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나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어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그 어떤 힘든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인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서른이 되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소소한 것에 화가 나고 질투가 나고 이십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냥 이십대와 삼십대의 차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든다. 물론 나이가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냥 나일뿐 인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는 나의 생각과 인식은 나를 아주 조금 슬프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이고, 시간이 더 흘러도 나는 나일것이다.
나는 20대 중반무렵부터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불안감은 20후반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불면증에까지 시달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서른살이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안달복달해도 시간이 흘러 나는 서른이 되었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지 않았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안달복달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완전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십대 후반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전전긍긍하지 않고, 어느정도의 적응에 들어간 것이다. 여자에게 나이가 한 살 한살 늘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참 슬픈 일인 것도 같다. 여자 나이 서른이란...주름이 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는 아름답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탄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슬퍼한다. 아마 내 마음속에는 서른이 되면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고 살이 뒤룩뒤룩찌고, 욕도 하는 뭐 그런 나이를 상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약간의 탄력은 떨어졌지만 완전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자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그냥 서른에 대한 기우인 것이다.
그리고 이십대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에 바란 것은 아름다운 외양이 아니라,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면 내 꿈을 이루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서른에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독립을 꿈꾸었다.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홀로 멋있는 집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깟 천원. 이천원에 손 벌벌떠는 아이가 아니라, 내가 사고 싶은 것도 모두 살 수 있는 그런게 어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그때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천원. 이천원에 벌벌 떠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위해 적금을 하고 지출이 많았던 달은 걱정에 시달리는 그런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난 여전히 엄마. 아빠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어른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른이란 현실은 이런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거저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엄마. 아빠에게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마 내가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도 부모님께는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참 좋다.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고 엄마. 아빠에게만은 아이라는 사실..나는 그게 참 좋다. 그게 어릴때와 지금의 차이다. 어릴때는 엄마가 아이 취급을 하면 그게 그렇게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 좋다.
나는 사실 일본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좀 읽어보고 싶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소녀 감성이 풍부한 나는 핑크색에 열광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의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코 이 책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읽다보니 그게 더 좋았다. 이 세상의 모든 인생과 사랑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일이니 말이다. 더불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모조리 읽고 싶어졌다.
서른 넘어 함박눈의 작가 다나베세이코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작가이다. 일본작품과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작가의 나이이다. 현재 여든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녀가 예전에 집필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소녀감성이 풍부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며 연애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그녀를 보니 더더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꺠닫는다.
서른 넘어 함박눈은 9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과는 사뭇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렇게 흔한 커리어 우먼도, 멋진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하는 여성들은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우리가 흔히 일상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녀들이다. 농담이라도 좋으니 결혼해 줄래 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그녀, 바람을 피워도 자신의 옆에 그가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그녀들이 등장한다. 책을 읽으며 참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씁쓸한 것만은 아니었다. 작가는 이 씁쓸한 상황들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면서 또 조소하고, 또 웃게 만들고, 또 씁쓸하게 하고...한마디로 작가는 독자들을 쥐락펴락하며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일본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갔고,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9개의 단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들은 첫번째 이야기인 지금 몇시에요와 깜짝우동, 그래도 좋아해..였다.
지금 몇시에요는 서른살이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가 모르는 남성에게 유일하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지금 몇시에요?" 였다.
그 말은 누구나 친절하게 답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대화를 계기로 어떤 로맨스를 꿈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을 가서 늘 그렇게 모르는 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참 귀여운 여성이다.
깜짝우동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딸과 싸운 엄마가 집을 나가므로 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는 엄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같이 찾아주겠다고 하며 그녀를 커피숍과 영화관으로 데리고 다닌다.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엄마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돌아온다. 살짝 슬펐던 이야기이다. 모든 딸과 엄마들의 이야기 인 것 같았다. 엄마와 딸은 사이가 좋으면서도 자주 싸운다. 하지만 언제 그랬다는 듯이 미안해라는 말 따위 하지 않고도 다시 사이좋게 잘 지낸다.
그래도 좋아해는 좀 어이가 없지만 재미난 작품이었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인데 남자에게는 약간의 바람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부인은 그런 남자라도 좋으니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란다. 재미는 있었지만 난 그 여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바람기의 남자와 무슨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일까??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생활과 사랑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그래서 많이 공감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는 연애이야기....이런 작품은 참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나에게 참 많이 보탬이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소설에서 어떤 깨달음과 보탬을 얻기란 어지간히 어려운 일인데 작가는 그 일을 해낸듯 하다.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전히 여자이고 사랑에 울고 웃는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나도 예쁘게 나이 들고 싶다. 사랑에 가슴 설레어하고, 예쁜 것에 가슴 뛰어하는 그런 여성이 되고 싶다. 어떤 아름다운 것을 봐도 무심한, 아무 감흥없는 그런 여성은 되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벚꽃이 피는 이런 봄날에는 이 봄을 마음껏 즐기고,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약간 슬퍼하기도 하는 소녀감성을 품은 채 나는 한 살 한 살 나이 먹고 싶다.
좀 뜬금없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나는 남자보는 눈을 더 높이고, 떳떳한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난 존경할 수 있고, 진실하며, 내가 사랑하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성을 원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이 책은 내게 남자보는 눈을 더 높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작가는 우리 여성들에게 이야기의 그녀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랑을 꿈꾸고 다른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