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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들의 환수 유형을 밝힌 책  | 역사 2019.06.04 2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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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
눌와 |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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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이 펴낸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는 여러 경로로 국외로 유출되었다가 우리에게 돌아온 문화재를 유형별로 정리한 책이다. 유형은 다섯 가지다. 1) 소장자의 기증으로 돌아온 경우, 2) 정부의 협상으로 돌아온 경우, 3) 민간의 노력으로 돌아온 경우, 4)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경우, 5)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경우 등이다.

 

1)의 대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다. 2)의 대표는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다. 3)의 대표는 겸재정선화첩이다. 4)의 대표는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이다. 5)의 대표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환수를 위해 정부기관이 나서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섣불리 약탈, 반출한 문화재를 원소유국에 되돌려주면 비슷한 사례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41 페이지) 한일간 문화재 반환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1965년 한일협상이다.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모호한 명목의 배상금을 받는 대신 역사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한일협정은 일제강점기 35년간의 한일 관계의 질곡을 해소하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환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문화재 반환과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시기는 19584차 한일회담 때이다. 용어도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반환이라는 말에는 약탈과 불법 반출이라는 범죄 행위를 인정, 사과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모은 오구라 컬렉션이 있다.

 

그는 전형필 선생이 문화재 보존에 쓴 돈의 열 배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간 협정으로 돌려 받은 국외 소재 문화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반환이다. 두고두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협정이다.

 

물론 문화재 반환에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지원과 정부간 협상이다. 민간이 여론을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해 성과를 내는 경우가 바람직하다. 의궤는 임금이 보는 어람용(御覽用)과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뉜다. 두 판본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의궤다. 문화재 불법 반출을 금지한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이 맺어진 것은 1970년이다. 그 이전 반출된 것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20101112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5년 단위로 갱신되는 대여 형식으로 외규장각 의궤 전부를 한국 측에 일괄 양도한다는 발표를 한다. 교류와 대여라는 원칙을 내던진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어보와 국새는 다르다. 어보는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등의 의례용, 국새는 외교문서나 공문서에 쓰는 공무용이다.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어보의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민속학자 조창수(1925 - 2009) 여사는 어보의 반환을 이끌어낸 분이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 - 1928)가 있다. 오구라 컬렉션의 주인공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 - 1964)와 다른 인물이다. 경복궁 철거작업 중 자선당을 일본으로 반출한 사람이다.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반출되어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사설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를 만나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채 방치되었고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김정동 교수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나라에 80년만에 돌아왔다.

 

책은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문화재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을 말하며 조선왕조가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 것을 기록의 힘이라 설명한다. 역사가 자신을 어떤 인물로 판단할지 두려워 한다면 왕이든 관리든 사적 이익을 위해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원주 법천사지(法泉寺址) 지광국사탑은 조선총독부도 뒤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는 제목으로 다루어졌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문화재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섬강 주변에는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친 큰절들이 있었다. 흥법사(興法寺), 고달사(高達寺), 거돈사(居頓寺) 등이다.

 

이 절들은 임진왜란 때 뱃길을 차지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폐사된 뒤 다시 세워지지 못했고 이후로는 새로운 교통로로 자리 잡은 물길과 멀어지면서 지금은 궁벽한 오지 같이 한산해졌다.

 

하지만 이들 절에 있던 여러 석조 문화재들이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한때 매우 큰 절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제가 약탈해간 유물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일찌감치 국내외 여론의 힘으로 찾아온 우리 문화재다. 모범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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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신권의 관계, 여진족 출신 군주 세종이란 관점으로 본 세종 일대기  | 역사 2019.05.07 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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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
북오션 |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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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15일은 세종(世宗) 탄생 622돌이다. 세종은 누구나 숭앙(崇仰)하는 성군(聖君)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 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세종에 대해 무지한 채로 있던 나에게 지인(知人)이 이런 말을 했다.

 

세종은 누구나 다 추앙하는 임금인데 정조는 그에 못 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지난 해 5월의 말이었으니 1년 전의 일이다. 이 분은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간격(358)보다 정조 시대와 현대의 간격(242)이 더 짧다는 말도 했다.

 

이에 나는 컴퓨터로 몸을 유지하는 과학자 스티븐 호킹과 목발을 짚은 사람의 차이가 목발을 짚은 사람과 비장애인의 차이보다 크다고 한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의 글이 생각나네요.”란 말을 했다.

