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책 구경하다 무심결에 김연수 산문집을 빼들었다.

가볍게 읽을만하겠다 싶어 한귀퉁이 자리잡고 앉아 책장을 넘겼다.

술술 잘 넘어가더라.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나더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만화책이라도 읽는 줄 알았을거다.

 

작가가 군에 있을 때 조울증에 빠졌더란다.

아무것도 신날 것 없는, 그런 날들은 계속되고

아침마다 덜 깬 눈으로 화장실에 가서 집게 들고 담배꽁초 줍는 일이 일과였단다.

그 날도 어김없이 졸린 눈으로 화장실에서 담배꽁초를 줍다가

피식 문간에 붙은 글귀 하나를 보고 웃음이 나더란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다는데

'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겁되 음란함에 이르지 말고,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상심에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누가 옮겨적으면서 이르지 말자를 이러지 말자로 잘못 적었나 보다.

그래, 상심에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 작가는 오줌 묻은 집게 들고 한참을 웃었단다. 별것도 아닌데 나도 그 상황이 웃겨 도서관 한 구석에서 그냥 킥킥대며 웃었다.

 

조울증 가득한 군생활에서 그렇게 자신을 꾸짖는 말이

누군가의 실수로 생겨난 오타 하나였다니!

 

읽고 웃고 생각하다 보니 그냥 책 한권이 끝났다.

김연수의 글은 늘 편안한 휴식을 주는 것 같다.

소설가 김연수가 쓴 소설도 좋지만, 인간 김연수가 쓴 에세이도 깊은 울림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뽑아낸 청춘의 문장들 속에 고전도 있고, 시도 있고, 노래 가사도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하는 이유를 문학이 할 때 자신이 가장 빛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늘 책과 함께 했던 그가 문학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일본 문화나 정서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친구들 중엔 일본어를 꽤 유창하게 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 작가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도 일본어는 못한다 할지라도 일본 작가의 문학작품을 여럿 읽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같은...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커다란 감동을 받기보다는

항상 내 반응은 "엥? 이게뭐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현실주의에 기반한 소설을 좋아하는데

일본 소설은 뭔가 환타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오늘 룸메의 추천으로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녀에 대하여>라는 책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뭔가 나를 끌어들이는 문장들도 없었고, 집중해서 읽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술렁 술렁 책장을 넘기듯 읽으며 결국 1시간만에 책을 다 읽기는 했다.

하지만 남은 감상은...글쎄 여전히 "엥? 이게뭐야?" 이런 느낌 ㅜ.ㅜ

 

주인공인 유미코와 쇼이치. 그리고 그들의 엄마가 마녀학교를 나온 마녀라는 설정이 나에게는 불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유미코가 결국엔 죽은 사람이었고, 이 소설이 어린 이 소녀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절은 하나 발견했기에 옮겨 적으려 한다.

 

"바로 이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힘이에요.

누군가의 품에 꼭 안겨 본 경험, 귀염받고 자란 기억,

비 오고 바람 불고 맑게 갠, 그런 날들에 있었던 갖가지 좋은 추억,

부모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었던 일,

생각난 것을 얘기하고 받았던 칭찬,

의심의 여지없이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것,

따뜻한 이불 속에서 푸근하게 잤던 잠,

자신이 있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일,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으면 새로운 사건과 부딪힐 때마다 그것들이 되살아나고,

또 그 위에 좋은 것들이 더해지고 쌓이고 하니까 곤경에 처해도 살아갈 수 있어요.

토대니까, 어디까지나 그 위에서 무언가를 키워가기 위해 있는 거니까."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에 대하여>, P.148

제목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의 의미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제목에서부터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테이레시아스는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혹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를 넘나들며 우리의 삶을 해석해주는 지혜의 존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역사학 혹은 역사가 역시 테이레시아스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내밀한 심층에 대해 살펴보고 사회에 대해 해석해 주는 정신의 무당 같은 존재.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주경철 교수가 지향하는 역사가의 모습이다. 나 역시 역사나 역사가가 우리 현실 사회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년도에 무엇을 했을 때 그것을 왜 했고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의미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구성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역사의 발언'에서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화 <카게무샤>를 통해 일본인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읽어내기도 하고, <먼나라 이웃나라>와 <로마인 이야기>에 들어있는 역사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또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의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하고 <돈키호테>를 통해 우리사회의 부조리들을 고발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영화 <쇼아>를 통해 지나간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것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기도 한다.

  또한 2부 '문학 속의 역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짚어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인어공주'나 '개구리 왕자'들의 거꾸로 읽기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저자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에 나타나 있는 지옥의 모습이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속의 유토피아의 모습 등을 대조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 않는 한 지옥이나 천국의 모습을 규정짓기는 힘들지만 지옥이나 천국의 모습은 그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것은 멋진 신세계 속의 신세계가 과연 천국이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쾌락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그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길에 쾌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쾌락들은 때로는 저급한 쾌락이 되어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천국이란 쾌락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아니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들로 가득한 곳이 아닐까?

역사는 왜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역사는 왜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주경철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 더 나아가서는 미래와 직결되는 핵심적인 사항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현실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데 역사라는 것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탐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근원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에 당면하고 있는 숱한 문제들은 그 문제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 나는 역사가 자아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주체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는 나를 찾는 과정이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내가 살아갈 이 땅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또 해야하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한 인간이 역사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은 우리는 소아(小我)의 단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역사를 파악하면 우리는 대아(大我)의 세계를 경험하고 체험할 수가 있다. 또 만약 이 주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역사를 볼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역사는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보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잘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