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어떤 먹먹한 절망도, 아무리 뜨거웠던 분노도, 부당함도, 어이없던 어리석음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쉽게 잊어왔다.

 

시간이라는 편리한 포장지는, 소프트하지만 성실하게 오래 묵은 것들을 무채색으로 또는 알록달록한 빛으로 덮어 왔다, 아픔을 털어내라고, 이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라고 어깨를 톡톡 친다. 망각은 확실한 격려지만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그렇게 점멸하다가 희석되고, 그리고는 살아 남아 강화되어 몸 속 깊숙이 각인되는 것이 바로 오래된 상처이다.

 

나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바로 나온 인터뷰책(오연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부터 최근의 포토에세이(장철영,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까지 추모와 안타까움, 인간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담긴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 이 책 '오래된 생각'은 내가 읽는 윤태영의 네 번째 책이고, 첫 번째 소설이다.

 

나에게 소설에 대한 평론가적 소양이 있을 리 없다. 어설프게 평가하건데, 이 책은 일반적인 소설작법에 불충실해 보인다. 형식,기교도 부족하고, 구성도 허술하다. 복선,암시도 치밀하지 못하고, 묘사와 비유, 감정흐름, 긴장감과 일관성도 인상적이지 않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명작이나 대작, 혹은 괴작이라도, 주목받을 문제적 소설이 될 확률도 극히 작다, 라고 나는 내멋대로 생각해 봤다. 나의 이런 부당한 악평에 대해, 비전문적인 지적에 대해, 작가는 크게 마음상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약간 뻔뻔한 변명이지만, 나는 오래된 독자이므로...

 

하지만, 작가는 상상력의 극적 표현보다는 현실의 한계, 현존 인물에 대한 자기검열, 기술의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 그리고 지난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에둘러 탄식하는 방법으로 (사실 4할, 상상 6할의) 팩션을 선택했다, 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약간 아이러니하지만, 소설적 화법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통해 도리어 현장감, 설득력, 그리고 주장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택한게 아닐까? 이런 영리한 선택을 통해 아쉽고 억울했던 과거를 담담하게 돌아보고, 야비했던 적들과 비겁했던 아군을 소설적으로 공격한 셈이다. 이 또한 오래된 전술일 것이다.   

 

이 책이 의외의 Page-turner 소설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 생생한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흥미진진한 살아있는 소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명되진 않아도, 한명숙, 이병완, 전효숙, 김근태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자동적으로 10여년 전의 기억과, 좋든 싫든 그 때의 향수가 아련하다. 

윤태영을 생각하면, 뭔가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항상 같은 표정(무표정의 표정)으로 필요한 곳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다. '이대근'형 돌쇠보다는 '홍반장'형 돌쇠-약간 과묵했던, 동네 형같은 이미지. 그래서 그는 실제 마징가제트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리고는 요즘같은 시대, 더 필요하고, 아쉬움만 남는, 내 마음속의, 우리 대통령, 오래된 바보...  

 

작가의 등단을 축하한다. 처음 보는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기사를 봤는데, 괜히 내 마음이 후련해졌다. 작가와 나는 아무 친분이 없지만, 오래된 내 빚을 다 갚은 느낌이다. 사실 누구보다도 작가가 가장 괴롭고 아팠을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이 소설은 탄생했을 것이고,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그리고 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높이 평가한다.

책에 여러번 인용되는 송창식의 '잊읍시다'를 애써 찾아서 거듭 들어보았다. 78년의 노래이니 이 또한 오래된 노래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작가서명본'을 받았다.

작가는 지난 달 언제쯤인가, '지금 내가 가진 책'의 표지를 넘겼고, 잠깐 응시하다가, 왼손으로 표지를 누른 자세로 비스듬히 오른손으로 사인을 하고, 심호흡을 한 후, 마침표를 찍었다. 아마도 '지금 내가 가진 책'을 위해 작가인생 10초쯤을 소비했을게다. 10초는 좋은 문장 하나를 생각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직업소설가에게는 근사한 단어나 멋진 표현쯤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 리뷰를 쓴다.

 

한참 전에 읽은 '칼의 노래'는 왜인지는 몰라도 당시 삼국지 같은, 그러니까 어쨌든 무작정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그러다가 그 얼마 후 '우리 대통령'이 가장 난처하고 무기력했을 때, '칼의 노래'를 읽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당시 대통령을 위로한 것이 충무공이었을까 김훈이었을까를 생각해봤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읽었던 '남한산성'도 책을 잡은 이유와 책장에 다시 책은 꽂아 놓는 느낌이 '칼의 노래'와 비슷했었던 것 같다. '와~'도 '휴...'도 아닌 애매한 회색빛 감동, 고통속에서 씌어졌으므로(라는 상상으로), 나도 힘들게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 독자에겐 그런 작가도 있는 법이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남에게 얘기하지는 않지만, 장편이 나오면 독서리스트에 일단 넣고 나서 생각하는...   

