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집에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그래도 늦었는데 초조해지고 화가 났다. 지갑을 찾아서 돌아와 투덜거리며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때
문득 내 손에 쥐어져있는 책을 보았다. '화내지않고 핀란드까지'
그제서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화내지 않고 회사까지 가기도 힘든데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라...
처음 이 책을 만난 건 마트 안 겸손한 책장에서였다.
감성과 사진으로 충만한 여행기도 아니며, 땀과 열정이 가득한 여행기도 아니다.
서툴고 가난했던 20대 여행을 지나 능숙하고 여유있어진 30대의 여행.
나는 아직 30대는 아니지만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여행관도 변했다.
20대 초반에는 '내 자신을 찾아서!' 라는 둥 거창한 주제의 여행을 꿈꾸기도했고
쇼핑과 관광만을 탐닉하는 여행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방식' 이라면 어떤것이든 여행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사고에 여유가 생긴것일까. 20대 후반이 되어 또 다른 상황에서 여행을 해보니 알겠더라는 것이다.
나도 이런 여행기 한번 써보고 싶은것이 바램이라면 바램일까.
작가의 '여행 연륜' 이 느껴지는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글이 쫀득하게 눈에 잘 붙는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여러권의 책을 쓴 작가였다.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
터키에서 시작하여 동유럽을 거쳐 핀란드까지.
생각만해도 눈이 반짝이는 흥미로운 코스다.
나도 30대가 지나 또 한번 배낭이나 캐리어 끌고 장기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그런 즐거움을 꿈꿀수 없다면 인생이 우울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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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동유럽, 핀란드, 모두 까마득하다.
지루하던 마당일이 갑자기 할 만하게 느껴지고 밥 주기 귀찮던 닭들도 새삼 통통하고 장해보였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마다 이런 아늑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my sweet, sweet home....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여름을 보내면 어떨까.
d-데이를 앞두고 누구나 한 번쯤 생각이 변하는 것 같다.
여행은 무슨 여행, 떠나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해 답답할 일도 없고,
복잡한 지도를 들여다보며 낯선 거리를 발이 부르트도록 헤맬 필요도 없다.
무더운 여름에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을 찾다가
내 돈 들여가며 고생하느니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라면 먹으며 야구 중꼐 보는 편이 몇 배 더 현명하지 않을까.
눈 딱 감고 몇 만 원만 손해 보고 이제라도 항공권을 취소해 버리면 그만이다.
마침 여행 짐을 꾸릴 가방도 없다. 너무 작거나 어딘가 고장 난 가방들뿐이다.
새로 사자니 시간이 없다.
떠나야 하는 이유가 까맣게 잊혀지고 집을 지켜야 할 마땅한 핑계들이 잇달아, 그것도 매우 설득력 있게 떠오르는 이 순간.
"옆집에서 빌려 왔다. 그 집 가장이 출장 다닐때 마다 쓰던 것이라던데.
산 지 20년도 넘었다니 좀 오래되긴 했지만 관리를 잘해 그런지 아직 이렇게 멀쩡하구나."
어머니가 트렁크를 하나 구해다 주었다.
웅크리면 사람도 한 명 들어갈 듯 커다랗고 한쪽에만 바퀴가 두 개 달린 구식 하드케이스다.
이제 떠나지 않을 수가 없다. 긴급 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애써 예약한 항공권을 돌연 취소하고 수수료 몇 만 원을 허공에
날리다니, 나는 여태 그런 해괴한 행동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구구거리는 닭들을 뒤로한 채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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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좀 더 무례한 태도를 고수하던 한 여학생이 말한다.
"모처럼 이런 외국 여행할 때는 입에 안맞아도 현지 음식을 먹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국 음식은 집에 돌아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요 .
며칠만 더 참으면 되는데 이렇게 멀리 여행 와서까지 지지고 볶고..."
"그래. 맞는 말이에요. 여행 오면 가능한 한 현지 음식을 먹는게 좋지. 하지만 케밥이나 괴프테라면 이미 충분히 먹을 테니까.
