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삼촌에게서 얻은 돈으로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함께 탄광개발사업을 하다 밑천을 날려먹은 실화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소설은 딱히 흥미로울 만한 서사적 줄거리나 사건들 없이 話者인 ‘나’와 친구이자 피고용인 겸 주인공인 조르바가 아름다운 크레타의 해변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사랑하며, 과거의 경험, 조상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인생과 자연과 신(종교)에 대한 각자의 에피소드나 생각들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1]
우선 카잔차키스가 소개하는 조르바는 어떤 사람인지,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영혼의 자서전>을 인용해 보자.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구루[導師]라고 일컫고, 아토스 산의 수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려고 조르바의 나이 먹은 마음에서 회생의 힘을 분출해야 하던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뱃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쉬이 분석되지 않을 인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고백하였는데, 그는 조르바를 통해 크레타의 궁전 벽화에 새겨진 날아가는 물고기-투쟁하는 불굴의 인간 영혼을 보게 된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자.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2] 그래서[3]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4]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 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99쪽, 100쪽)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부처에 관한 말씀을 통해 점잖게 구원을 추구하는 서른 다섯살의 젊은 ‘나’가 이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예순 다섯 살이나 먹은 조르바에게 극찬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Fritz Perls라는 정신분석자가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충고가 있다. Here and Now,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에 충실하라! 조르바의 삶이 실로 그러하였다. 그는 매 순간을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58쪽) 대한다. 그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한다(81쪽). 조르바 스스로도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그 놈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고백한다(115쪽). 섬에서 만난 한물간 카바레 가수 출신의 오르탕스 부인과 처음으로 저녁을 먹는 장면(58쪽 이하)를 보면, 그가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장만된 음식에, 여자를 볼 때 얼마나 여자에 집중하는지 알 수 있다. 악마의 소리에 충실하고 욕구와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순박한 조르바가 보기에 가망 없는 펜대운전사인(471쪽) ‘나’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구제불능이다. 조르바는 두목인 ‘나’ 앞에서도 거침이 없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148쪽)
말이 나온 김에 얘기가 좀 샛길로 흐르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조르바의 식사예찬을 들어보자. 하기사 이 소설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먹고 마시는 얘기인 바에야!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 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구요(54쪽)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105쪽)
먹는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는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 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 과히 나쁠 것도 없겠지요(106쪽)
그리하여 ‘나’는 조르바와 함께 해변에서 별을 보며 같이 음식을 나누는 순간을 매일 매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이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126쪽).[5]
조르바의 연인 오르탕스 부인이 죽은 후, 쉽게 연인을 잊는 게 아니냐는 ‘나’의 타박에 대해 조르바는 ‘여기, 그리고 지금’을 직접화법으로 전한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420쪽, 421쪽)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 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159쪽).
내가 당신만큼 젊었더라면! 어디든 한번 이 대가리를 처넣어 볼 겁니다. 일, 포도주, 사랑, 뭐든 말이오. 나 같으면 하느님도 악마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젊음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363쪽).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185쪽)
조르바와 헤어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나’는 조르바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하면서 ‘나는 자유로우니까’라고 말하자, 조르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유인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하여 왜 ‘나’는 자유인이 아닌지 깨우쳐 준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나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462쪽, 463쪽)
그렇다. 우리는 마치 줄에 매인 강아지나 말이 그 매여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관습과 도덕, 종교와 자본의 논리라는 줄에 매여 이리 저리 셈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한번 큰일이 벌어지는데, 다름 아닌 과부의 피살사건이다. 과부를 짝사랑한 동네청년 파블리가 이루지 못할 사랑에 절망하여 자살한 데 대한 보복으로 마을 사람들은 과부를 교회 마당에서 공개살인하는데, 과부와 잠자리까지 한 ‘나’는 끽소리 못하고 군중 속에서 얼어 있는 반면, 조르바는 홀로 목숨을 걸고 살인자들에게 맞선다. 과부의 피살 이후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진짜 사내란 이런 거야…….
그(조르바)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체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385쪽).
이러한 ‘나’의 고백을 들은 김에 다시 소설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나’의 또다른 고백을 들어보자.
(조르바가 러시아사람을 만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자 각자의 인생을 춤으로 표현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무용담이 펼쳐진 후)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러자면 달음박질을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배를 젓는 것, 차를 모는 것, 사격을 배워야 했다.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118쪽).
‘나’는 조르바를 통해 인생의 위대한 진리를 배우고 성장했지만, ‘나’의 사업은 고가케이블이 무너지면서 함께 망가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칼로 벤 듯이 깨끗하게(466쪽), 요즘 말로 쿨하게, 그러나 영원히 헤어진다. 이후 조르바는 루마니아, 시베리아, 독일 등지를 거쳐 세르비아에서 생을 마감한다. 조르바의 유언 역시 그답다.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내 평생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477쪽, 478쪽)
<영혼의 자서전>에서 카잔차키스는 고백한다. ‘내 영혼에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을 대라면 호메로스와 부처와 니체와 베르그송, 그리고 조르바를 꼽으리라.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책을 덮고 나서도 온몸으로 ‘여기, 그리고 지금’에 무한히 충실했던 사나이, 친구와 여인과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했던 자유인, 산투리와 춤을 즐기던 예술인 그리고 같이 음식을 나누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던 소박한 사람 조르바의 모습이 떠나가지 않는다.
[1]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재미 없는 책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몇 번을 읽어도 새로운 책으로다가올 수도 있다.
[2] 조르바는 터키와의 투쟁에 목숨을 걸기도 했고, 방물장수로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니기도 했으며, 소설 속, 그리고 실제 인생에서의 여성 추구 편력은 점잖은 여성 독자를 다소간 불편하게 할 정도이다.
[3] ‘그런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래서’란다.
[4] 고대 프리기아의 첫 번째 왕 고르디우스의 마차가 신전 기둥에 묶여 있는데 아무도 그 매듭을 풀지 못했으며 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자가 아시아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애마 부케팔로스의 갈기를 휘날리며 도착한 알랙산더는 매듭을 풀어 보려고 애썼으나 도저히 풀 수가 없자 부아가 치밀어 칼을 빼서 매듭 한가운데를 잘랐다. 다음 순간 군중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아시아의 위대한 왕 만세!”. 그렇게 한없이 단순한 방법으로 신탁이 이루어진 것이다.
[5]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단 한 군데만 밑줄을 그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글귀를 택하겠다.
[6] 그의 또 다른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미하일리스 대장>이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올라 파문당한 그는 교회에 묻히지 못하였다.
[7] <영혼의 자서전>에도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만, 아토스 산에서 20여년 고행하며 구원을 갈망한 수도승이 여자와 동침하고서야 ‘하느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 분이신지 깨닫고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장면이 작가론에서도 언급되는데(487쪽, 488쪽) 정말 굉장한 울림이 있는 고백이다.
[8] 그렇지만 종당에는 ‘나’는 과부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366쪽 이하). 아쉽게도 그에 관한 세부묘사는 전혀 없다.
[9] 작품의 곳곳에 여성에 대한 조르바의 거침 없는 생각이 펼쳐지는데, 여성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