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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남겨준 통발[筌]

고전古典이 고전인 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게 하는 무한히 열린 텍스트라는 데 있다. 신영복 선생 역시, 오늘에 읽는 동양 고전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근본 문제의식과 긴장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놓지 않는다.
책 전반에 걸쳐 고전을 당대 시제時制로 읽으면서도, 현재적 의미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상을 그 자체로서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배경 속에서 드러냄으로써, 모든 사상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탄생•숙성•사멸되는 역사적 산물임을 환기시킨다. 그 과정에서,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해 시작되며, 또한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시도한다.
고대에서 현대를 망라하고 동•서양을 아우르면서 종적•횡적으로 자유자재한 점은, 선생의 넓은 시각이 미치고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짐작케 한다. 거기다 古典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경제학자로서의 사회과학적 안경과 개인적 경험들과 직조되고 있는 텍스트의 입체적 풍미도 돋보인다. 그러한 입체적 풍미가 유려하면서도 담박한 문장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 점은, 전문 학술서와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선생은 고전 독법의 화두를 “관계론”으로 설정하며, 책 전반에 걸쳐 공부란 것 역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임을 깨우치려 의도한다. 더불어 공부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 혹은 창신創新을 아울러야 함을 역설한다. 도서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엿보이는 선생의 한문 고문古文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열한 현실 인식이, 그의 말에 무게를 싣는다.
우리의 고전 독법이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임을 미리 일러두는 것으로써 강의는 시작되며, 선생이 “관계에 대한 담론의 보고”로 평가하고 있는 『논어』를 첫 텍스트로 삼는다. 그리고 공자의 ‘仁’을 사회화하여 ‘義’라는 개념으로 계승한 맹자에 대한 논의로 이어가면서, 공자와 맹자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유가儒家의 최고 경전이라 할 두 고전에서 공共히, 사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 관계이며, 우리의 삶의 자세 역시 ‘관계’에 대한 인지와 성찰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고 일러준다.
『순자』 편에서는, 고대 중국철학 전체가 조망된다. 순자가 왜 정통 유가가 아니라 이단으로 배척받았는지, 그럼에도 왜 유가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지가 밝혀진다. 또 순자가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이사를 배출해낸 법가의 시조라는 사실, 그리고 본성론에서 맹자와 순자와 묵자가 어떻게 갈라지는지 등이 소개된다.(p. 405)
한편 순자의 성악설이 결코,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임을 주장한 인문철학자였음을 간과하지 말 것을 당부는, 우리의 안일한 상식에 일침을 놓는다.
공•맹•순에 이어 道와 자연의 철학자인 노자, 소요의 철학자인 장자를 등장시킨다.(*생몰 연대를 고려하여 이 책에서 순자는, 노자, 장자, 그리고 묵자 뒤에 배치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묵자의 인간적 풍모와 더불어 그의 겸애와 반전 사상을 설명한다. 특히 묵가의 兼愛와 유가의 別愛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孝’ 개념이 흥미롭다.(pp. 398-9) 한편, 인간 본성은 백지白紙이고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所染]이기에, 마음을 마땅하게(바르게) 물들여야 한다[染當]는 묵자의 주장은 진보적으로 읽힌다.
법가 편에서는, 법가의 현실적합성을 높이 사면서도 民이 아닌 君主를 위한 철학이었던 치부를 들춘다. 그러면서도 여느 사상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법가를 조심스럽게 옹호한다. 과거의 사상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도, 비판의 시제時制를 항상 의식하며, 섬세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강의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에서까지, 선생의 열강은 숨가쁘게 내달리고, 독자讀者는 좇기에 바쁘다. 즉, “세계는 관계[연기]”라는 것이 그 이론 자체이자 깨달음[覺]의 내용인 불교, 불교에 대한 유학자들의 지적 대응의 결과물인 宋代 신유학, 유학의 근본 이념인 ‘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大學』, “性卽理”의 기치 아래 道學의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용』, 신유학에 대한 비판의 논리로서 “心卽理”라는 요체를 담고 있는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가르침은 풍요롭다.
이렇게 중국의 중요 고전들 거의 전부를 망라하는 과정에서, 각 고전에 대한 충실한 해설뿐 아니라 상호 겹치는 부분과 갈라지는 부분을 선명하게 색칠하면서, 제가백가들의 서로에 대한 평가를 곁들이면서, 각 학파와 학자들에 대해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선생의 『강의』가, 동양 고전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임이 재차 수긍되는 지점이다.