여행 중이라도 가끔 직접 요리해 먹으면 재미도 있고 돈도 아낄 수 있지.
집 떠난 지 꽤 됐다고 하니 이쯤에서 한국 음식을 한 끼 먹는 것도 괜찮을 거야.
아무튼 준비해 놓을 테니 다른 약속이 없으면 오도록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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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유럽 여행에서, 나도 저 두 사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최소한으로 쓰면서 최대한 구경하는 것이 목표였다.
가이드북에서 미리 점찍어둔 값싼 숙소를 찾느라 무거운 배낭을 멘 채 걷고 또 걸었다.
모처럼 도착하니 방이 없다는 말에 낙담하던 기억,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순간,
빵과 물로 대충 때우던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
기차역에 쭈그리고 앉아 열차가 도착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
부슬비 내리는 새벽녘 터벅터벅 걷던 좁고 추운 골목길. 불안과 상념 때문에 잠들 수 없던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보낸 많은 밤들.
"나도 오래전에 친구와 배낭을 메고 여행한 적이 있어요."
디저트로 자두를 먹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서로 잘 모를 때여서 많이 다투기도 했는데, 지금 이런 곳에 같이 올 수 있다면 정말 그 애에게 잘해주고
엄청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젠 각자 생활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는거야.
어떤 좋은일은 일생에 한 번이니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때 충분히 즐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워요."
괴레메의 밤은 평온하다. 카파도키아는 사막성 기후라 여름철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바삭바삭 메마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동네 숙소와 식당에 켜진 불빛들이 검은 바위산에 별처럼 총총 박혀 있었다.
불빛은 기억을 깨우는 힘이 있다.
첫 여행 후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여학생들은 기분이 좋은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배는 부르고, 여행할 날은 많이 남았고, 인생의 끝을 알고 절망하기에는 그날 또한 아직 너무 멀리 놓여 있었다.
실수를 몇번이나 하든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가 있다. 이번 여행이 힘들었다면 다음은 덜 힘들 것이다.
경험처럼 확실한 선생님은 이 세상에 없다.
검은 우단처럼 깊고 부드러운 하늘에 별들이 맑게 빛났다. 바람에 닭고기 냄새가 풍겼다.
시간은 빨리 가고 소녀는 금세 어른이 되니, 이 글을 읽는 청춘들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하실 것.
지금, 당장 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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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좋고, 풍광은 아름답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약속한 대로 핀란드 헬싱키에 와 있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생에서 이렇게 순수하게 행복하기만 한 순간,
크고 작은 근심 걱정은 결이 고운 채로 몇 번이나 거른 듯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은 순정한 기쁨의 시간만을 모으면
모두 얼마나 될까. 며칠? 몇 시간?
터키에서 에스토니아까지, 먼 길이었다. 친구도, 강도도 만났고 술도, 고독도 맛봤다.
둘리틀이 핀란드에 왔고, 곧 자동차도 빌릴 예정이었다.
호숫가 마을 사본린나에 가서 오페라도 구경할 것이다.
티켓을 미리 구입한 것은 물론 그 마을의 위치 좋은 숙소에 이미 하룻밤 예약도 해 두었다. 아무 걱정이 없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이지."
스위스 인 줄리안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음이 맞지 않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행복 끝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말 그대로다. 오랜만에 만난 둘리틀과 헬싱키 항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돌아오며 시내를 구경한 것.
그 두 시간이 이번 여행에서 내내 고대하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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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렌터카나 호텔, 멋진 풍경과 공연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의 전부는 더욱 아니다. 간헐적인 이벤트성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이를 채우는 거대한 공간이다.
화려한 꽃다발을 기다리기 보다는 내 방 창가 화분 속 풀꽃이 죽지 않고 오래 피기를 더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일상의 평온함 말이다.
"별일 없는 거지?"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은 어른들뿐이다.
쾌활하고 용감한, 순진한 아이는 그런 재미없는 안부의 말을 묻지 않는다.
아직 불행의 무서움을 모르는 나이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