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휴식을 주려는 것일까? 묵직한 볼륨에 가서 쉬고 싶은 숲이 들어찬 표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지적인 삶을 열렬하게 추구하는 이 시대의 지적 노동자를 위한 책'이라는 문구에 한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가가 가진 방대한 지식과 그 깊이를 따르지 못하는 나의 지적 수준은 지적 노동자를 자처해 온 나에게 하나의 벽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무슨 오기였는지 '나는 지적 노동자야, 지적 노동자야'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발동했고, 그렇게 나는 지적 노동자로 가는 꽤나 힘든 여정을 시작했다. 처음의 욕심과 달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욕심을 부리고, 또 그러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버렸다. 정말로 내가 듣고 싶었던, 이 책을 선택하게 했던 부분을 읽고 마음에 위안을 받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으로 약속해 놓은 시간을 훌쩍 넘기긴 했지만 이 책을 다 읽었다. 정말로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그저 소설 읽듯이 쳐내듯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한 켠이 뭔가 묵직해진 느낌,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조언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잘 몰라서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조언해 줄 수 있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사회 초년생에게 /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한가로운 사람에게 / 희망에 찬 미래를 기획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 독서할 시간이 없는 직장인에게 / 결혼을 앞둔 지적인 젊은이에게 / 결혼이 지적 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
고독에 길들여진 연구자에게 / 지적인 삶을 추구하는 여성에게 / 말이 안 통하는 어머니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 지적인 우정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에게 / 쾌락을 좇는 젊은이에게 /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젊은이에게 / 재촉받고 있는 것같이 느끼고 있는 학생에게 / 맹렬하게 일하는 열정적인 친구에게 / 취업 준비 중인 젊은이에게 / 지적인 삶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 새로운 아틀리에를 준비하고 있는 화가에게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저 작은 제목만으로도 무언가 위안 받고 있고,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이 책은 그렇게 만족하면 된다.
 
하루하루 살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책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난 이 책을 꺼내 내가 듣고 싶은 부분이 있는 자리를 펴서 그녀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넣지 않은 저렴한 빵의 그윽하고 깊은 맛을 알게 하고 싶고, 먼 곳에서 표류해오는 낙엽송 향기를 맡게 하고 싶다."던 작가의 말처럼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주고 싶어했던 진정한 즐거움은 아닐까?  

꿈 많던 시절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동네에 단 한 개뿐인 서점으로 달려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토요일 밤을 세워 가며 책을 읽는 것이 크나큰 기쁨이자 행복이던. 소도시인지라 텔레비전 외에는 딱히 정보 매체가 없었던 탓이라고 핑계를 대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보는 수없이 널려져 있었으나 그것을 수집하고 이용하는 면에서 뒤처졌던 것 같다. 여하튼 본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덕분에 나는 일주일에 책 한 권이라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릴 수 있었고, 그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명목상으로나마 일주일에 한두 권 정도는 읽어야 숙제를 마친 듯한 이상한 의무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책을 만난다는 기쁨과 그 책을 통해 얻은 기쁨이 책장에 한 권 한 권 채워질 때마다 마음을 채우는 감동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 이상문학상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넣어준 윤후명 님의 <하얀 배>. 제1회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은희경 님의 <새의 선물>, 국어 선생님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받은 신경숙 님의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 ‘글맛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 성석제 님의 <어린 도둑과 40마리의 염소> 등이 어린 내 맘을 사로잡고, 나아가 생각의 키를 키워 준 고마운 책들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1인의 독서 편력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으며 누구나 “나를 있게 한 책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시작하게 해 준 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내가 책이란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시절을 추억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그네들과 함께 해 온, 때론 그네들을 사로잡은 책을 소개받으며 그들이 글을 짓고, 문화를 만들고,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기에 앞서 그들 또한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그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새기며 살아가는 독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권의 작은 도서관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여러 분야의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어 내용을 조금씩 조금씩 소개받는 경험도 꽤나 신선했다. 물론 인터뷰 당하는 자(?)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독자들에게는 중간중간 끼어들어 때로는 그 흐름을 가로막고 이야기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트는 저자에게 화가 날 법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밉지 않았던 것은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 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따라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 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의 창시자이고 싶어한다"는 소개글 때문이었다. 책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누가 말리겠는가. 게다가 이 책은 인터뷰 당한 11인을 앞세우고는 있지만 교묘하게 정혜윤 그녀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
평소 좋아하던(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데다 연배가 연배인 만큼 존경이라는 표현은 아껴두고 싶다) 분들의 마음을 성장케 한 비밀의 책들을 소개받은 것 같아 고마운 한편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비밀 서재를 훔쳐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미안함이 모두 고마움으로 바뀔 만큼 꾸준한 독서로 보답하겠다고 11인에게 약속 아닌 약속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책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은 아름답다. 발랄하고 주책 없음 속에서도 고상함을 잃지 않고, 어둡고 우울함 속에서도 밝은 기운이 비치며, 바쁘고 정신 없는 상황에서도 여유가 보이고, 단조로운 일상마저도 책이라는 친구가 함께 있어 외롭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이 가진 힘이요, 평생 무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사람을 해치기는커녕 내 편으로 만들고, 그 무기는 마음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늘 웃음을 짓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아마도 그러한 매력 때문에 책을 아는 사람들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 한켠에 세워두고픈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