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처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 게 1989년이었으니, 정확히 20년이 지났다. 물론 나도 당시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읽었다가 아니라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솔직히 그 책의 어느 한 장면도, 한 문장도 기억나지 않고 솔직히 소설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1989년은 대통령직선제에도 불구하고 야권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후 88올림픽이 치러지고, 증권시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값도 상승하던, 소위 잘 나가던 시기였다. 물론 공안정국의 칼바람이 몰아친 시기도 있었지만.
다시 보니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과의 관계, 사랑과 섹스와 연애에 대해 얘기하는, 작가의 말 그대로 ‘연애소설’이다.
작가 서문을 잠시 인용해 보자.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와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이 소설에는 4개의 삼각관계가 얽혀 있다. <노르웨이 숲>은 한마디로 ‘나’(와타나베)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 형태의 ‘사랑’이라는 연애소설의 형태를 빌려, 시대와 인간존재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1. ‘나’ – 기즈키 – 나오코
기즈키는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이며, 나오코는 기즈키의 여자친구이다. 고3때 예기치 않은 기즈키의 자살로, ‘나’는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면 나오코는 사랑을 잃은 후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환청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죽음의 인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생의 의지를 되찾기 위해 요양원에서 요양하는 나오코를 사랑함으로써 죽음의 기운과 맞설 의지를 심어주고 싶어 하지만, 나오코는 작가의 말처럼 ‘그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녀는 자살로 기즈키와의 만남을 선택했다.
2. 레이코 – ‘나’ – 나오코
‘나’는 나오코가 머무는 정신요양원에서, 나오코의 룸메이트인 중년 여인 레이코를 만난다. 그 자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요양원에서 8년이나 머물렀지만, 그녀는 나오코를 돕고 싶어하는 ‘나’에게 상처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관계맺음의 방법을 설명해 준다.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돕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녀 역시 나오코를 사랑했으며 나오코가 죽은 후 요양원을 나와 와타나베와 함께 나오코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른 후 와타나베와 동침한다.
3. 나가사와 – 하쓰미 – ‘나’
‘나’의 기숙사 선배인 나가사와는 별 어려움 없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대단한 수재로서, 타인을 딛고 서는 승부게임을 벌이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서 생의 희열을 찾는 인물이다. 그는 하쓰미라는 우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애인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게임처럼 만나며 즐기고 하쓰미에게도 정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나가사와로 인해 하쓰미가 불행해질 것을 예감하고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나가사와가 외무성 시험에 합격한 후 독일로 떠나자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결국에는 손목을 긋고 자살한다.
4. 나오코 – ‘나’ – 미도리
‘나’는 나오코의 자살을 막지는 못하지만, 와타나베의 곁에는 비정한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해갈 동지가 될 미도리가 남는다. 와타나베가 애타게 미도리를 부르며 클로즈업되는 작품의 결말은 앞으로 그들이 함께 만들어갈 치유와 회복의 세계를 암시한다.
이들 4개의 삼각관계가 얽히고 설켜 소설이 복잡하거나 음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각각의 관계는 그 나름의 상처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결코 ‘나’ 또는 다른 누가 음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가운데에서도 진실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인내와 때론 고행을 마다 않는 와타나베를 통해 사랑과 인간의지의 위대함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삼각관계가 놓여진 당시(1968년 내지 1970년) 일본 사회 또는 일본 대학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를 강타한 소위 ‘68혁명’은 기존 질서에 대한 철저한 도전이었다. 국가권력이나 문화적 터부, 사회적 금지에 대한 반대가 주장되었으며 대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학교구내를 자치구(해방구)로 선포하였으며 경찰과 학생들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동맹휴학’, ‘대학해제’(상권 94쪽), ‘산학협동체 파괴’라는 선전선동이 난무하는 거대한 이념의 시대였다(마치 우리나라의 80년대 대학가와 같이). 저자인 하루끼 역시 일본대학의 ‘전공투’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을 보면 당시의 주도세력에 대해 하루끼는 매우 냉소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는다.
