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도 이런 의적이 있었을까? 사대부가의 여식이었으나, 난세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친척 손에서 자란 가혜.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를 채 복구하기 전에 가뭄과 흉년과 전염병의 창궐로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을 위해 의적이 되어
백성들에게 은도(은혜로운 도적)이라 불리기까지 한다. 강단 있고 당차며 사리분별이 분명하지만
여자로 태어났기에 자신의 품은 뜻을 펼 수 없어서 고관대작의 집의 은자를 털어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연명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한다.
백성들의 입에 회자될수록 양묘로 불리는 가혜를 향한 포도청의 압박은 거세지고
임금까지 나서서 양묘를 생포해올 것을 재촉할 지경인데,
정작 가혜는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을 뒤쫓고 있는 병조판서 집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다.
한 지붕 아래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동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혼인이라면 소박받고 쫓겨나
의적으로 활동하려하지만 자신을 어여쁘게 봐 주는 시아버지도 때론 개구져 보이는 남편에게도 점점 마음문은 열린다.
그런데 정작 가혜만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편 인후 역시도 한량으로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세간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1,2 모두 합해 900쪽이 넘은 두터운 내용은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의 기록을
담은 사초 <밀명지>란 가상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인 모략과 암투가 섞여 있어서 자칫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만으로는 지루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이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당차고 권세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낼 수 있는 강한 여주인공.
뛰어난 무예로 급습을 받았을 때 의적 활동을 하다 다친 다리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하인들의 목숨까지 구하려 자신의 아픔을 무릅쓰고 퇴로를 막아 싸우다
결국 인질로 잡혀가기를 선택하는 가혜의 모습은 무능한 임금의 모습과 많이 대조된다.
그리고 가혜와 대비되는 또라는 인물, 경녕군주.
마음을 얻고 백성을 위해 움직이는 가혜와 달리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부리고
그들을 쉽게 없애는 경녕군주의 모습은 아랫사람들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는 윗사람이 갖추어야할 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사람을 중심에 두는 가혜로 인한 여러 인물들의 변화는
이야기를 단조롭지 않고 입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1권을 읽으면서는 가해가 무예를 익히게 된 배경이나 의적으로 할동하게 된 계기, 친부모님의 영향 등이 의구심이 남았는데,
2권을 다 읽고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서야 비로소 의구심이 해결이되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록 의적으로 활동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병자 호란이후 더욱 열악해진 여성의 지위를 생각할 때
많은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고 일을 하는 것이나
아랫사람의 어려움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며 신의를 쌓는 모습 등은
마음 뭉클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야기 속 백성들이 처한 현실은 지금과도 무관하지 않기에 책을 읽고나니 생각은 자연스레 시국으로 연결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를 마주하고 있다.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살기 어려워도 자신의 좋은 의도로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는 지도자의 모습은
소설 속 왕이 백성을 위해 구휼미를 내리고 기우제를 지내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했다고 여기는
높은 권좌에 앉아 백성의 아픔을 체휼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