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저는 꽤나 팍팍한 한해를 보내는 중입니다. 일단 직장에서 직급이 바뀌어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업무도 많아졌습니다. 몸도 힘들지만 심적으로 가장 힘들더군요. 남편은 이직을 했습니다. 집안일에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망설여지던 남편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습니다. 큰 아이는 인생에서 감정기복의 극단을 맛보는 고3이 되었습니다. 짜증과 스트레스는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엄마에게도 양극단을 보여주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아직 사춘기를 다 벗어나지 못한 채 고1이 되었습니다. 사춘기는 벼슬인가?를 엄마가 늘 머릿속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휴가를 못갔습니다. 그리고나서부터 습관처럼 남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 어디든 괜찮으니까 집 말고 아무데나 가서 한달 살기 하고 싶다.
전 개인적으로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어릴 땐 좀더 편협했습니다. 나 살기도 바빠 죽겠고, 세상엔 공부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고,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은데, 구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까지 알아야 하나, 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죠. 나이가 좀 들어버린 지금은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예전 취향이 남아 있는건지 지금도 고전이나 인문학 도서에 비해 에세이를 즐기지 않는 것은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상이라는 것은 소소할 뿐인데 마치 자신이 일상은 대단한 양, 무언가 특별히 행복한 양 표현하는 것이 대단히 거북스러웠나 봅니다. 아무리 소탈하게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라 할지라도 활자화 되어 대중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절대로 소소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어쩌면 팍팍한 지금 나의 삶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가의 삶이 너무나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약간의 반전이었다랄까요? 보라보라섬이라니요! 전 이름도 처음 들어봤을 뿐더러,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도 못합니다. 프랑스인 남편요?그래서 좀더 자유롭고 낭만적인 일상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그냥 배경만 들었는데도 무언가 특별하게 들리잖아요? 여유로운 윤택함과 한가로운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던 것은 저만의 착각이었을까요?
하루종일 해변가에서 바다와 햇살을 즐기고 달콤한 열대 과일에 취했을 거라는 저의 상상과는 다르게 보라보라섬의 일상은 그저 우리의 일상과 다를다 없더군요. 모기에게 뜯기고, 시어머니의 방문을 두려워하고, 마트에서의 장보기는 고대하는 일이며, 통장 잔고를 걱정하는 삶은 왜 이리 저에게 친숙했을까요? 오히려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평범한 이야기만을 들려준다는 데에서 저의 거부감을 한껏 걷어내 주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특별한 배경에 얽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특별하지 않은 표현들이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충실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지금, 여기에 만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라 (내일의 걱정에도 불구하고)라는 괄호 속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읽는 내내 알아차렸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친밀감이 상승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책을 읽으면서 정말 표현 그대로 보물 같은 문구를 하나 찾았습니다.
살아보니까 보물 지도 자체가 사실은 보물이더라.
그런데 문구 스스로가 자신은 보물 그 자체 보다는 보물지도 이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요. 보물 그 자체가 아니라 보물지도와 같은 삶을 살고 싶네요.
에잇, 한달살기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휴가 따위 없으면 어떻습니까. 내 일상 속의 보물 지도를 직접 내가 스스로 하나 만들어 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