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각, 쉽고 재밌는 서술로 역사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온 이덕일씨의 신작인 이 책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우선, 비록 대중적인 글을 써 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역사학자로서 역사서술만을 해 오던 작가가 소설(역사소설이기는 하지만)이라는 첫 외도를 시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으로 책을 보게 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제도적 호국불교를 차치하더라도 서산대사, 사명대사로 상징되던 호국불교의 관념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승려집단이 역모(逆謀) 내지 혁세(革世)라는 반체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운부는 승려들 가운데 뛰어난 일여, 묘정, 대성법주 등 일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시키면서 팔도의 중들과 체결하였다. 그리고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眞人 정(鄭), 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다」
- <숙종실록> 23년 1월 10일
적어도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실록이라는 객관적 사료에 터잡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소설이 그러하듯이 사료는 극히 빈약하므로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당시 상황이나 사건의 전개상황,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역할 등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메울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경우 주어진 사료가 숙종실록에 나타난 극히 일부 사실에 제한되고, 저자가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온 소설가가 아니라 객관적 전거에 천착하여 온 역사학자라는 점에서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은 아쉽게도 우려로 기울게 된다.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된 숙종조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살펴보자. 40여년의 최장수 재위를 자랑(?)하는 숙종시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환국(換局)정치를 그 특징으로 한다. 개국 초기 훈구파에 대항하여 정치력을 키워오던 사람세력은 성종조에 이르러 명실상부 중앙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들도 시대적 이슈의 흐름에 따라 동인, 서인으로 분당하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여 이른바 ‘붕당정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숙종조에 이르러 주된 정치세력은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당수로 하는 남인으로 대표되는데, 숙종은 이러한 붕당정치를 철저하게 왕권강화 목적에 이용한다. 집권초 선대인 효종, 현종 대의 예송논쟁을 계기로 오랫동안 정권에 소외되어 왔던 남인을 중용했던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노론정권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정권을, 갑술환국으로 재차 노론정권을 세웠다. 남인과 노론이라는 대립되는 정당간의 정권교체는 지금과 같은 평화적 정권교체가 아니라 ‘집권하면 권력, 패배하면 죽음’이라는 목숨을 담보로 한 필사적인 정치투쟁이었으며, 자연히 숙종조의 환국정치는 정적에 대한 증오의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의 주도하에 지배층인 사대부간에 이러한 증오의 정치가 횡행하는 판에 조선 사회 전체의 풍속이 아름답거나 평온할 리 만무하리라. 중인과 서얼에 대한 차별, 농민에 대한 수탈, 승려집단을 포함한 천민계층에 대한 폭압 등이 어우러져 숙종조는 가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였고, 숙종은 이러한 투쟁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최장수 임금으로 등극한 셈이었다.[1]
이쯤되면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인공들이 속한 집단이 밝혀진다. 운부를 중심으로 한 승려계급은 조선조의 고집스럽고 우악스러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반체제집단의[2] 성격을 띠게 되고 이들의 분노는 혁명에너지로 전화된다.
다음으로 서얼 내지 중인계층에 속하는 이영창, 김정열, 김경함, 유선기, 이절 등의 무리이다. 이들은 정승판서의 아비를 두었으나 그 어미가 천출이라는 이유로 사대부로 대접받지 못함에 따라 평생 과거에도 응시 못하는 한을 안고 산다. 애초부터 꿈과 희망이 없는 인생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이 없을 수 있으랴. 숙종조 최대의 스타 장희빈과 그 오라비 장희재 역시 중인 출신이었지만,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과 역관 출신 집안의 재력으로, 장희빈은 국모의 자리에 장희재는 병권을 한손에 틀어쥐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김정열을 위시한 중인 내지 서얼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라고 못할손가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으리라.