한편, 과거를 읽으면서도 결코 현실을 놓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풍모가 책 곳곳에서 엿보인다. 학자이면서도 늘 치열하게 현실을 반성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 실천적 지식인 중 한 분이라는 사실이 또 한번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雍也」편을 통해, 형식[文]과 내용[質]이 통일되어야 함을 환기시키면서, 광? 염려한다. 『맹자』의 「곡속장觳觫章」을 통해 ‘不忍人之心(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의 核은 ‘본다’는 사실임을 일러주면서, 만남이 不在하는 현대의 생산-소비 구조, 보지 않은 상태에서 발포하는 現代戰의 첨단 살상 무기의 잔혹성, 지하철에서 흔히 관찰되는 냉혹한 도시문화의 폐해 등을 지적한다. 『노자』를 통해서는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리적 억압과 간섭, 문화와 의식구조의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를 폭로하면서,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해체하는 데에 『노자』가 현대적으로 유의미하게 생환生還될 수 있음을 귀뜸한다. 『장자』의 機事와 機心을 얘기하면서는, 기계문명과 산업에 따른 인간 소외 및 노동 문제를 지적한다.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설명에 뒤이어, 기존의 인간 본성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선악의 판단을 하는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본성은 DNA의 운동 그 자체이며, 선악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에 기대고 있다.
이 외에도, 선생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통찰력이 단적으로 드러난 흥미로운 예화가 소개되어 있다. 지하철에서 곧 내릴 사람과 멀리 갈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서, 원하기만 하면 반드시 좌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선생의 장담이 그것이다. 이는 선생의 보충설명대로, 사람들의 인상착의와 소지품, 각 전철역의 사회•문화적 특성, 당 시간대에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까지를 포착해내야 하는 종합적인 판단력을 요구하는, 범상치 않은 능력인 것이다.

우리 상식의 虛를 찌르는 선생의 예리함도 곳곳에서 발휘된다. 이를 테면, ‘學은 객관적이고 思는 주관적’이라는 정설 혹은 통념을 깨뜨리는 전기수리공과의 일화(p. 183), ‘사람은 주관적이고 기계는 객관적’이라는 편견을 와해시키는 관찰(p. 333) 등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그리고 孟母에 비해, 솔선수범으로써 교육을 행한 한석봉의 어머니가 위대하기는 하나, 캄캄한 방에서 자신을 떡을 썰고 아들은 붓글씨를 쓰게 한 게임은 공정치 않았다는 지적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어둠 속에서 떡은 손으로 만져보면서 썰 수 있지만, 글씨는 만져보고 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자』의 “大辯若訥(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을 몸소 입증한 한 가수의 콘서트 이야기(p. 302)도 인상적이다.
知(진리를 파악한 상태), 好(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 樂(진리를 완전히 터득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학습과 놀이와 노동이 통일되는 이상적 경지가 제시되고 있는 부분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선생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인 ‘樂’을 “관계의 최고 형태”로 규정하면서, 읽는 이를 보다 높은 삶의 경계로 안내한다. 그 안내를 좇다가, ‘내가 이 책을 즐기고 있는가, 나아가 내 일을, 또 내 삶을 즐기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으로 인도되는 점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런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p. 193)는 선생의 단언에는, 선뜻 공감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노자』의 “上善若水”에 대한 설명에 덧붙인 선생의 ‘民草론’에는 다소 설득된 감이 있다. 선생에 의하면, 민초는, 가장 낮은 곳에 처하며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댓돌을 뚫는 落水]을 갖고 있는 물과 같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러한 약한 사람이 다수이며,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고 正義이며 현실이다.
선생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을 잘 살리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치명적 맹점은 간과한 흠이 있는 듯하다. 즉 ‘다수가 항상 옳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없으며, 愚衆 정치의 위험이 상재한다. 그리고 다수에 의한 결정은 희생양(scape goat)이 존재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다수多數를 위해야 함은 옳지만, ‘다수가 언제나 옳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마지막으로, 선생께서 『장자』「外物」편의 “得魚忘筌(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라)”을 “忘魚得罔(고기는 잊어버리고 통발(그물)을 얻어라)”으로 역전시킨 뜻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즉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 연연치 말고,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가 생성 변화 발전하는 바탕인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잊고 그물을 기억하려고 애쓰되, 한 가지 물고기만은 집에 꼭 가져가고 싶다. 바로,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하며, “실천된 것만이” 자신의 사상일 수 있다는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당부이다.
신영복 선생의 귀뜸대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히 복고 취향만은 아닐진댄,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 창조적으로 전승하는 일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결국 고전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출항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월척을 낚는 일은 어부인 우리에게 달려 있다. 혹 월척이 못 될지라도, 자족하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