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영어학부 교수인 도정일씨와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석좌교수인 최재천 교수가 진화론, 생명공학, 인간의 기원, 종교, 예술, 신화, Sex, 정신분석 등 굵직 굵직한 주제들을 놓고 자유로운 대담을 나눈 후 책으로 내 놓았습니다.
읽어 보시면, 도정일 교수는 당대의 ‘구라쟁이’ 임이 틀림 없고, 의외로 자연과학자인 최재천 교수의 ‘썰’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실 수 있습니다. 특정한 분야를 놓고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표자끼리 대담을 나누는 형식의 책이 더 있지만, 제 경험으로는 이 대담처럼 재미있고 녹취록 같은 생동감이 넘치며, 내용이 풍부한 기획을 찾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지름 2mm 크기의 민벌레를 꾸준히 들여다 보고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강연과 책 발간 등을 통해 묵묵히 노력하고 계시며, ‘시인의 마음을 가진 생물학자’라는 평을 듣는 분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조선시대 지식인의 전형은 ‘르네상스적 인간’, 즉 폭 넓은 인문주의자(인문학과 예술과 자연과학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선물세트)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세종 때 김종서는 원래 문관이었지만 외려 국방과 병무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율곡 이이의 장원급제 답안을 보면 천문학에 관한 폭 넓은 관심과 지식이 잘 나타나 있고, 정약용 선생이 수원화성 축조 및 정조의 수원행차를 위한 한강 배다리(지금의 조립교) 건설 실무책임자였던 사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드러난 동시대 지식인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소양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와 와서 ‘한 우물만 판다’가 지배하면서 한 분야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라고 하면서도 주변 학문이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식견도 없는 지식기술자가 태반인 게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도 공통된 화제가 없고, 대화가 통하지 않고,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최재천 교수는 대담에서 “우리나라, 혹은 동양의 과학자들이 세계 과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걸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산은 바로 언어(영어. 이놈은 참 발이 넓어서 안 끼이는 데가 없군요…^^;)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요즘 ‘유비쿼터스’와 ‘통섭’에 관한 담론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런 점에서 이 두 분이 다양한 주제에 관해 수준 높은, 때론 상대에 대해 도발적인 ‘구라’를 교환, 전개해 나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제8주제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를 보시면, 인문학자가 동물도 번식 이외의 목적으로 sex를 즐기는지 운을 떼면, 자연과학자가 ‘보노보’라는 영장류가 보여주는 sex에 관한 특별한(!) 캐릭터를 설명해 주고, 얘기는 자연스럽게 동물도 피임 내지 산아제한을 하는지, 왜 인간은 성을 은밀하게 구사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는지 등을 주고 받다가 종국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의 인문학적(신화적) 의미, 가족과 결혼의 (자연과학적) 탄생 배경으로 달려 갑니다. 이들의 ‘구라 호흡’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적잖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아득함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구라 속엔 ‘진실’이 있습니다. 이들의 ‘구라’는 사물과 현상, 인간에 대한 진지한 관철과 통찰력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들의 대담은 황우석 사건이 문제되기 이전에, 아니 최고가를 호가하는 시점에 이루어 졌는데, 대담을 통해 그러한 복제 연구에 내재된 윤리적 문제(여성의 난자 채취 과정에서의 윤리성, 연구과정과 결과의 투명한 공개 등)를 지적하며 걱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마치 예언과도 같이 걱정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정일 교수의 말대로 사람들을 ‘오류로 이끄는 구라’가 아니라 ‘행복으로 인도하는 구라’가 풍성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대담의 큰 주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즐거운 몽상과 끔직한 현실
2.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3.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4.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5.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6.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7.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8.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9. 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10.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1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12.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13.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제게도 소박한(!) 꿈이 있다면, 이 분들처럼 폭 넓은 주제는 아니더라도 한 두 가지 관심사에 대해 위트가 넘치는 ‘구라와 썰’을 풀 수 있는 내공을 가졌으면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