 

이렇듯 나는 색다른 것을 좋아한다. 물론 대상을 정확하게 안 다음에 기능한 것이 색다른 해석이다. 그런 과제 아닌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나에게 525일 영릉(英陵)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 부랴부랴 관련 자료를 찾다가 능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책을 만났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란 책이다. ‘역사 추리 조선사등의 저술 경험이 있는 저자 김종성이 쓴 이 책은 한국철학을 전공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의 내공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역사 전공자가 쓴 책과의 차이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의 키워드는 고뇌다. 저자는 아버지가 형님과 나를 저울질한다, 나는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인가, 왕권과 신권의 조화는 불가능한가, 나처럼 불행한 왕이 또 나오지 않기를 등의 챕터들로 세종의 고뇌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왕권과 신권의 갈등 및 타협에 대해 해명한 부분, 그리고 여진족 이성계의 자손(손자)인 세종이 중국과의 문자 투쟁의 차원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부분 등이다.

 

세종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할 인물은 그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다. 태종은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기지(機智) 내지 조력으로 정도전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 혁파 때문에 이방원은 병장기를 치워야 했지만 민씨가 남편 모르게 무기를 감추었다가 거사가 임박했을 때 무기를 공개한 것이다.(22, 23 페이지)

 

물론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는 명나라에 대한 대응의 차이가 큰 차이로 이어진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은 동아시아 최강 명()을 배척했고 이방원은 그렇지 않았다. 명의 주원장은 이에 정도전의 지위를 흔들었고 이로 인해 이방원이 조선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가 승리한 것이다.(187, 188 페이지)

 

태종은 아들 이도(李祹)에게 임금 자리를 양위했지만 가장 중요한 군사권은 양보하지 않았다. 태종에게는 강상인이라는 최측근이 있었다. 이방원을 왕자 시절부터 보좌한 강상인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병조 사무에 관한 보고를 세종에게 올렸다.

 

이는 상왕 태종의 진노를 불렀다. 강상인은 영의정인 세종의 장인 심온과 뜻을 함께 했다고 진술했다.(85 페이지) 심온은 반국가 사범으로 처형되었다. 심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86 페이지)

 

세종은 장남 이향(李珦: 문종)을 지나치게 염려했다. 이향은 학문을 즐기는 것만 보면 사대부 신하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학구적인 군주가 냉혹한 권력의 세계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떨어지는지 세종이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이향에게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주고 4년간 상왕 역할을 했다.(234 페이지) 문종은 불행했다. 세종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문종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왕자들의 영향력만 키우는 악수가 되었다.

 

문종은 할아버지 태종이 아버지 처가(자신에게는 외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바람에 다른 임금들과 다르게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세종이 죽고 문종도 죽은 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계유정난으로 종결되었다. 이 난으로 문종의 아들 단종은 실권을 잃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235 페이지)

 

잠시 연산군과 세종을 비교해보자. 최악의 폭군 vs 성군으로 나눌 수 있을까? 맞다. 하지만 초점을 다른 곳에 둘 수도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정통 군주였다. 정통 군주는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 원자(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큰 아들)와 세자를 거쳐 여러 해 후계자 수업을 받은 뒤 부왕의 죽음을 계기로 군주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230 페이지)

 

이 기준에 맞는 가장 확실한 사람은 뜻밖에도 연산군이었다. 그는 후궁이나 무수리가 아닌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비 후계자로 지목된 원자 출신 왕자로 원자를 거쳐 왕세자가 된 뒤 다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왕세자 신분으로 관례와 혼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었고 형을 계승하지 않고 왕이 되었다. 더구나 상왕이 된 아버지의 실제 통치를 겪지 않고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왕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왕이 된 사람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면 정통성 시비를 겪게 되고 아버지가 섭정을 한다면 정치적 간섭 때문에 임금의 위상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큰형인 양녕대군의 폐위와 함께 세자가 된 데 이어 왕이 되어 콤플렉스를 가졌을 것이다. 정통성이 완벽한 연산군은 긴장감을 잃고 방심하다가 쿠데타를 당했고 태종, 세조, 선조, 정조처럼 정통성이 취약했던 임금들은 왕권을 지키는 데 힘썼거나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느라 애썼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여진족 혈통의 많은 부분이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란 의미다.) 단재 신채호는 여진족과 한민족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100퍼센트 확실하게 말해주는 기록은 없지만 이성계가 여진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한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143 페이지)

 

이성계는 분명히 여진족 거주지에 살고 있었다. 이성계 집안의 가업은 농업이 아니라 목축업 또는 유목업이었다. 이성계의 휘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종교 교주가 아니라 군사 지도자였다.

