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세기 후반에 들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독일문학 작품은 몇 안 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출간되자마자 33개 외국어로 번역되었는가 하면, 한 무명의 독일작가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 있다. 바로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향수』가 그것이다.‘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은 언뜻 보아 탐정소설로 여겨지기 쉬우나, 책을 읽어 가다보면, 통속적인 살인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니라, 잘 짜여진 심리소설이자 성장소설이며, 나아가 교양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 장 밥티스트 그르누이의 불운하고 비극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무대는 18세기의 프랑스 파리로 주인공 그르누이는 온갖 오물로 가득한 생선시장의 쓰레기통에서 핏덩어리로 세상의 빛을 처음 보게 된다. 그의 생모는 영아살인죄로 그가 태어나자마자 형장의 제물로 사라지고, 사생아 그르누이는 여러 명의 비정한 대리모를 전전하며 유아기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추한 얼굴생김새와 곱사등으로 인해 타인들로부터 결코 호감을 받지 못한다. 비천한 태생과 추
한 생김새로 인해 장차 세상이 그를 반기지 않을 것이며, 그 또한 세상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못할 것임을 독자는 예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그르누이를 하늘은 냄새에 대해 천재적인 능력 가지고 태어나게 했다. 단 한 가지 결점은 모든 사람들이 몸에서 나는 각자의 냄새 즉, 체취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정작 그 자신 스스로는 냄새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르누이는 세상이 자기를 좋아하게 될 비상한 향수를 만들어 그 냄새를 자기의 고유한 체취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만들기 위해 향수제조로 유명한 프랑스 도시들을 전전하며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의 천부적인 후각이 발견해낸 지상 최고의 냄새는 바로 처녀들의 체취였다. 그토록 원하든 신비의 향수를 제조해 내기위해 그는 무려 26명의 처녀를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살해된 처녀들의 표피로부터 빼어낸 체취를 조합하여 그는 드디어 지상 최고의 향수를 발명해 낸다. 스스로 제조한 이 신비한 향수를 몸에 뿌리고 그는 세인들 앞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자 그는 언제 어디서든지 세인들로부터 호감과 사랑을 가득 받게 된다. 그가 만들어 낸 이 지상 최고의 향수는 군중을 열광케 하고 심지어 광적으로까지 변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제 그가 그토록 원하든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작가 파트릭 쥐스킨트는 바로 이러한 정점에서 주인공 그르누이가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서른이 채 안되는 젊은 나이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소설을 종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광적인 집착증을 가진 비정한 한‘살인자의 이야기’속에서 인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몇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 그르누이는 그가 가진 특이한 후각능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인식론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주위의 세상을 관찰하고 인식하는 기관으로 눈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르누이는 눈이 아니라, 코로 모든 사물과 주위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며 판단한다. 즉, 시각에 의한 이성적 인식이 아니라, 후각을 통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내면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바로 후각이 주인공의 인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처럼 그르누이의 인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적 직관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소설이 전개되면서 이처럼 단편적으로 형성된 인성이 개인은 물론 사회전체에 얼마나 커다란 위험이 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위험은 바로 주인공으로부터 발산되는 죽음을 동반하는 파괴적인 힘이다. 그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비운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를 낳아준 생모는 물론, 그를 돌봐주는 대리모와 가톨릭 신부, 그리고 그에게 향수제조법을 전수한 장인까지 모두 비참하게 죽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러한 주변 인물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성장한다. 이들로부터 경험하는 것이라고는 냉대와 철저한 소외일 뿐, 따뜻한 인정은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다. 그런데 자라나는 아이가 이러한 인정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가정이라는 온화한 울타리 안에서 아이는 자기를 돌봐주는 엄마를 중심으로 주위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아이가 느끼는 사랑과 신뢰는 인성발달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주위 세계와 긍정적이며 창의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성의 토대는 바로 이 유아기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그르누이는 이러한 사랑과 신뢰는 전혀 맛보지 못하고 성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을 피하고 싫어하며, 결국에는 인간을 증오하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주위 세계와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은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렇게 볼 때 합리적 사고와 직관적 사고의 조화는 물론 신뢰와 사랑에 의한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보다 원만한 인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케 한다.
마지막으로 향수가 지닌 속성을 중심으로 인성과 관련된 개인의 정체성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향수는 타인으로부터 호감과 사랑을 받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타인으로부터 구하고자하는 이 호감과 사랑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확인 받고자하는 욕구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속한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적절히 인정받을 때에 안정적인 것으로 된다고 한다. 그런데 주인공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한 인간의 정체성으
로 상징될 수 있는 몸의 체취를 지니지 않고 태어났다. 이것은 바로 그르누이에게 있어서 정체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결손을 보완하기 위해 그만의 독특한 향수를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러한 신비로운 향수를 제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향수는 피상적인 효능만 발휘할 뿐, 애초부터 공허했든 내면의 정체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임을 그는 깨닫게 된다. 결국 주인공 그르누이는 그동안의 성장을 통해 형성하지 못했든 인성적 가치관과 정체성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그에게는 오직 죽음에 이르는 허무만이 남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이외에도 살인자이자 천재이며, 동시에 예술가인 비운의 주인공 그르누이의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성을 고양시키고, 계발해야 할 이유와 관점들을 더 찾아내어야 한다. 새로이 시작한 21세기가 물신주의와 몰이성주의, 그리고 경박한 피상주의와 파괴적 이기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욱 그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