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이라, 이 제목은 그럴 듯했다. 동정 없는 세상이 얼마나 근사한지 보여주는 영화일 거라는 필이 왔다. 내가 바라는 것 역시 동정 없는 세상이다. (...) 동정이 그 동정이 아니었다. 영화는 밋밋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화끈한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그 정도의 화끈함이라면 없는 것만 못했다. 영화라면 적어도 웃기든지 혹은 재미있든지 최소한 화끈하든지 해야 한다.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완벽하게 결여된 영화였다.’

나도 빌어묵을이었다. 나도 저 동정이 저 동정인지 모르고 책을 골랐다. <아내가 결혼했다> 같은 발칙한 주제의 책을 낸 작가이니 어느 정도 예상을 했어야 했지만 그렇질 못했다. 완전 나의 불찰이다. 처음부터 완전 빗나간 예상으로부터 빚어진 책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남자들한테 저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여자인 내 입장에선 그렇게 공감이 가질 않았다. 하긴 어떤 여성 작가가 여자들의 생리에 대한 얘기를 저런 장편으로 낸다면 그땐 어떨까. 물론 이런 비교가 근거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만 암튼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완전 별로라거나 던져버릴 정도의 책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집어든 책이라 내 기대에서 어긋났다는, 괜한 배신감으로 인해 별로였단 뜻이다. 재밌고 즐겁게 읽었다는 친구들도 많은 걸 보면 내가 좀 이상한가 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책을 선뜻 잡게 되지 않는다. 이 배신감이 좀 사라지도록 기다려야겠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친구들의 반응이 생각난다. 정혜윤은 질투 날만큼 멋진 여자라고. 독자들을 대하는 태도조차 너무나 멋져서 도대체가 그렇게 섹시하고 멋질 수가 있냐고. 물론 우리와 비슷한(!) 리뷰 정도를 쓴 책이 뭐가 멋지냐고, 별로였다고 한 친구도 있었다. 내 느낌은... 전자였다. 이 여자, 너무 멋지잖아, 그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똑같이 책을 읽고 똑같이 리뷰를 적는데 이 여자의 리뷰에는 뭔가가 더 있었다. 섹시함에 더한 지성이라고나 할까. 현대 여성으로서 책을 읽는 범위도 넓고 책을 읽은 후에 잡아내는 것도 나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었다. 그러니 멋진 여자라고 할 수밖에. 
이 책은 우리가 만날 책을 보고 리뷰를 쓰는 것처럼 우리에게 많은 책에 대한 그녀의 감상을 적고 그 책을 추천해주는 책이다. 그냥 읽고 느낌 정도를 적는 나에 비해 그녀는 더 세심하게 분석했고 이를 현대 삶에 맞췄다. 읽다보면 그녀의 여성성과 함께 지성이 함께 느껴졌다. 여자가 보통 얼굴이 예쁘면 무식하고 지성적이면 얼굴이 못났다는 식의 이분법을 멋지게 깨주는 여자였다. 섹시한 여성성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그녀는 지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닮고 싶은 여자였다. 
물론 그녀도 완벽한 여자는 아니다. 그녀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열등감도 있고 고치고 싶은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삶에 대한 의식이 있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대신 일상의, 책의 많은 부분을 끌어안을 줄 아는 폭을 가진 여자였다. 열등감도 인정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있는 여자, 그래서 나도 앞으로 끌어줄 것 같은 여자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책들, 내가 읽은 책들도 많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은 모두 리스트를 만들어놓고 차근차근 읽으려고 한다. 

‘“책이 당신을 기분 좋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책은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끝없이 세상과 연결하고 대면할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 때문이라 우선은 대답하고 싶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하지만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참 기분 좋은 양보다.’

권지예, 이 작품보다 먼저 그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일 끔찍하고 제일 마음에 남았던 작품 가운데 하나가 <꽃게 무덤>에 들어있던 <비밀>이 아니었나 싶다. 삶의 끝까지 철저히 혼자였던 어린아이의 외로움과 아픔이 온몸으로 느껴져서 읽고 나서 한동안 몸이 아플 정도였다.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작품은 그 아이의 순수함이 어른이라는 잔인함과 세상이라는 폭력 앞에 스러져가는 모습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작품집에도 많은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족이야기, 혼자인 여자를 스토킹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또 다른 약자처럼 보이는 부부, 젊은 남녀가 방황하면서도 함께인 이야기, 동반자살을 실현하려다 그냥 돌아오는 부자, 등등 삶의 모습들이 모두 날카롭고 어딘가 각이 져있다. 어느 작품 하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은 없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공포감은 마치 아침 안개가 자욱한 호수의 깊은 물 속 같다. 
우리 모두 삼류 인생, ‘정교한 레시피’(<설탕> 중)가 필요 없는 삼류, 그 삼류의 인생과 함께하는 것은 불안과 불안정이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형체가 보이지 않는 공포감이 이 책과 함께했다. 이 소설들이 무섭다. 날카로운 삶의 모습들이 나를 찌르고 있다. 인생은 쓰고 짜고……. 

“으음…… 난 사실 동해바다보다는 서해바다 쪽을 더 좋아해. 삶이 녹아 있는 바다는 서해바다인 것 같아. 아주 햇빛 뜨거운 염전에 가본 적이 있니? 소금이 졸여지고 있는 바다를 한번 보여주고 싶어. 소금은 증오의 결정이지. 고통의 정수고. 인생은 쓰고 짜고…… 눈물 맛, 소금 맛이라는 걸 철저히 맛볼 필요도 있는 거야.” -<설탕> 가운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