 

일반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여진족 출신의 장수가 여진족 병사들로부터 고도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정규군과 사병을 포함해서 고려 말에 존재한 군사 집단 중에서 가장 단결력이 강했던 것은 이성계 군단이었다.(이성계가 명성을 얻은 것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홍건적과 왜구를 무찔러 고려를 지켜내는 과정에서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의 혈통이 달랐다면 강한 응집력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랏말이 중국 말과 달라 고생하는 우리 백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통치술의 일환이었다는 말도 있다. 저자는 여진족 이론으로 세종의 한글 창제를 설명한다. 즉 농경민족에 대한 유목민의 대결 지향 정신에 따른 것이라는 말이다.(168 페이지)

 

동아시아 농경민은 한자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유목 지대에서는 한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유목민은 자기들만의 고유문자를 고집했다. 거란문자, 서하문자, 티벳문자, 여진문자, 몽골문자처럼.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여러 고대 문자들을 참조했다. 그 중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란 게 있었다. 이상한 것은 세종이 변음과 토착의 해석을 왕자들에게 부탁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은 그런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세종이 자식들에게 변음과 토착에 대해 물은 것은 자기 집안에 그 문자를 해독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면 그 자손들은 엘리트 여진족 3세가 되는 것이다. 왕자들이 답하지 못하자 세종은 시집간 딸인 정의공주에게 서한을 보내 문자 해독을 부탁했다. 정의공주는 별 어려움 없이 문제를 해결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유목민 출신 군주가 한자에 맞서 독창적인 문자를 가지려 한 결과다.(176 페이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시기는 한자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세력(사대부)의 힘이 강력할 때다.

 

세종은 열성을 다해 한글을 만들었지만 통용을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한글은 양반 권력이 약화된 19세기 후반(세종의 기준으로는 450년 후)에서야 대중적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이 없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고뇌하고 일하며 공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264 페이지)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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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자가 책을 써야 하는지를 말하는 책  | 과학 2019.05.02 23: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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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과학자의 글쓰기
지식여행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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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관의 과학자의 글쓰기는 과학보다는 글쓰기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굳이 말하자면 과학자만이 아닌 인문학이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신문 칼럼과도 분량이 비슷한 2000자를 쓸 수 있다면 책쓰기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말한다. 지금은 과학 대중화시대다. 이는 과학자가 논문으로 자기들끼리 전문지식을 주고받아서는 어필할 수 없는 시대라는 의미다. 하지만 과학 소재의 글을 잘 쓰는 유능한 과학자는 드문 형편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글쓰기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덕목이다. 문제는 글쓰기 교육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 글쓰기는 노력만으로는 잘 쓰기 어려운 문학적 글쓰기와 격이 다르다.

 

저자에 의하면 과학자의 글쓰기는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수단이자 개인적으로는 인세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인 한편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편이다. 글쓰는 과학자가 성공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저자는 인문서 시장은 신인들이 틈을 비집고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지만 과학서 시장은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컨텐츠인지도 중요하지 않을까? 독창적인 내용을 담은 책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물론 과학서든 인문서든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써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저자는 우리말로 쓰인 과학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번역서보다 국내 과학자가 쓴 책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자의 글쓰기의 구성(1부 지금까지의 과학 글쓰기, 2부 왜 써야 하는가? 3부 무엇을 쓸까? 4부 어떻게 쓸까?) 가운데 3부 무엇을 쓸까?가 가장 중요하다. 저자는 자신이 연구한 분야의 글을 이전 저자와는 다르게 쓰라고 말한다.

 

저자는 평생 본인이 연구했던 분야를 바탕으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안내하면 되고 거기에 나만의 경험, 나만의 시각을 녹여낸다면 같은 소재를 다룬다 해도 세상에서 유일한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저자는 책이란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고 묶여진 결과물이라 말한다. 시대의 흐름, 패러다임의 변화, 담론 변화 등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131 페이지) 이 책의 장점은 각 장마다 이 장에 어울리는 책이란 제목으로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개그맨 이윤석이 '웃음의 과학'이란 책을 쓴 사실을 언급한다.(이 책은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과학서이다. 이윤석은 여러 과학책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그 책들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감동을 받았다는 말은 영감을 얻었다는 말이다.) '웃음의 과학'은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과학책을 썼는지(풀어나갔는지)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저자는 짜임새를 생각하고 크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말한다. 저자는 글감을 어떻게 배치할지를 따져보라고 말한다. 저자는 집필하다 설계를 수정하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크게,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장대익 교수의 다윈의 서재를 벤치마킹해 나중에 그와 같은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211 페이지) 저자는 세상에 없는 새로운 방식의 책을 쓰자고 말한다. 나만의 독특한 경험이 듬뿍 담긴 콘텐츠를 책으로 쓰자고 말한다.(21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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