“동맹휴학이 철회되고 기동대의 점령 아래서 강의가 재개되지, 맨 먼저 출석한 것은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패거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의실에 나와 노트를 펴고 이름이 불리자 대답을 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동맹휴학 결의는 아직도 유효했고, 아무도 동맹휴학 종결을 선언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드를 깨뜨렸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휴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맹휴학 결의 때는 하고 싶은 말을 소리 높여 외치고, 동맹휴학에 반대하는 학생을 매도하거나, 혹은 규탄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을 찾아가 왜 동맹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석일수가 모자라 학점을 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패거리들이 대학 해체를 외쳐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열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로 큰 소리를 내거나 침묵하거나 하는 것이다. 여긴 정말 형편없는 세계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작자들이 버젓하게 대학에서 학점을 따고, 사회에 나가 부지런히 비열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동안 강의에는 나가되 출석을 부를 때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학과 안에서의 내 입장은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상권, 106쪽, 107쪽)
“어느 날 우린 야간 정치집에 나가게 되었는데, 여학생들은 모두 각기 밤참용 주먹밥을 스무 개씩 만들어오라는 지시가 내려졌어. 웃기고 있어, 정말. 그건 완전히 성차별이잖아.”(하권 67쪽의 미도리의 대화 중에서)
말 그대로 구호와 이념 속에서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정의, 반자본주의, 평등이 난무하지만 일상에는 이기심과 권력욕, 물질숭배, 남녀차별이 지배하는 허위와 위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보기로 하자.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고2때 처음 만났다. 그녀는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다. 기즈키는 머리도 명석하고 사람과 만날 때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재능도 있는 사람이지만, 오직 와타나베와 나오코에게만 마음을 연다. 그런데 기즈키는 유서도 별다른 동기도 없이 자기 집 차고 안에서 자동차 배기 파이프에 고무호스를 연결하고 엔진을 켜두는 방법으로 자살한다(상권, 54쪽). 와타나베는 때이르게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삶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를 그 손아귀에 사로잡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처럼 생각되었다. 삶은 이편에 있으며,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편에 있고, 저편에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로 해서, 나로선 이제 그런 방법으로 죽음과 삶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죽음은 삶에 대극(對極)하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와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상권 57쪽)
대학에 진학한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1년 만에 재회한다. 이때 나오코는 자기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말이지,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야. 제대로 된 말은 항상 또 하나의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게 돼.”라고 하는데 이후 나오코의 정신병과 관련된 신산한 삶과 비극적인 자살을 소설을 서두에서 이렇게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상권 48쪽). 간간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나오코의 20살 생일날 우연히 같이 잔다. 이날 만은 그녀의 그곳은 따뜻하고 촉촉하게 젖어서 와타나베를 받아들였는데(상권 90쪽), 이것이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와 나눈 섹스였다.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메마른 석녀(石女)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나오코는 손 또는 혀로 두어 번 와타나베의 그것을 쏟아내게 했을 뿐이다. 나오코는 편지를 남기고 정신요양원으로 향한다(상권 97쪽).
동맹휴학이 철회된 후의 연극사 수업에서 와타나베는 미도리(녹색, 녹음이라는 뜻)를 만난다(상권 110쪽). 미도리는 언니와 함께 아버지가 경영하던 고바야시 서점을 운영하였는데, 아버지는 뇌종양 말기 투병 중이었다.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솔직하고 때로는 외설적이기도 한데, 그 어떤 터부나 억압에도 억눌리지 않은 모습이 매우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예를 들어 미도리는 생리대(상권 131쪽), 마스터베이션(상권 139쪽), 브래지어(상권 151쪽), 키스(하권, 47쪽), 성적 환상과 페니스(하권, 52쪽, 53쪽), 펠라티오(하권 59쪽) 등 대화소재에 별다른 제한이 없고, 와타나베에게 ‘남자들은 특정한 여자를 생각하면 마스터베이션을 하는지’를 묻는가 하면(하권, 57쪽) 자기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한 후 그 느낌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하권 58쪽), 채찍질을 하거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여자에게 오줌을 싸게 하는 그런 종류의 하드코어 포르노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면서 같이 보러 가자고 하기도 한다(하권 77쪽, 실제 둘은 이러한 포르노영화를 같이 보러 간다). 미도리는 포르노 영화관에서 섹스 장면이 나올 때 모두 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 꿀걱하는 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좋다고도 한다(하권 78쪽). 아버지의 영정을 모신 불단 앞에서 나체로 가랑이를 벌린 얘기도 스스럼 없이 와타나베에게 얘기한다(하권 166쪽).
