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만에 다 읽은 소설로, 미문학사 시간에 흑인 문학에 대해 배우다가 유독 ‘리처드 라이트’가 언급이 많이 되기에 읽어봤다.
'토박이’라는 소설이 가장 유명한 것 같았지만 작가를 보고 책을 읽기로 결심했기에 작가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고,
앉은 자리에서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워낙 청소년의 성장물을 좋아하는 지라 처음부터 무척 재밌게 읽었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정 속에서 자라는 이 책의 작가 ‘리처드’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엄마에게 욕을 퍼붓고 자식들을 때리고 심지어는 후에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처자식을 버린다. 당장 먹을 것도 없던 그의 어머니와 어린 리처드는
아버지란 작자에게 가서 차비라도 달라고 구걸하지만 푼돈을 갖고 그들을 희롱하며 모독한다. 리처드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자연히 잊고 싶은 기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후 다시 아버지를 만난 것은 리처드가 작가로서 성공한 후로, 그는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한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그저 남부의 실패한 흑인 농부에 불과하였으며 왜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덩치와 튀어나온 혈관들이, 그동안 기억 속에 공포와 분노로 자리 잡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리처드는 연민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으로 고생했던 직접적 원인인아버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에서 작가의 서술이 얼마나 짠했던지 모른다. 오랜 시간 기억의 단편 속에서 ‘잊고 싶은’ 커다란 존재는 사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였던 것을.. 하며 부질없음을 느끼는 리처드. 또, 자신이 버리고 간 자식이 흑인이 차별받던 그 시대에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할 줄 누가 알았을까.
단절된 부자관계는 ‘포옹’으로 끝난다.
당시 흑인들에게 흔히 가해지던 '린치'
소설 속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주변 이웃들이 린치당해서 총살당하고, 맞아죽곤 한다. 사진은 1930년대에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이유로 물증도 없이
린치당한 흑인 두명의 사진..
리처드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보지 못했고,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9학년을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본격적으로 사회로 나가면서 ‘인종’이라는 커다란 편견의 벽에
부닥치게 된다. 백인이라는 종족은 그저 피부색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인간’이었다. 흑인들은 당시에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분류되었기에,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했다. 리처드의 외삼촌은 백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장사를 계속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피해자가 피해자가 아니고 가해자가 가해자가
아닌 이 당시에 정작 도망가야 하는건 리처드의 가족이었다.
‘나는 어떤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문명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화도, 그것과 싸우지 않고 살아야 비로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처드의 외할머니는 백인으로 아주 보수적인 종교인이지만 리처드를 망설임 없이 피가 보일정도로 체벌을 가하며, 험한 말도 예사처럼 한다. 세례를 받지 않는 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자를 악마의 자식이라며 마귀가 들었다며 없는 사람 취급한다. 리처드는 종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혐오감과 메스꺼움을 느낀다. 왜 종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이렇게 주변 사람들은 신앙을 강요하는지 어린나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 에디이모는 리처드를 싫어한다. 아니 증오한다. 리처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이유없이 리처드를 때린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맞아야 하는지 ‘불의’에 맞서지만 에디이모에게 이는 ‘교화’를 위한 폭력이
아니라 고통을 주기위한 폭력이다. 리처드가 채찍놀이를 하다가 넘어져서 피가 많이 나자 에디이모는 난생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누구보다 헌신적인 종교인인 그녀와
할머니가 얼마나 모순된 인물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환경이기에 리처드가 종교에 대해 거부감을 유독 갖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랑도 없고 폭력이 유일한 교화의 도구였던 가정에서 자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책 속의 배경인 미국 남부는 당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으나, 백인들은 흑인들에 비해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우월하며, 흑인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친구이지만 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는 아주 모순된 상황인 것이다. 쳐다보거나 말대꾸를 해서도 안 되며 말끝에는 무조건 sir(어르신)이라는
극존칭을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대항한다고 생각하며 흑인의 권리를 넘어선다고 보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리처드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 백인도 흑인도 모두 같은 인간인데 왜 서로 다르게 행동해야하는 지. 아마 가정에서는 미리 리처드의 이러한 자존심을 꺾어놓기 위해, 순종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연스레
흑인 가정에는 억압적이고 폭력적, 강압적인 환경이 조성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기형적인 미국 남부 사회의 시스템이 낳은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너는 백인들 앞에 있을 때 행동하기 전에 생각해야만 하고,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만 해. 지금 너의 행동 방식은 우리 인종들(흑인) 사이에서는 정당해. 그러나 백인들에게 있어 서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너의 행동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이야.’
북부라는 이상향을 목표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자기 비하의 자아의 먹힐 것 같았기에 살기위해 떠나기로 결심한다. 리처드가 현실을 직시하고 또
이게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변혁에 대한 의지를 가진 것은 어쩌다 접한‘책’이다. 자신을 죽이고 사는 현실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급격히 발전하는 풍요로운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다룬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작가들에 매료되었고, 맹켄이니 싱클레어 루이스, 드라이저니 하는 당대 문호들의 책을 통해 현실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될 북부로 갈 결심을 굳힌다.
사회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도구가 ‘책’이었고, 그는 백인에게 부탁하여 거짓말까지 하며 책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데도 왜 독서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와 내 독서 습관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반성했다. 당시 1930년대는 막연히 미문학사 시간에 대공황 이후,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었다고만 배웠지 비주류 사회였던 ‘흑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이 ‘깜둥이’라고 불리며 핍박받던 세월들 하며, 지금의 권리를 얻기 위해 들였을
수많은 피와 땀으로 뒤섞인 노력들. 수동적인 삶에서 적극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꿔가는 리처드의 어려웠던 시절들! 재밌게 잘 읽었다! 다음은 ‘토박이’를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