또한 장길산으로 대표되는 도적의 무리가 있다. 명종 때의 임꺽정과 함께 조선조의 대표적 도적두령인 장길산은 휘하 병사가 수천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 군사집단이자 반체제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민출신이지만, 관리의 수탈에 못 이겨 호구지책으로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윤정이라는 노비이다. 아버지가 남인의 거두인 백호 윤휴였지만, 그 어미가 천하다는 이유로 노비 신세를 면하지 못한 그녀는 아비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은 후 더욱 신산한 삶을 살게 된다. 풍수사이자 혁세운동의 주모자인 이영창을 만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목숨을 바친다.
이들 반체제세력들은 장길산 무리의 도성진격, 전국 승려집단의 무장봉기, 일부 매수된 무인집단의 협조봉기 등을 통해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 와중에 윤정을 이용한 숙종납치사건이 감행되는데, 비록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숙종이 여인의 마음을 얻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였다는 데 대한 신랄한 조롱 내지 풍자가 아닌가 싶다. 하긴 정비 민씨를 후궁 희빈 장씨 때문에 하루 아침에 폐비하였다가, 장씨에게서 마음이 떠나자 민씨를 복위시킨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여인에 대한 끝 모를 집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숙종납치로 순조롭게 진행될 듯한 혁세운동은 순식간에 파탄에 이르게 된다. 모든 혁명운동이 그러하듯 기회주의적 배신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보전을 위해 조직과 동료를 팔아 치우고, 혁세운동의 주모자들이 일거에 체포됨에 따라 혁세운동은 허무한 종말에 이른다. 승려집단의 우두머리인 운부(雲浮)의 법명처럼 혁세운동은 헛된 뜬구름처럼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혁세를 꾀한 주인공들이 대안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임금은 실록에 나와 있는 대로 정씨와 최씨의 후손인데, 정씨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고집하다 태종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선죽교에서 참살된 정몽주를, 최씨는 요동정벌을 꿈꾸다 위화도회군을 감행한 이성계에게 주살된 비운의 인물이다. 이처럼 정씨와 최씨는 조선 개국에 대한 저항과 역모의 씨앗을 배태한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씨 후손이 나타나 새로운 왕국을 열리라는 <정감록>의 비기와 결합되어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이 가장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부분이었다고 한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아쉬운 면은 사료를 재구성하고 창조적으로 가공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미숙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혁세운동이 실제로 거사되기 이전까지의 오밀조밀한 계획, 이에 가담하는 인간군상들의 다양한 면모가 숙종납치사건이라는 어찌 보면 기발한 사건 이후로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장길산의 무리, 승려집단, 거사에 참여하기로 했던 여타 집단들이 어떻게 난국에 대응하고, 어떠한 최후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비장한 서사가 생략됨으로써 소설이 싱거워진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역사학자가 쓴 소설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어 버린 셈이다.[3]
증오의 정치, 불평등한 제도, 신분에 따른 차별과 억압,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는 썩기 마련이다. 썩은 환부는 칼로 도려 내야만 완치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조선은 숙종 이후 급격히 쇠퇴하면서(물론 정조대의 문예부흥이 있다고는 하지만..)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다 일제 병합으로 왕조의 몰락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증오, 불평등, 차별과 억압, 착취로부터 자유로운가?
저자는 이것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1] 흔히 폭압적 독재군주 하면, 태종 이방원 또는 세조를 연상하게 되는데 저자는 숙종을 일컬어 ‘살리는’ 임금이 아니라 ‘죽이는’ 임금이라고 평하고 있다. 실제 윤정의 아비인 윤휴는 숙종에 의해 사사당하면서 ‘선비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또 무엇인가’라고 일갈했고, 윤휴의 이 한마디는 당시 식자층에 회자되었다고 한다.
[2] 흔히 계율을 쉽게 어기는 중을 ‘땡초’라고 비하하는데, 땡초는 ‘당취(黨聚)’의 변용어로 조선 개국초의 불교탄압 정책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한 승려집단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를 보더라도 승려집단의 반체제성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