 

'공터에서'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음악에서는 Tone_음색이라고 하는 것이 있듯이, 소설에서는 문체와는 조금 다른, 작가의 지문, 작가의 호흡같은 것이 일관되게 단어와 표현과 문장 속에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지문이 미묘하게 글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표지를 가려도 일본작가와 북유럽작가를 확률높게 골라낼 것 같은 자신이 있다(물론 실패한다면 번역탓을 할 것이지만). 

 

김훈은 선명한 지문을 가진 작가다(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칼의 노래', '남한산성', '공터에서'(적고 보니 모두 4자의 제목, 현의 노래, 공무도하?)는 일관된 분위기의 무거운 긴장이 이어지고 유사한 느낌의 몰입을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김훈의 지문이다. 그리고 그 지문으로 김훈의 글은 쓰여진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영웅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없이 쫒겨다니는.."

 

'공터에서'는 근현대사라는 무거운 시대를 힘들게 관통하는, 지쳐가면서 읽어나가야 하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마동수와 마누니가 현실에서 나의 아버지와 내 딸로 느껴져서 흠짓 놀라기도 했다. 소설에서 '암살','국제시장'같은 영화도 떠올라서 헛헛하게 웃기도 했지만, '우리가, 우리 부모가 참 힘들게 살아왔구나. 힘들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소중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해 봤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격려와 위로를 주는 것이 또 김훈의 힘이다.

 

진지하게 작가의 단편을 찾아 읽어야 하나, 아님 가볍게 작가의 에세이나 여행기를 읽어야 하나를 고민해 본다.

 

"어쨌든 그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우리가 희망과 인내를, 최소한 약간의 지성을, 상당한 아량을 그리고 우주와 접촉하고자 하는 뚜렷한 열의를 지닌 종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끝나는 시와 댓구를 이룰 수 있는 '結詩'가 있다면 적당하게 어울릴듯한 문구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읽으며, 흡사 '오래된 LP박스' 같은 책을 덮었다.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한참동안 내 손에 남아 있다. 양장본이 주는 매력만은 아닐 것이다.  

 

신간추천 과학도서로 크게 추천되고 있는 책이었지만,

칼 세이건이 쓴 마지막 작품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고, 이미 오래전에 읽었으며, 어차피 작가가 별이 되어 하늘로 떠난지 20년이 다 되었으니,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짜깁기'와 '공저자 이름팔이'하는 중간 쯤에 있는 책이려니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 책장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멋진 표지제본과 그럭저럭 신뢰할만한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한 책이다. 그리곤 어정쩡하게 3~4일 내 책상 위 구석에서 자리를 못 잡고 있던 책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리고 조금 흥분되게도, 이 책은 1978년에 쓰여진 책이고, 한국어판은 거의 40년이 지나 이제야 초판 1쇄가 나온 책이다. 그 사이 다른 한국어 본이 있는지, 별도의 영문 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간단한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다. 최신판이지만 득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우주이야기와 칼 세이건과 보이저는 책을 펴자마자 판권면만으로도 기대를 충분히 올릴 수 있게 만드는, 들뜬 뭔가를 가지고 있나 보다.

 

그런데 사실 페이지를 넘겨보면, 이 책은 '어떤 이벤트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가 큰 책이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어쩌면 가볍고 부차적일 수 있는 사건을, detail을 중시하는 서양인들 특유의 꼼꼼함으로 그 배경과 의의, 고민과 경과를 진지하게 담아내어 훗날을 위해 성실하고 생생하게 증언한 잘 쓰여진 보고서같은 책일 수 있다. 

 

건조한 보고서로 보더라도, 40년 전의 보이저계획과 발사, 그리고 '지구와 지구인과 지구인의 역사와 그 성취의 메시지를 담은 골든레코드 제작'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교훈적이고 감동적일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갈무리하여 누군가에게 전하는 이 상상은 아마도 보이저 계획 전체에 있어 보잘 것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잘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 분석하고 알아가는 과정, 우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들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는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하여 집단지성을 모아가는 과정은 다분히 비생산적일 수 있지만, 따져보면 엄청나게 가치있는 일이다.

 

사실, 그 메시지는 1) 혹시라도 우주공간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 문명에게 2) 또는 먼 훗날 보이저를 회수할 계획을 세우는 우리 후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타임캡슐같은 목적을 지녔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을 만드고, 지켜보고, 응원했던 지금의 우리 호모 사피언스를 위한 작업이다.

 

우리 하나하나는 우주적으로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가 쏘아 올린 40년전의 우주선은 지금 200억 킬로미터를 넘게 달리고 있으며, 아직도 1초에 15킬로미터씩 우리를 뒤로 하고 미지의 세계로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금박을 씌운 축음기용 구리 레코드판'에 우리가 지나온 다큐멘타리를 담아 따뜻한 스토리텔링을 기다리고 있다. 이 동화같지만 분명한 사실을 이 책은 담담한 현장의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만든 이 작은 역사는 멀리 떠나가고 있지만, 아마도 다시는 못 보겠지만, 우리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오만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또한 이 우주에 작은 것은 무엇이고 큰 것은 무엇이냐고 철학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크게 위로받았고, 10억 년이라는 타임스케일을 견뎌내도록 디자인된 한장의 레코드 앞에서 나는 위대함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