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책을 받아들고 '역시나'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요즘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얗다 못해 눈 부시게 희고 두툼한 책장과 넉넉한 여백, 눈이 나빠도 돋보기 없이 읽을 수 있을 법하게 큼직한 글씨, 겉장에 또 겉장을 덧대거나 아예 양장본으로 내용 때문이 아니라 겉장 때문에 소장해야 할 것 같은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르스름하고 얇은 -내 생각엔 좀 더 노랗고 얇았다면 더 친환경적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책장과 한 장 '뿐'인 겉장으로 400장에 가까운 페이지에 여백에 인색하고 내용을 채워 넣은 이 책은 일반적인 책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훨씬 가볍다.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취한 책이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는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칼날을 무자비하게 휘둘러대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신의 소멸을 지향하는 운동인 페미니즘 (8쪽)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내용을 담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페미니즘을 논하고자 경제(자본)을 얘기하고 국가 폭력과 가부장제도, 인권과 교육을 얘기한다. 또한 가족과 모성을, 뷰티산업에 의해 연출되고 프로젝트화되는 몸과 그에 따른 계급화를 얘기한다.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체면, 인정, 나이에 따른 계급화를 얘기한다. 페미니즘 문학과 유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과 연관될 수 있는 모든 것들-흔히 우리가 간과했거나 무의식 중에 간과하고 싶어했던 디테일들- 을 다룬다. 그 내용이 너무도 방대해 지은이의 박식함에 고개가 숙여지기보다 나 자신의 무식에 소심해질 수 있을 법하다.

 

피를 빠는 행위를 통해 타자를 삼켜야 존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채식으로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는 과연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가? 이 명제를 임옥희는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고 문제점을 짚어낸다. 한 줄 한 줄이 지은이의 폭넓고 선입견없는 사고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지만 다각적인 고찰로 인한 내용의 방대함이 자칫 산만하게 느껴지거나 논제의 방향성을 흐리기도 한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인간성과 도덕성 파괴가 갈수록 심해져 실업률은 물론 자살율이 높아지고 삶의 질과 만족도가 떨어지는 한국을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책장을 펴기 전에 다른 잡념은 모두 한 옆에 치워 놓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성당 마당에서 낙태반대서명을 받는 것을 보았다. 로마 교황청은 해가 바뀔 때마다 또 교황이 바뀔 때마다 낙태는 명백한 살인행위라는 카톨릭교회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페미니스트와 인권운동가들은 강간 등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여성의 인권침해와 삶의 결정권을 들먹이며 낙태옹호입장으로 맞선다.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한 국은 출산율이 낮기로 세계 1위를 다투는 나라다. 한 가정에 1명이 조금 넘을 정도로 낮은 출산율을 자랑한다. 과도한 사교육비와 물가로 아이를 키울 경제적 능력과 정신적 여유가 젊은 부부들에게는 사치에 가까운데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들의 이기주의가 출산율을 밑으로 끌어당긴다.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 되어 간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고아수출국이다. 단일민족을 외치며 다문화가정의 문제점을 토로하고 한국인이 기피하는 3D직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한국인들이 정작 자신들의 아이들은 키울 수 없다며 외국에 수출하는 것이다.

Love Child: [명사] 사생아

사랑과 아이라는 착한 단어들이 만나 사생아라는 나쁜 단어를 만든다.

앳돼 보이는 소녀가, 파혼당한 처녀가, 육아 휴직이 곧 실직으로 이어질까 두려운 직장 여성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남편의 아내가ㅡ 여자만 낳았던 여자가...끝없이 우리를 뱉어냈다. (10쪽, 245쪽) 이 잔인한 한 문장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김현영의 질책을 뜨겁게 느낀다. 서구사회에의 동경과 사대주의가 빚어낸 청소년의 비윤리적인 성의식,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혼율에도 그 책임을 사회적 약자인 여자에게 묻는 양성불평등, 낮은 출산율과 사회 고령화를 앞당기고 여성들의 사회참여율을 낮추는 견인차인 육아 휴직, 그것은 실직의 다른 이름이었다. 일일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과 빈곤층에 대한 복지정책의 부재,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여자에게 떠넘기는 왜곡된 유교사상.

김현영의 소설 <러브 차일드>에 묘사된 미래는 참혹하다.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디자인된다. 철저하게 비인간적이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이는 가상의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  우리는 정녕 이런 미래를 향해 이리도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아나가고 있는 것일까?

쓰레기에 의한 (의료폐기물로 분류되는 낙태아들), 쓰레기를 위한 (생애전환기 검사를 통해 폐기물로 처리되는 노인들), 쓰레기의 (우리들 자신) 소설이다.

생소하다 싶었던 프랑스 작가 필립 그랭베르. 그의 신작 <악연>이 이리도 빨리 한국에 번역된 것은 바로 그의 전작 <비밀>의 성공에 힘입어서였을 것이다. <비밀>은 흥행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동명의 영화로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했었다. <악연>의 작가 프로필을 읽고 나서야 나는 '아하!'하고 숨을 들이 쉬었다. 이  정도의 흥행작을 써냈으니 신작이 이처럼 빨리 번역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싶었고 올해 서울 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이 프랑스였던 만큼 기회도 좋았을 것이다. 작은 체구에 보색으로 눈길을 끄는 묘한 느낌의 표지는 벌써 악연이라는 제목과 함께 웃으며 읽을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악연>은 두 소년의 우정이 소재이자 주제다. 두 소년 외의 등장인물이 있긴 하지만 소설 첫 머리에 밝혔듯이 그저 스쳐가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파리의 한 공원에서 만난 두 소년은 첫 눈에 운명적 만남을 느끼게 된다. 이태리 이민가정의 아들이며 키가 크고 매사에 열정적이고 극단적인 성격을 보이는 만도. 그리고 바쁜 엄마를 둔 덕분에 보모 가비의 손에 키워진 소심해서 유약하고 내성적이서 우유부단한 프랑스 소년 루. 이들은 모든 일을 함께 나누고 함께 경험한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이 죽을 때까지 영원하리라 믿는다.

둘 은 그들의 삶과 시간을 나누는 진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지만 전혀 닮은 점이 없다. 어쩌면 서로의 다른 점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원한 우정을 꿈꾸며 루에게 집착하는 만도에게 루는 차츰 숨이 막혀 오기 시작한다. 내성적인 루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거침없는 비판을 퍼붓는 만도에게 주눅이 든다. 소심한 루가 공원에서, 여름캠프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서, 마지막으로 쌍동이 분수에서 만도를 배신하는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 벌어지면서 변치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우정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배신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만도, 이에 안도하며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급을 상상하지 못하는 루.

' 루는 늘 다른 데서 시간을 보낸다. 약속을 세 번 깨면 그와 결별이다' (203쪽) 라는 구절을 만도의 일기에서 발견할 때까지 소설의 화자인 루는 그토록 친했던 만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만도가 얼마나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 집착이 만도에게 또 그들의 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도. 그들의 만남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악연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그 랭베르의 <악연>은 한 장이 3페이지를 넘기지 않을만큼 짧고 숨가쁘게 쓰여졌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묘사는 소설의 템포를 한층 가속한다. 한 장이 끝나고 다른 장이 시작하는 사이 공간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지만 쓰지 않은 많은 말들이, 독자들이 자신을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숨어 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면 앞부분을 다시 펼쳐들게 되는 소설이다.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