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을 통해 접했던 박민규를 다시 만났다.
그의 글은 경쾌하나 가볍지 않다. 세상을 향한 그의 풍자, 조랑, 해학을 접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져 나온다. 그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세상의 주변인들이고 어디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자들이어서, 심각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무더운 여름 중고가전상에서 사들여온 냉장고의 무지막지한 소음에 놀라 고쳐보려고 하다가 그의 말대로 놀라운 냉장의 세계를 깨달았다. 모든 부패한 것들과 싸우는 냉장고의 세계… 그 심오한 냉장의 세계에 눈뜬 주인공은 허접한 맥주깡통 대신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과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들을 차례차례 냉장고에 넣기 시작한다(물론 대부분은 해악을 끼치는 것들이었다. 다만 아버지, 실직자, 노숙자 등은 소중한 것인 것 같기도 해악인 것 같기도 하다). 80년대 개그인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그대로.. 문을 연다, 넣는다, 그리곤 닫는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은 ‘게임의 법칙’에 대한 전면적인 무시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부조리, 약육강식, 허위, 부패로 가득한 세상의 이러 저러한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나약한 개인, 더욱이 주변부 삼류인생을 사는 주인공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는 이를 냉장고에 넣어 버리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방식대로 정해진 게임의 법칙을 무시해 버리는 것 같았다. 미국이 나쁘면 미국 보다 더 무력과 경제력을 모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냉장고에 넣어 버림으로써 그 해악을 일거에 해결해 버린다. 모든 해악들이 냉장고 속을 차지하는 날 세상의 그 심오한 냉장 세계의 원리에 따라 깨끗해 질 수 있을까?
어느 날 주인공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정갈한 카스테라 한접시만이 냉장고를 지키고 있었고, 그 카스테라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맛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테라’,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패한 해악으로 버무려진 것일까 아님, 해악들이 사라진 자리에 핀 연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