뤼페이란 인물이 매력적이다. 작가 주하오후이는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몰입도 면에서 비슷하고 그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최상위 기술의 최면술사들 사이서 최면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묘하고 치밀하며 충격적인 사건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뤼페이 형사의 활약을 즐길 수 있다. 

최면이란 것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고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나 몽롱하게 만들어서 맘대로 조종하는 가벼운 코미디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일반인들을 최면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면.

 

룽저우의 어느 거리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친 운전자의 얼굴을 좀비처럼 물어뜯다가 경찰에 쏜 총에 맞아 죽는다. 다음 날 비둘기 먹이를 주던 한 남자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인터넷에 두 사건이 고의적인 최면술과 관련이 있다는 글이 올라오고  범인이 곧 개최될 룽저우의 최면협회에 참석할 것임을 알린다. 뤼페이는 후배 경찰 천자신과 함께 협회 회장이자 최면의 권위자 링밍딩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을 읽자마자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겟아웃이 생각났다.

상대가 찻잔을 두드리면 주인공의 정신이 심연의 나락에 떨어져 최면상태에 빠지는 엄청 극적인 장면이다. 그가 최면에 걸리기 전에 피최면자가 그에게 그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주인공에게 엄마의 죽음이 그의 심혈이었고 이 책에서도 사람들이 최면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이자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네, 심혈이요.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속에 난 구멍이죠. 최면술사가 상대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해요. 훌륭한 최면술사 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바로 상대의 심혈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누구에게나 심혈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쉽게 드러나느냐, 깊이 숨겨져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사람의 심리적인 급소를 발견하기만 하면 최면걸기가 쉬워진다. 탐욕, 컴플렉스, 상처 등...책에서는 그의 생명줄을 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최면자가 상대 지시에 따라 쉽게 잠에 빠진다면 그에게 잠이 필요한 점을 간파당한거고 현재가 행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거로 이끄는 게 쉬운 것처럼 말이다.

링밍딩은 심교술, 사람의 심혈에 다리를 놓아주는 심교술을 주장하고 그와 대립하는 바이야싱은 심혈을 폭파하는 폭파술을 주장하지만 문제는 심리치료를 위한 최면술이 사악한 의도로 쓰이는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좀비 게임과 영화에 빠진 남자가 스스로 좀비라고 믿게 만들고 평소 비둘기의 자유를 갈망하던 남자를 본인을 비둘기라고 여기게 해서 뛰어내리게 하는 것은 빙각의 일각이다.

최면의 대가들이 각자의 극단적인 신념으로 최면술을 악용하고자 할때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들이 터져나온다.

천만명, 일억명을 상대로 집단 최면으로 죽음을 종용하는 의도를 간파해 낸 뤼페이는 반전의 범인을 찾아낸다.

 

최면의 대가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최면을 걸고 속고 속이는 과정이 속도감있게 전개된다.

어찌보면 심오한 이야기다. 최면은 책 한권을 통해 티비의 어느 프로를 통해서도 건드려질수 있다. 티비나 책이 일종의 최면도구 일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심교술도 폭파술도 허점을 드러내며 무참한 실패로 끝나고 혼란한 주인공들은 사람의 심혈은 어떻게 메울 수 있나, 일종의 치유가 가능하기나 한가 묻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최면이 특수한 무엇이 아니고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1980년 작품인데 현재에도 어느 가정에서 이웃이나 혹은 우리에게서 보여지곤 하는 미풍양속이자 모순을 그리고 있다. 

여자에게만 가혹하게 요구하는 의무와 희생의 굴레를 중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굴레와 속박이 과연 정당한지, 아무 말없이 묵묵히 따라야하는게 맞는 건지 청희의 삶이 온몸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읽는 사람의 대답은 자연스레 하나가 나올 것이다.  

이런 주제가 10년만 더 빨랐더라도 설득력이 덜했을 것같다.  80년은 경제가 막 부흥하기 시작한 때로 지금과 별 다름없는 계층과 욕망이 들끓었던 시기였음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절실한 욕망으로 청희의 미용실로 모여드는 중년여성들, 상위 과외 그룹에 끼기 위해 소위 돼지엄마에게 아부하는 방여사와 청희 등,,,,

주인공 문청희는 신흥 주택가에 사는 중산층 40대 여성으로 미용전문학원 원장이다. 그의 남편 말에 따라 날치는 여자다.

전임교수인 남편의 부족한 월급을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면서도 치매 시어머니 송부인을 수발든다.

밤마다 둘 사이에 끼어 자는 송부인 때문에 밖에서 따로 만나 잠을 자야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청희는 자신의 샵에서 마사지를 받는 고객이나 과외조직 본부로 끌고가는 방여사 등에게 시선이 곱지않다.

안팎으로 트집잡을 것 없음에도 남편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자신에게는 더욱 자조적이다.

오히려 돈벌어다 주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보다 아내의 날치는 바깥 생활을 용인해주는 인철은 시종일관 청희 앞에서 관대하고 송부인의 치매마저 위세당당하다.

반대로  군소리 없이 20년 간 시어머니를 모신 청희와 달리 장모를 모신다는 아니꼬움과 위세를 대놓고 떠는 인철과 평소 기세좋은 친정엄마 역시 딸 집에서 죄인심정으로 말년을 보내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자기 주장을 조금만 내세울때마다 여자로써 매력없다는 말로 청희를 조련하고 남편 마음에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신에 신물이 난다.

청희가 관심을 갖는 새까맣고 작은 딸또래의 미용실과 살림집에서 부리는 옥희는 선의를 베푸는 청희에게 도도하게 맞붙는 재밌는 캐릭터다. 작은 몸집의 옥희에게 3명의 장정인 세 오빠가 들러붙어 기생하고 있는, 부조리한 짐을 진 같은 여자로써 공감하고 있다. 

인철이 옥희를 건드렸을때도 청희는 옥희 탓을 하지 않고 반성없는 인철에게 마지막 정나미가 떨어지고 만다.

남편에게 잠시 나가 살 것을 요구하고 놀란 남편을 뒤로하고 처음 떠난 홀로 속초행 기차에서 결국 살갗이 벗겨지는 듯한 피맺힌 눈물을 닦으며 끝난다.

'한국은 노인들의 유토피아죠'  인철이 출연한 토론대담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37년 년전만 해도 자식들이 당연히 모시며 노인이란 이유로 공경받으며 지나가는 아이를 혼내는 권위까지 갖고 있었는데 지금의 노인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것 같다.

반대로 맞벌이 하고 능력있는 여자가 살기 좋아졌고 시어머니보다 친정엄마를 더 챙기는 딸들이 많아진 요즘이다. 또 남자란 이유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남편들도 어딘가엔 있겠지만 대체로 그런 풍속이 사라졌다.

꼿꼿한 시선으로 날카롭게 현재를 뚫어보는 작가님의 개성이 낱말과 문장마다 재치있게 숨쉬고 있다.

여자를 해방시키는 시원한 주제이지만 그 방식이 불편하지 않다.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그 과정은 꽤 길다. 소설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일기이자 변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트렌디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