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에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 P69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이자 화가, 감독,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하정우가 궁금했다. 그가 주교처럼 설파하는 걷기 예찬도 듣고 싶었다. 쏟아지는 신간 중에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주말 몇 시간을 투자해 후루룩 읽어내려갔다. 나와 비슷한 부분도 있어 매우 놀랐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재능이 있다는 고백에 나도 모르게 정감 갔다.
"나는 이모저모 두루 관심이 많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여 걸어 다니는 사람, 말하면서도 건들건들 몸을 움직이고 '제자리 뛰기'라도 해야 성에 차는, 도통 가만있질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가만있지 못한다고 말하는 대신 '가만있지 못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야겠다. 그 능력 덕분에 배우, 감독, 제작자,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여러 직업을 한 번의 생에 동시에 살아가는 축복도 누리는 것일 테니까." P221-222
하정우의 한 에피소드를 보자. 회의 내내 수첩을 펼쳐 놓고 낙서를 하고 있어 사람들은 딴청 피운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어느 웹툰 작가에게 들었다. '남들은 내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멍하게 있으면 놀고 있거나 멍 때린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아이디어 구상 중인데..'라는 말이다. 하정우는 회의 전 양해를 구한다고 한다. 내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해 그런데 회의 속기록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틀림없이 회의에 귀 기울이고 있는다고 말이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습관은 걷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 준거 일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좀 가만히 있어라, 집중할 수 없냐'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럴 때 하정우는 호기심이 왕성해 여러 군데 안테나를 돌리고 있는 거라 말한다.
누구나 ADHD를 조금씩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다. 책을 한 번 잡으면 꾸준히 읽지 않고 여러 책을 돌려 읽는다. 카페 가서도 기사 쓰다, 영화 리뷰 쓰다, 인터뷰를 쓰다가 돌아온다. 누구는 '그렇게 산만하게 하면 다른 거에 바로 인입이 되나요?' 묻는데,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장르가 다르고 작가가 다른데 헷갈릴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나 또한 진단받지 않았을 뿐 ADHD 성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관심 많은 내 성향 중 하나라고 생각할란다. 세상은 하나로 똑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도태되고,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정우는 기분에 문제가 생기는 걷는다. 생각이 많아지고 짓누를 때면 걷기를 통해 정리한다. 현대인은 평일과 주말, 낮과 밤 상관없이 일에 매달린다. 휴식이라고 떠난 장소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빙자한 또 다른 것을 하고 있다. 하정우는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나를 일으켜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하는 거였음을 배웠다. 일과 휴식을 어중간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같은 핑계를 대지 않는 것.
하정우에게 가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 같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는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이 양립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려 한다.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한다.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단히 유리하려는 이유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란 늘 대중의 시선과 관심의 대상이다. 때문에 정신적인 면역력이 약하다. 일을 조금이라도 쉬면 금세 잊히고, 재기에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작품에 대한 실패가 말목을 잡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비단 연예인 뿐만이 아니다. 현대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어디에 평가받아야 한다는 압박은 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눈 밑 떨림으로 시작되었다. 병원은 최근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냐면서 마음을 편히 가지라 말하며 근육 이완제, 신경안정제를 처방했다. 하지만 그다지 잘 듣는지 모르겠다. 왼쪽으로 전이가 되기도 했고, 이제 사실상 포기 상태다. 원인은 뚜렷하지 않다는데 약은 준다. 일단 신경을 안정시켜 마음을 편히 갖게 하려는 심산이다. 하지만 무기력해지고 자꾸만 졸리다. 글을 써야 하는데 의욕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그때 하정우의 책을 만났다.
어쩌면 걷기 강박관념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운동이 아니라 노동 아닐까? 밤낮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이렇게 많이 걸을 수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하정우는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 두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위와 같은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힘들수록 주저 않거나 눕기보다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밖으로 나가 동네라도, 공원 트랙이라도 걸어야겠다 다짐한다. 녹슨 마음은 걷다 보면 기름칠한 것처럼 윤기와 생기가 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나는 현상을 잘 관찰하면 좋다. 이는 몸과 마음을 전환하거나 쉬라는 신호다.
위기 상황에도 매일 꾸준히 루틴을 반복하다 보면 쌓이고 쌓여 일상을 살아갈 연료가 된다. 이런 루틴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걷기와 독서의 공통점을 말하기에 무릎을 치며 동의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핑계일 뿐 하루에 10페이지 500걸음쯤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 핑계를 대고 미루면 미룰수록 루틴은 무너지고 일상을 살아갈 힘도 빠지게 된다.
문득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이 생각났다. 길고 가는 인체를 표현한 스위스의 조각가 겸 화가로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하정우의 에세이 제목도 그렇고 걷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진보하고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걷고 있으면 살아 있음을 느끼고, 복잡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아름다운 풍경도 덤으로 얻는다.
물론 걷다 보면 몸이 힘들고 지친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네발로 걷다가 직립보행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고 진화했다. 현대인 또한 걷기를 통해 방황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탄력받아 걷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읽기, 보기, 쓰기라는 일상의 걸음을 한 발짝 부단히 걸어가고 있는 행위를 통해.
걷는사람하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