미도리는 애인이 따로 있으면서도 와타나베의 특이한 분위기와 말투, 솔직함에 끌려 호감을 가진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부모에게서 살가운 정을 못 받은 데 대한 보상인지는 몰라도 ‘완벽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상권 166쪽).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야.”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밖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그때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케이크가 먹고 싶지 않게 되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내가 당나귀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둔했어. 사과할 겸 다시 한번 다른 걸 사다줄게. 뭐가 좋아?’”
미도리의 서점집에 초대받은 와타나베는 옥상에서 우연히 불구경을 마친 후 미도리와 따스한 키스를 나눈다(상권 169쪽).
어느 날 나오코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요양원의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그녀는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건,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진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우리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고 의사가 말했어요.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들면 다른 데가 이상해져 버린다”고 전한다(상권 187쪽). ‘나’는 바로 나오코를 만나러 요양원으로 향한다. 요양원에서 나오코의 룸메이트 레이코를 먼저 만나는데, 나오코를 어떻게 해야 도울 수 있는지를 묻는 ‘나’에게 그녀는 말한다.
“우선 첫째로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기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 둘째는 정직해질 것.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대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속이지 않을 것. 그러면 되는 거야.”라고 조언한다(상권 207쪽).
나오코와 재회한 자리에서 나오코는 여전히 자신은 기즈키를 사랑했다면서 와타나베와 동침한 사실에 미안해했다(상권 237쪽). 나오코는 요양원의 뒷편에 있는 산에 올라가 넓은 초원에서 손으로 와타나베를 사정시킨다(상권 298쪽).
학교로 돌아온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병문안도 같이 간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와타나베의 문병 직후 돌아가신다. 미도리는 말한다.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비스킷 통에 여러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도 있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하권 206쪽, 207쪽)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에서 검프의 어머니가 초콜렛 상자를 두고 말한 것과 동일한 비유였다.
한편 나가사와는 와타나베의 대학선배이다. 그는 와타나베와 마찬가지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라는 소설을 좋아하며(상권 69쪽), 넓고 거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욕구와 자신감으로 가득찬 수재이다(상권 121쪽).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와타나베와 나누는 장면을 한번 보자.
“불공평한 사회란, 거꾸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진저리가 나. 어째서 사람들은 노력이라는 걸 하지 않을까, 왜 노력도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제가 보기엔 세상 사람들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하는 거야.’(하권 114쪽, 115쪽).
그는 하쓰미라는 멋진 애인을 두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시내의 술집에 나가 여자들을 꼬셔 호텔에서 섹스를 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으며, 애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가사와는 이런 게임에서도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와타나베도 가끔 데리고 다녀준다. 외무성 시험에 합격한 그는 합격을 축하한다면서 와타나베를 불러 하쓰미와 함께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자신의 여성편력과 연애관을 거침 없이 털어놓아 하쓰미를 분노케 한다. 나가사와가 독일로 떠난 후 하쓰미는 결국 손목을 그어 자살한다.
나오코의 정신적 문제는 차츰 해결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악화된다. 전문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치료를 해보겠다던 나오코는 자살해 버린다. 와타나베는 슬픔에 빠져 정처없이 유랑한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하권 248쪽, 249쪽)
나오코가 죽은 후 레이코는 요양시설을 나와 홋카이도로 떠나기 전에 와타나베를 찾아와 나오코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고 와타나베와 격렬하고 행복한 섹스를 한다.
모두가 죽거나 떠나 버린 후,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고,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음을, 온 세계에서 미도리 말고는 원하는 게 없으며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자기, 지금 어디 있는거야?”라고 묻는 미도리. 와타나베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하고. 그러나 와타나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하권 288쪽, 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