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Apocalypse(종말)와 Contagion(전염), 그리고 New Normal(새로운 시대의 기준)은 소설이 아닌 현실이다. SF 앤솔러지 『팬데믹』이 더 이상 SF가 아닌 사회 소설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 『팬데믹』의 소챕터인 「Apocalypse 끝과 시작」와 「Contagion 전염의 충격」, 그리고 「New Normal(다시 만난 세계)」는 각각 두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단연 김초엽 작가의 「최후의 라이오니」다.
로몬은 죽음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종족이다. 이들은 다른 문명의 소멸과 죽음을 처리하며 살아간다. 로몬 종족의 일원이지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슬픔에 공감한다. 나는 멸망과 죽음이 주는 압도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스템은 나에게 의심스러운 멸망 직전의 거주구 3420ED의 탐사를 의뢰했다. 인간들은 사라져버리고 멸망 직전의 기계만 남은 그곳에서 기계문명의 지도자인 셀은 나를 라이오니라고 여기며 감금한다.
복제와 자의식 전송을 통하여 영생을 누리던 3420ED 거주지의 종족에게 감염병 D가 퍼지고 난 뒤 그들은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었다. 영생을 누리던 불멸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자살하지만 복제의 과정에서 결함이 생겨버린 존재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 그리고 결함을 가진 복제인들 중의 하나인 라이오니는 죽음으로 가득찬 3420ED 구역을 포기하지 않고 기계들과 함께 공존의 희망을 갖는다.
결국 이 이야기는 죽음과 공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해 무감해 진다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고 고립된 인간은 결국 자멸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려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 소설 속에 보인다.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은 불구덩이 같은 낮과 빙하와 같은 밤만 존재하는 행성에서 중간지대를 찾아 살아가기 위해 고래 위에 삶의 터전을 잡아야 하는 이야기이다. 고래가 죽어버리면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이야기는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정의 상자」는 바이러스 위기 상황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로 회귀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이야기이다. 세계 초유의 위기 상황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와의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슬플 뿐이다. 퀴어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작가의 의도도 보인다.
「그 상자」는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회복되어 면역력을 갖추게 된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이러스의 창궐이 장기화가 될 경우, 가능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놀라움을 넘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흥미로만 따지자면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한 페이지 반을 읽었을 때, ‘혹시 오타인가?’라는 의심에서 시작하여 세 페이지를 읽었을 때 알아차린 파열음의 비밀을 발견할 순간 온갖 파열음을 폭발시키며 웃어버렸다. 작가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위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벌레 폭풍」은 바이러스가 아닌 벌레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섹트포비아에 가까운 두려움을 지닌 내가 읽기엔 상당히 도전적인 소설이었다. 「미정의 상자」와 마찬가지로 퀴어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둔 면은 SF속에서 퀴어를 발견한다는 것이 신선했다.
SF소설이란 비현실적이고 지금의 우리와는 멀리 있어야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텐데, 이 책 『팬데믹』은 우리의 현실과 지나치게 가깝다. 재미보다는 문제의식과 두려움을 안고 읽을 수 밖에 없는 SF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